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4호 > 영업합니다 > 
기형도에게 갸스비 헤어왁스를 팝니다
👤유유민

◆ 기형도, 1985년 서울 순화동
흐트러진 머리를 고정할 것인가, 빈 방에 몸을 뉘일 것인가

부스스한 곱슬머리, 회색 외투 차림의 기형도는 이제 고작 스물다섯 살이었다. 중앙일보의 문화부 기자로서 신참 딱지를 막 뗀 무렵이었다. 그가 입사하던 1984년만 해도 회사는 서소문동에 있던 J빌딩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이듬해, 인근의 순화동에 번듯한 신사옥이 완공되면서 전 사원이 부산하게 책상이며 서류철을 옮겨야 했다. 대리석과 유리로 번쩍번쩍 광을 낸 건물에서 밤늦게 교정을 보고 나오면 안양의 집까지 가는 일은 너무 고되게 느껴졌다. 불 켜진 명보극장 간판 아래서 그는 잠시 걸음을 늦춘다. <깊고 푸른 밤>이 개봉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기에는 피곤했다. 독산동의 친한 동생네 집에 하룻밤 신세를 질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번 달만 해도 그 집에 벌써 여섯 밤을 묵었다는 것을 떠올리니 더는 면목이 없었다.


야근하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잡상인입니다. 안돼 안돼! 지나치지 마세요. 맑은 날 손수건이며 비닐우산을 파는 흔해 빠진 잡상인이 아닙니다. 작년에 오고 또 오는 그런 각설이가 아니란 말입니다. 저는 미래에서 온 잡상인입니다. 당신에게 헤어왁스라는 물건을 팔기 위해 지난하고 고달픈 시간의 터널을 헤쳐왔습니다.

솔깃해하시는 것을 보니 역시 형도 씨는 낭만주의자로군요?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요. 그래, 이 여자가 진짜 미래에서 온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상대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 않겠어.

자, 여기에 갸스비 사의 남성용 헤어왁스가 있습니다. 일제입니다. 올리브영이라는 곳에서 구입했지만, 그게 뭐 하는 가게인지에 관해 설명할 자신까지는 없군요. 지금은 1985년이니까요. 드럭스토어라는 말을 하면 당신은 분명… “약국 말이오?” 하고 되물을 것이 자명치 않아요? 당신은 영어를 잘할 테니 말이에요. 심지어는 틀린 말도 아니라서요. 그래요. 마유나 구두 크림, 안티푸라민처럼 생겼지요. 쓰는 법은 간단합니다. 검지손가락 끝으로 조금만 떠내세요. 맞아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욕심내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것을 손바닥에 얇게 비벼 펴고, 체온으로 조금 녹인 다음, 곱슬머리를 가볍게 뒤로 쓸어 넘기면 됩니다. 꾹꾹 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죠. 보기 좋네요. 가벼운 틴케이스는 외로운 천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 좋고, 다 쓰고 나서는 마른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재떨이로 쓰기에도 그만입니다. 담배 하십니까? 그럼 저기 골목으로 가서 한 대 태우시지요.

치익— 차앙!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해요. 저는 형도 씨가 쓴 문장들을 생각하며 자주 상념에 젖곤 하였습니다. 스물대여섯 남짓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패딩이나 내복을 입는 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짓이라 생각하여 주야장천 싸구려 모직 코트 몇 벌로 한겨울을 나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코트 주머니 속에 딱딱한 손이 든 채로, 내가 모르는 소하동이나 어디 멀리 평택 같은 곳을 일일이 누벼댈 진눈깨비 눈발을 보면서, 술 취해 쓰러지는 강남과 신촌의 허우대들을 지켜보고는 했습니다. 그 시절 제가 꾸리던 블로그의 이름은 무려 십 년 동안이나 ‘빈집’이었답니다. 블로그가 무엇인지 그런 건 물어보지 마세요. 설명하다 보면 끝이 없습니다. 저의 가까운 이들은 모두 당신의 책을 좋아했답니다. 네. 시집이 나온답니다. 조만간 나오게 됩니다. 시간 여행자가 등장하는 영화며 소설에서는 대개 여행이 끝난 뒤 미래가 송두리째 바뀌어버리곤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저는 시집이 나오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합니다…

퉷퉷… 80년대의 담배는 맛이 없군요. 양담배가 최고군요.

