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4호 > 영업합니다 > 
제니스에게 강 건너기 퍼즐을 팝니다
👤신포도

◆ 제니스, 1996년 미국 뉴욕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고민할 것인가, 강을 건너는 순서를 배울 것인가

제니스는 이제 막 두툼한 랩톱 뚜껑을 닫은 참이었다. 랩톱에서 흘러나오던 청색 빛만으로 버티던 방이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제니스는 매력적인 웃음소리를 가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편이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텅 빈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사이버로 소통하는 얼굴 모를 남자친구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낮까지만 해도 제니스는 괜찮았다. 랩톱의 빛 말고도 자연광이 있었으니까. 자연광이 저물고, 사이버 세계의 빛밖에 남지 않은 순간, 제니스는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함께 hh(holding hands)를 하며, 구겐하임 미술관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버 남자친구에게 답답함의 근원을 토로한다. “남편이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어요.” 1초가 아까운 듯 쉴새없이 대화를 나누던 사이버 남친에게서 답이 없다. 메시지를 열 개 보냈다. 아마 그쪽에도 정확히 열 번, 핑 소리가 울렸을 테다. “무엇이 잘못됐나요?” 초조해진 제니스가 다시 묻는다. 아직 답이 없다. 제니스는 현실을 바꾸고 싶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


자자, 제니스. 일단 심호흡을 조금 하자고요. 숨을 4초 들이마시고, 7초간 멈추세요. 아주 느리게 8초 동안 숨을 내뱉는 겁니다. 이를 꽉 다문 뒤 이빨 사이사이로 공기를 내놓는다 생각하면 편해요. 이 세션을 세 번 반복하면 일단 과호흡이 오는 건 막을 수 있을 거예요. 굳이 쓰레기봉투를 얼굴에 가져다 대지는 말자고요.


심장박동이 조금 제자리를 찾았나요? 이제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조금 해결해 보죠. 아아, 제니스 저는 당신의 사이버 남자친구가 아니니까 안심하시고요.

당신 앞에 놓인 문제는 크게 5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문제가 슬라임처럼 섞여 있으니, 굳이 단계를 나눠보자고요. 마음속으로 초를 세며 숨을 쉬듯, 문제를 나누어 읽는 거죠. 세상일이라는 데 절취선 따위는 없지만, 의도적으로 단계를 나누면 작은 해답이라도 나오도록 설계되어 있답니다.

첫 번째. 과호흡의 전조랄까? 당신의 남편이 여비서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이죠. 바람, 이라는 단어 자체의 정의가 모호하니 당신이 표현했듯 "놀아나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지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1990년대 말, 인터넷 시대가 열어준 낯선 연결에 당신이 약간 들떴다는 겁니다. 그 연결성은 몇 년간 동고동락하던 남편과는 정반대에 있는 것이죠. 타인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와는 별개로, 누군가와 가까운 거리에서 오래 지낼수록 사람은 가랑비 같은 불화에 익숙해지기 마련입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깊어지는 동시에 이런 생각도 쌓여 가는 거죠. ‘아, 내가 이 사람과는 이런 취향, 관점만은 공유할 수 없구나’ 하는 것이요.

그래요, 제니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아요. 그것이 제가 이리 행상으로 살 수 있게 만드는 아주 큰 축복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소비 욕구는 기본적으로 허상에 기거해요. 이것을 사면, 내가 이전과는 아예 다른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이런 변화에의 열망은 번번이 인간들을 좌절시킵니다. 인간은 다시금 허상의 품에 안깁니다. ‘음, 그래. 전에 산 그 물건이 잘못됐었군. 이제 진짜 나를 바꿀 물건을 발견했다.’ 또다시 어리석은 소비 행위로 돌아가죠. 아차차, 방금 그 문장은 웃어 넘겨주세요.

