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 퀴리, 1911년 프랑스 파리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인가,
달콤한 것으로 기분을 전환할 것인가
마리 퀴리는 방금 막 거절당했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그가 여자라는 이유로 사실상 입회를 거부했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지 벌써 여덟 해가 지났는데도, 남자들은 여전히 마리 퀴리의 성별을 업적보다도 큰 문제로 여겼다. 마리는 아카데미의 복도를 지나 야외로 걸어 나가며, 자신이 모욕당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모욕이 너무나 저열하다는 사실에 깊은 피로를 느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디에 화를 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광장 계단에는 수백 마리의 비둘기 떼가 먹이 주는 노파를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마리는 외투 깃을 여며 쥐고는, 저토록 번듯한 건물 안에 저토록 초라하고 변변치 못한 두뇌들이 모여 있음을 잠시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마리.
저열한 모욕에는, 고능한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퀴리 부인’으로 불리는 시대가 오지 않도록, 빠른 시일 안에 문제를 돌이킬 필요가 있어요. 패배감이나 모멸감, 지끈거림에 당신의 승부욕을 내어주지 말자고요.
일단, 제가 지금 당신에게 제안하고자 하는 물건이 오직 당신에게만 도움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야겠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 혹은 복수와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도모하자 제안하는 일은 과학의 미래를 바꿀, 혹은 언젠가 다가올 미래의 시점을 드라마틱하게 앞당기는 일이에요. 당신은 피치블렌드 원석 10톤을 아궁이에서 가열해, 10그램의 폴로늄을 얻을 정도의 근성을 가진 여자입니다. 그 근성의 10그램 정도만 떼어 또 한 번 미래를 바꿔 보자고요.
최근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와 파푸아뉴기니에 사는 타조의 친척, 화식조를 아십니까? 당신은 화학자이니 생물학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괴이한 울음소리를 가진 새라고 해요. 울음소리만큼 신기한 게 있다면 이 새의 성별이 참으로 모호하다는 사실입니다. 화식조를 성스러운 동물로 여기는 삼비아족, 비-쿠스쿠스족, 미안족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화식조를 아주 성스러이 여긴다더군요.
수많은 부족을 매혹시킨 화식조의 신비로움 (출처: 위키백과)
화식조 수컷은 남근을 갖고 있지만 짝짓기를 하지 않을 때는 질처럼 말려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화식조 암컷에게도 남근이 있고, 크기만 작을 뿐 나머지 특징은 수컷과 완전히 같다고요. 그래서인지 화식조와 오랫동안 공생해 온 부족들에는 젠더와 성에 관련한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이야기들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해요.
화식조 이야기를 조금 길게 했나요? 이야기가 옆으로 샌 건 아닙니다. 사실 당시로서도, 지금으로서도, 과학은 아주 혁신과 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과학자들은 이런 화식조의 이상한 성별적 특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러 언급하지 않거나 진실을 호도한다더군요.
후대의 생물학자인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은 책①에 그 혼란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학계는 화식조의 성별 변이를 연구자의 오해라고 일축하거나, 화식조가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파트너의 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식의 복잡한 가설을 내세우기도 한다고요. 심지어 야생동물 연구자가 성 변이를 목격하고도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 출판사가 그런 기록을 삭제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퍼트리샤는 이렇게 써요.
“어떤 연구 질문이 자금을 지원받는지, 어떤 논문이 발표를 승인받는지, 누가 수업을 가르치고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과학 활동을 하도록 초청받는지는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이 된다. 이것은 폭주 기관차다. 존경받는 사회 계층 구성원과 그들의 기관에서 내놓은 연구는 외집단보다 훨씬 빠르게 인용 횟수를 늘려갈 것이다. 반면에 외집단의 연구는 발표되는 것조차 쉽지 않다. (...) 결국 인용 횟수가 많은 연구들은 아무리 결함이 많더라도 정전이 되고 저자는 교과서에 실려 불멸하며 그들의 가르침은 미래 세대의 과학자들에게 전수된다.”②
패티는 한 가지 통찰도 덧붙여요. 이 과학자들은 대체로 “18-20세기 유럽의 사고 패턴과 가치 체계를 그대로 답습한 서구 과학의 토대”③ 위에서 살고 있다고요.
타임머신이 개발됐는데도 갈릴레이 시대가 끝나지 않았다니, 마리… 믿어져요? 우리는 타임머신과 천동설이 공존하는 끔찍한 시대착오 위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의 후대, 후후대, 후후후후후후대까지도요!
두 배로 지끈거릴 당신에게 ‘신(新)프랑스과학아카데미’를 창설할 것을 제안합니다. 언론 플레이를 위해서 《르 탕(Le Temps)》과 《르 피가로(Le Figaro)》, 《르 쁘띠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에서 일하는 부장급 기자 여럿을 섭외해 두었어요. 빠릿빠릿한 눈빛을 뽐내는 신입 기자들도 메리제인 슈즈를 고쳐 신으며 찬성 의지를 표명했고요. 창립 초기를 지탱할 자금과 등록을 위한 작은 작업실도 얻어 두었어요.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퐁네프 다리 건너편 콩티 강변로에 위치해 있지요? 그 육중한 돔과 석조 건물만 봐도, 그들의 텁텁하고 떫은 편견, 그들의 혀에 낀 백태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신프랑스과학아카데미의 사무실은 그보다 산뜻한, 위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센강 표면에 맺힌 빛들이 잘 보이도록 고층을 비워 두었어요. 큰 창문을 자랑하니, 실험에 지칠 때면 봄날의 공기를 원하는 만큼 들이마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당신의 노벨상 트로피를 놓을 만한 선반은 제가 선물로 하나 헌정해 드리지요. 당신의 소중한 선물을 받은 인류로서 내놓는,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세요.