미안합니다. 그런 말을 해버렸군요. 저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다 80년대 담배가 맛이 없어서 생긴 일인지도요. 사실 그런 말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잡상인이고, 당신에게 물건을 팔러 왔습니다. 헤어왁스요. 기억하세요?

형도 씨, 저는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이 왁스를 바른다고 해서 삶이 엄청나게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겠습니다. 안양까지 가는 막차 시간은 계속 촉박할 테고, 야간 잔업은 내일도 있을 것이며, 독산동 석제네 집에 신세를 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내일도 고민하게 될 겁니다. 아쉽게도, 그런 것은 헤어왁스의 관할이 아닙니다.

자, 이제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겠습니다.

형도 씨, 당신은 사교계의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진심입니다. 너무 웃지 마세요. 온갖 응접실로의 초대와 막연한 호의, 공연한 오해와 알 수 없는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종류의 남자. 회현동의 술자리에서 당신이 막차 때문에 먼저 자리를 뜬 뒤에도 남은 이들은 당신에 대한 궁금증으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겠지요. 악수 한 번, 까딱 고갯짓으로 인사 한번 나누었을 뿐인데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생각날 얼굴. 당신의 손바닥이 버석하고 통통하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여섯, 일곱, 여덟 명이나 되는 삶. 고작 갸스비 헤어왁스 한 통으로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저는 뻔뻔하고 수치를 모르는 장사치일 뿐일 터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처럼 모든 가능성을 푸석하게 부푼 곱슬머리 속에 숨겨두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훗날 청춘들이 당신의 시를 읽고 나면, 당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다음으로 당신이 어떻게 생겼을지를 궁금해할 것입니다. 당신의 모습은 몇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후줄근한 외투에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눈과 제멋대로 뻗친 곱슬머리, 그들은 당신을 심지어 사랑할 것입니다. 그 꼴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요. 미래에는 시인처럼 생긴 것이 유행합니다. 포엣코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패션 스타일의 특징은 이런 것을 말합니다. 헝클어진 머리, 조금 큰 코트나 블레이저, 창백한 얼굴, 휘갈긴 메모, 주머니 속 담배, 책이 들어갈 커다란 가방, 우수에 젖은 눈빛, 막 자고 나온 듯한 꾸밈없는 모습… 그러니, 포엣코어를 조금 더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것은 형도, 당신입니다. 당신은 포엣코어의 원본입니다. 2026년의 젊은이들은 당신처럼 보이기 위해 공들여 옷을 고르고 머리를 부러 흐트러뜨립니다. 우습지요? 물론 그들 중 누구도 당신만큼 포엣코어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시를 읽습니다, 형도 씨.

읽고 또 읽고 또 읽습니다. 당신이 사교계의 스타가 되든 그렇지 못하든, 당신의 시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간 여행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여행에는 규칙이 있기에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것들도 많습니다. 다만 당신의 시는 너무 아름다워서, 언제 나와도, 어디서 나와도, 누가 처음 읽게 되어도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형도 씨 당신이 평생을 문화부 기자로 늙어가며 본부장, 이사, 상무 같은 직함을 달게 되어도, 모든 것을 그만두고 나와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화려한 오해들 속에서 매끈하게 늙어간다 해도… 형도 씨가 쓴 시는 결국 형도 씨의 시일 것입니다.

그러니, 받아두세요. 손에 쥐어보세요. 당신의 곱슬머리가 아름답다는 것을 40년 뒤에는 모두가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만요,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40년 뒤의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오늘 밤은 이 헤어왁스가 도움이 될 겁니다.

오늘 밤 달라질 것은 별것 아닐 겁니다. 다만 어느 날 귀가가 평소보다 십 분쯤 늦어지거나, 어느 자리에서 좀 더 오래 앉아있게 되거나, 그러다 막차를 놓쳐서 다른 골목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겠죠. 아무것도 아닌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그런 것으로도 본래의 운명에서 조금 비켜날 수 있을 만큼 예민하고 가변적인 것입니다. 행복하세요. 돈은 됐습니다. 천오백 원으로는 어차피 제가 사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2026년에 종로에서 다시 만납시다.

Tags: 유유민 4호 영업합니다 문학 패션


Updated 2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