여튼, 당신 역시 남편과의 시간 사이에 켜켜이 쌓여온, 그 가랑비 같은 불화를 이따금씩 자각했을 겁니다. ‘혀가 여기에 있는 게 맞나?’ ‘눈을 언제 깜빡여야 하지?’ 따위의 질문을 던지는 순간처럼 말이죠. 그런데 인터넷 세계는 그런 순간과 거리가 멀어요. 모든 것이 낯선 연결인 순간, 나와 ‘불화하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거든요. 대신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 그것만큼 기적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더 없을 겁니다. 그러니 구겐하임 미술관을 좋아한다는 아주 가느다란 공통점에 당신이 그의 손까지 잡아버린 것이죠. 그런데 제니스, 그 도파민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요.

세 번째, 그렇게나 믿을 수 없는 도파민에 휘둘려, 당신은 굳이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다'라는 패러노익한 정보를 노출해 버렸어요. 사이버 남자친구에게 그것은 너무 많은 정보라고요! 투 머치 인포메이션(Too Much Information)은 누군가의 시간을 잡아 먹기 때문에 괴로운 것만은 아닙니다! 인터넷 세계에는 정보가 넘칩니다. 넘치다 못해 무가치하고, 저렴한 화폐로 즉시 전환되죠. 당신이 털어놓은 진심도, 그 순간 화폐 쿠키 찌꺼기가 된 거예요.

물론, 이해해요 제니스. 당신은 당신의 사이버 보이프렌드를 믿었겠죠. 그런데 봐요, 지금 그 사람의 반응을요! 무반응으로 반응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번째, 방금의 문장에서 썼듯, 당신은 그 사이버 남자친구가 누구인지에 관해 잘 몰라요. 만약 그가 진지한 관계를 기이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하남자’라면 어쩌려고 그래요? 과거의 트라우마, 혹은 자기 자신에 관한 콤플렉스로 인해 모든 관계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면 어쩌려고요. 심지어 세상의 진지한 상황, 무거운 관계, 가치 있는 정보 같은 것을 참지 못해 시니컬한 농담으로 모든 것을 치환해 버리는 사람일 수도 있다고요.

당신이 무려 열 개의 메시지를 더 남겼잖아요. 적어도 아홉 개에서 멈췄어야죠. 두 자릿수로 핑 소리를 증폭시키면 안 됐어요. 아마 당신의 인포메이션을 읽기 전까지, 그 남자의 머릿속 당신은 ‘마더 테레사,’ ‘스타워즈의 레아 공주’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신은 유부녀임을 밝혔죠. 게다가 남편은 비서와 놀아나고 있고요. 그것을 정면으로 돌파하지 못해 새로이 출현한 대안 세계에서 남자친구를 구해버렸어요. 너무 불안한 나머지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 버렸고요. 만약 당신의 사이버 남자친구가 머리가 두 개면 어쩌려고요! 눈알이 열 개이면! 제3의 여자를 찾는 매트리스 킹이라면!!

제가 해결해야 할 문제 네 가지를 나열하는 동안 제니스를 더 우울하게 했을까 걱정이 돼요. 조금 흥분하긴 했지만, 이 모든 과정에서 당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답니다. 몇몇 표현에서 당신을 질책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면, 저의 불찰이니 웃어 넘겨주세요.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 문제로 가보자고요.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그 채팅으로요.

그 채팅을 읽은 당신의 사이버 남자친구가 당신을 영영 배신해 버릴 것이라는, 이대로 사라질 것이라는 어리석은 걱정은 멈춰요. 당신은 이미 매력적이잖아요! 게다가, 손도 잡았으니까(hh). 그 남자가 채팅을 읽지 않았을 리는 없죠. 본래 디지털 채팅은 메시지 보내는 걸, 메시지를 읽는 걸 참기 힘들게 만들어 둔 그 설계 때문에 중독적인 것이니까… 아마 그 남자는 회피 중일 거예요. 남편이 있는 여자를 만나도 되나? 유부녀인데 사이버 남자친구를 사귀는 여자를 믿어도 되나? 하는 걱정들에 둘러싸인 채로 말이죠.