신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쪼잔하고 답답한 프랑스과학아카데미의 정확한 반대 노선을 걷습니다. 쪼잔함을 변기에 넣고 내릴 겁니다. 그들이 물살에 떠내려간 다음 우리의 목표는, 새로운 아카데미가 기존의 아카데미를 대체하는 시나리오를 실현하는 겁니다. 그 전보다는 더욱 커다란 몸집으로요. 변기에 떠내려간 프랑스과학아카데미가 배제해 왔던 소중한 과학인들을 새로운 학회의 품에 안자는 거죠.
우리의 정책은 ‘성별 불문,’ ‘성 지향 불문,’ ‘계급 및 경제 상황 불문,’ ‘국적 불문’입니다. 불문의 아카데미아, 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다만 신프랑스아카데미는 가능성에 무게를 둡니다. 지금은 적절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해 연구 의지를 잃어버린 기성 연구자들, 당신의 낙선을 보고 겁에 질려버린 자라나는 새싹들, 전 세계의 다른 국가에서 당신과 비슷한 저열함을 경험한 이들까지도요.
그러니 ‘회원이 모이지 않으면 어떡하지’ 같은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핵분열을 발견했으나 부당하게 배제된 여성 과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를 외국인 창립 회원 1호로 추진해 보고요. 당신의 든든한 지원가인 폴 랑주뱅을 답답한 프랑스과학아카데미에서 빼 오자고요.
당신의 낙선에 반대한 앙리 푸앵카레에게도 작은 제안을 던져볼 수 있겠습니다. 홀애비 냄새나는 남성들의 연대! 이유나 목적도 없이 높은 국경의 벽! “당신은 그런 허상의 논리에 구체적으로 빛나는 과학의 명을 맡길 거예요?”라고 물으면 부리나케 당신의 사무실로 달려갈 겁니다. 푸앵카레는 지금 불란서의 최고 지성 중 하나로 꼽히니, 전략적으로도 좋은 선택일 겁니다.
잘되지 않을 것이라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들의 저열함에 미래의 가능성을 저버리지 마세요. 연구비 통로 같은 것도 걱정 마세요. 본래 집단이라는 것의 성공에 필요한 것은 해봤자 두 가지 정도입니다. ‘불문과 가능성이라는 목표’, 그리고 그 뜻에 진심으로 동감하는 사람 두세 명 정도. 그 두 가지만 있다면 돈이 모이는 건 시간 문제예요.
당신이 존재할 근미래, 혹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을 저 먼 미래에도 신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필요할 겁니다. 당신이 조수로 고용한 사람이 여성인데, 그때도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저열하고 멍청한 남성들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사실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죠?
당신의 딸도 이미 당신의 실험실에서 일한다고요. 그 멍청한 아카데미 회원들이 1년, 2년 안에 마음을 고쳐먹고, 사람들의 뇌 구조를 바꿔버리지 않는 이상 당신의 딸도 처연하게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을지 몰라요. 앞서 언급한 패티의 슬픈 통찰은,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충분하겠죠? 아, 퀴리…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창립 신고 시 제출할 정관은 모두 채워 두었습니다. 아래에 별도 문서로 첨부해 드렸어요. 자, 이제 서명만 하면 됩니다. 프랑스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타이핑한 정관 종이와 도장을 들고 센느 도지사에게 달려가자고요!
신프랑스과학아카데미 정관
제1조 — 명칭
본 단체의 명칭은 Nouvelle Académie des Sciences de France (이하 "아카데미")로 한다.
제2조 — 목적
본 아카데미는 국제 과학계의 진흥 및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기성 연구자 및 신진 연구자의 연구 발표, 출판, 교류를 지원하며, 성별, 국적, 계급, 경제적 조건, 출신에 관계없이 과학적 역량과 가능성을 유일한 입회 기준으로 삼는다.
본 아카데미는 과학의 적이 무지가 아님을 선언한다. 과학의 적은 편견과 국경이며, 가능성을 제 손으로 꺾어버리는 모든 제도적 관성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며, 한 성별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니다.
본 아카데미의 창설은 그러한 장벽들을 과학의 이름으로 무효화하는 최초의 공식적 행위이며, 유럽 과학계의 판도를 바꿀 시작점임을 천명한다. 가능성은 억압될 수 있으나 소멸되지 않는다.
제3조 — 소재지
본 아카데미의 주사무소는 파리 시내에 둔다. 창립 총회의 결의에 따라 변경할 수 있다.
제4조 — 회원 자격
회원은 단일 등급의 정회원으로 구성된다. 입회는 기존 회원 2인의 추천과 창립위원회의 승인으로 성립한다. 성별, 국적, 신분, 경제적 조건은 심사 기준에 포함되지 아니한다. 유일한 기준은 과학적 역량과 연구 의지이다.
제5조 — 운영
본 아카데미는 창립위원회에 의해 운영된다. 창립위원회는 의장 1인, 서기 1인, 회계 1인으로 구성되며, 매년 총회에서 선출한다.
제6조 — 출판
본 아카데미는 회원의 연구 성과를 정기적으로 수록하는 회보를 발행한다. 발견의 저자는 반드시 본인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제7조 — 재정
본 아카데미의 재원은 회원 회비, 민간 후원, 및 연구 기금으로 구성된다.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재정적 독립을 원칙으로 한다.
제8조 — 설립 준거법
본 아카데미는 1901년 7월 1일자 결사에 관한 법률(Loi du 1er juillet 1901)에 의거하여 설립된다.
파리에서, 1911년
창립자 서명란: 마리 퀴리 (인)
① 『자연은 퀴어하다』, 퍼트리샤 오노니우 케이시언,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 48쪽
② 같은 책, 48-49쪽
③
같은 책,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