월간차지 4호 > 영업합니다 >
설정 쇼트 쓰기
👤유유민
영업은 물건의 장점을 설명하고 구매를 유도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상대의 결핍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에 맞는 물건을 들이대는 일입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팔 것인가, 그것이죠.
뭔가를 사고 싶어졌는데 그게 원래부터 사고 싶었던 것인지, 방금 영업사원의 말을 들으면서 사고 싶어진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 자신도 모르게 지폐를 계수할 때, 그러면서도 왠지 신나서 가슴이 요동칠 때, 저는 영업의 본질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그러니, 영업사원은 영업사원이라기보다 차라리 내과의사처럼 굴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는 설정 쇼트(establishing shot)이라는 개념이 있는데요.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장면 속에서, 인물이 어떤 공간과 시간에 어떤 얼굴로,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주는 쇼트를 의미합니다. 편지를 부쳐버리고 나서 문득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기요아키, 파티장 문을 열기 직전의 칸예 웨스트, 야근 후 순화동을 걷는 시인 기형도, 여자라는 이유로 프랑스과학아카데미 입회를 거부당한 직후의 마리 퀴리, 그리고 시트콤 <프렌즈> 속,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의 만남을 앞둔 제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론 머스크까지. 이들에 대한 모든 영업은 ‘설정 쇼트’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설정 쇼트의 트리트먼트를 읽어보신 다음, 양쪽에서 내민 손과 그 손 위에 놓인 것들을 보시고, 궁금한 것부터 눌러 탐독해 주세요. 재미있을 겁니다. 그리고 혹시 그들에게 또 다른 물건을 영업할 자신이 있다면, 저희에게 메일을 보내 주세요!
한편 공간이 생깁니다.
사실 『월간차지』는 ‘공간차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시작된 사이드 프로젝트였습니다. ‘공간차지 프로젝트’는 유휴공간을 ‘차지’하고, 점유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었는데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발족이 늦어지면서 『월간차지』에 더 많은 공력을 쏟을 수 있게 되었죠. 제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제 좌우명은 ‘What Will Be Will Be’입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있다는 것인데요. 뒤집어 생각하면, 이런 말을 좌우명 삼는 사람은 우연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월간차지』가 공간차지 프로젝트의 중심이 된 것도 다 일어날 일이어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5월 초,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공간차지 작업실이 문을 엽니다. 기본적으로는 『월간차지』 편집부가 실제로 앉아서 일하는 공간입니다. 원고를 읽고, 쓰고, 교정을 보고, 기획 회의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워크숍과 상영회, 각종 독서 모임이나 글쓰기 모임을 꾸릴 예정입니다. 협업 제안에도 열려 있고 커피챗도 환영합니다.
빈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도 결국 영업의, 설정 쇼트 쓰기의 한 형태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자리를,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을 미리 상상하게 만드는 일이니까요. 공간차지라는 이름 아래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지는 솔직히 저도 아직 다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영업의 묘미라는 것을 이번 호를 만들며 생각하게 됐습니다. 팔 것을 정하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알아가다 보니 팔 것을 알게 되는 것. 좀 더 정확히는, 그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갈 사람을 먼저 만나는 것이요.
곧 독자분들을 만나 뵐 수 있겠군요!
독자차지 코너도 돌아왔습니다.
3호에서 끝말잇기 마감의 저주와 함께 임시 폐쇄됐던 그 코너입니다. 저주는 해제됐습니다. 아마도요. 급한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시고 재미있는 사진과 동영상으로 『월간차지』 4호의 지면을 차지해주신 애독자 여러분–낭도 님, 연두 님, 이광호 님, 금동현 님, 김수한무까치와두루미 님, 박귤 님, J 님, 고수현 님–께 편집부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기획은 특별한 일이 없다면 지속됩니다. 공간차지 인스타그램(@chargedspace) DM, 또는 공간차지 이메일(chargedspaceproject@gmail.com)로 이달에 포착한 사진, 짤막한 캡션, 그리고 기재될 이름을 보내주세요.
자, 그럼 4호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