그럴 때 핑 소리를 하나 더한다거나, 회피형에 가까워 보이는 사이버 남자친구에게 행동하라 떠미는 순간, 그 사람은 말미잘처럼 순간 움츠러들 겁니다. 이제 우리가 고민할 건 그 말미잘을 해파리로 바꾸는 방법이에요! 움츠러든 해파리가 일순간 몸을 쫙 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길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그 순간을 만드는 거죠.

말미잘이 해파리가 될 때까지, 당신은 아무것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디지털 채팅의 중독성에 정면으로 맞설 필요는 없죠. 시간을 녹일 아주 재미있는 퍼즐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당신에게 팔고 싶은 건 이거예요. ‘강 건너기 퍼즐’.

스도쿠? 모모그램? 워들? 으음. 그런 시시한 게임이 아닙니다. 서기 9세기, 프랑크 왕국의 학자 알퀸이 쓴 『청년의 마음을 단련하는 문제집』에 등장한 퍼즐이에요. 1200년의 역사라니,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디지털 애송이를 눌러버리기엔 딱 좋은 나이테 수가 아닌가요?
       
제니스. 당신은 이제 비련의 여주인공,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 사이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비참한 레이디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야망 넘치는 농부예요. 배를 한 척 갖고 있는 농부. 당신에게는 지키고 싶은 것 3가지가 있어요. 늑대와 양, 양배추. 그 무엇도 놓칠 수 없습니다. 근데 아주 작은 문제가 있어요.

1. 배에는 제니스 당신이 탈 수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딱 한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늑대, 양, 양배추 중 두 개를 한꺼번에 옮길 수는 없는 거죠.
2. 늑대와 양이 단둘이 있는 순간, 늑대는 양을 잡아먹습니다.
3. 양과 양배추를 단 둘이 놔두면 양이 양배추를 먹어버려요. (다행인 것이라면 늑대가 양배추를 아주 싫어한다는 겁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우웩~’ 토하는 시늉을 하더군요.)
4. 농부는 빈 배로 돌아올 수 있어요.


여기까지가 당신에게 주어진 아주 좁은 세계의 규칙입니다.

이 퍼즐을 풀다 보면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처음에는 양을 데려갔다가, 혼자 돌아오겠죠. 그런데 양배추와 늑대 중 무언가를 데리고 가려는 순간 양배추, 혹은 양 둘 중 하나는 사라져 버려요. 이 퍼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모든 걸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짜증이 날 거예요. “양! 양배추를 잠깐 참으면 되잖아.” “늑대! 소중한 친구인 양을 먹어버리면 어떡해?” “제발 조금만 기다리라고, 이 어리석은 것들아!”

근데 퍼즐을 푸는 순간 짜증은 눈 녹듯 사라지죠. 양과 늑대에게 짜증을 냈던 과거의 자신이 조금 한심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무엇이 무언가를 먹는 것, 무언가가 무엇에게 먹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람들을 본의 아니게 상처 입히며 살아갑니다. 당신의 남편, 매트리스 킹이 여비서와 놀아난 것도, 혹은 당신의 사이버 남자친구가 10번의 핑 소리를 회피한 것도 당신이 무언가를 잘못했거나 못나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양배추가 태어난 것이 잘못이 아니듯, 늑대가 양을 증오하지 않는 것처럼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당신은 당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이죠.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아이, 가정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회피를 일삼는 사이버 남자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 당신의 남편까지도, 원한다면 지킬 수 있어요.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이런 말을 드리고 싶은 게 아니라요. 제니스, 저는 당신이 더 이상 과호흡을 겪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니 랩톱 빛에 의지해서 우울한 어둠을 즐길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집의 모든 불을 켜고, 못생긴 암막 커튼을 걷고, 연필을 아주 뾰족하게 깎아 퍼즐을 풀어보세요. 양과 양배추, 늑대의 관계, 그리고 이 모두를 지키고 싶다는 당신의 선한 마음을 믿으며 배를 이리저리 움직여보세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선명한 소리가 들릴 거예요. ‘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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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