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3

유유민


포도에게

최근에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 모든 취미생활 모임을 망라했을 때 가장 질나쁜 남자들이 모이는 곳은 단연 영화 동호회이며, 이는 문화적 고상함을 전시하고 싶은 남자 가운데 자본을 지불할 의지가 없거나 지불할만한 자본이 없는 이들이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거야. 뜨끔했어. 저 남자들처럼, 설마 나도 그러한가?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동기는 어쩌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표면적으로 나 역시 영화라는 매체에 현혹되어서, 혹은 글쓰는게 즐거워서, 그것도 아니면 앞서 언급한 남자들처럼 교양을 가장한다거나,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성장해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애초에 선택지라는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는 시립 교향악단의 무료 공연, 미술관, 연극, 콘서트, 오페라 같은 즐비한 선택지가 있었잖아. 그 안에서 영화를 골랐던 거지. 너무 비싸거나, 너무 번거롭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게 더 즐겁다는 각자의 이유로 말이야.

나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보냈어. 중증 천식때문에 외부의 공기는 적대적 환경에 가까웠거든. 그때문인지 나는 집 바깥의 세계보다 집 안의 사물들에 둘러싸여 지냈고, 어쩌면 그것들이 나를 대신 교육했다고 느껴. 너의 편지를 읽으며 “서산시 석림동보다 서산시가 더 좁게 느껴졌고, 서산시 석림동보다 석림동 한 아파트의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다”는 대목에서는 거의 탄복했어. 나의 지리적 감각 또한 그러했기에.

처음 보냈던 편지에서 우리 집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 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말했지. 나의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퇴직교사 출신으로 모든 살림을 전담하고 나를 24시간 돌보면서 틈틈이 글을 썼어. 집안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책과 잡지, 레코드판,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가 있었지.

작은 마을에서는 문화 자본이 실제적인 자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었고, 사실과 관계 없이 나는 넉넉한 형편의 아이처럼 취급되곤 했어. 자전거를 갖고 싶다는 내 생떼에 아버지가 대부분의 오디오와 레코드판을 팔아치워야만 했는데도. 하지만 항변하기에는 영 이상한 일이잖아.

2004년의 여름방학에, 나는 인생 최초로, 부모의 차를 통해서가 아닌 내 두 발로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보기로 결심했어. 너의 말처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필연이나 강제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기이할 만큼 비효율적인 동선일지라도 남의 도움 없이 내가 직접 움직여보는 일은 아름다웠어. 양성리에서 30분을 걸어나가 장사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강변역에서 염창역까지 다시… 아마도 일곱 시간 정도가 걸렸을 거야. 정차한 휴게소에서 친구에게 원티드의 멤버 서재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후로 서울에 도착할때까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

서울에 도착한 나는 고모 댁에 묵게 됐어.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지만 중학교 1학년이 혼자서 숙박업소에 묵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타협을 했던 거지. 첫날은 하루종일 고모의 가이드에 따라 서울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서울특별시 전역을 관광했어. 동대문 에이피엠에서 연두색 팔부바지를 사고, 경복궁 근정전을 걷고, 이태원에서는 버거킹 와퍼를 먹었지. 조카가 첫 서울 여행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길 바랐던 고모의 기획이었지만 배은망덕한 사춘기의 유민은 사실 ‘친척어른과 함께 관광객처럼 다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어. 태생부터 서울에 거주했고 지하철이 익숙한, 어디를 가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지은이들(나는 ‘지은’이라는 이름이 가장 서울적인 이름이라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어)처럼 굴고 싶었거든. 일정을 마치고 조금 뾰루퉁한 상태로 고모의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세진언니의 방에 짐을 풀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는 나오지 않는 케이블 채널들을 탐방하면서. 니켈로디언, 채널V, MTV… 그리고 동아TV라는 채널에 이르러 나는 우측 상단에 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섹스 앤 더 시티!

대낮의 굴욕적이었던 투어버스 관광을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까?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설렘을 느끼며 손톱을 마구 뜯었던 것 같아. 저런 제목의 드라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니,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기로서니, 저렇게나 마구잡이로 살 수 있다니, 근데 너무 멋지다?! 캐리와 미란다의 삶을 동경하고 어른이 된 내 모습과 겹쳐보게 된다는 점에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1998~2004)는 AV 같은 저급한 포르노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화끈한 콘텐츠였어.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퇴근한 세진언니가 들어왔고, 나는 돌덩이처럼 얼어붙었어. 망했다. 나의 끔찍한 욕망을 들켰어. 이제 나는 가문에서 쫓겨나 뒤주에 갇히고 말 거야. 섹스칼럼니스트는커녕 처녀귀신으로 죽게 될 거야. 그런 말도 안되는 공포에 정신이 아득할 무렵 세진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외치는 거야.

        “저거 재밌지!!?!”

고모의 둘째딸인 세진언니는 당시 아시아나항공 국제선의 객실 승무원이었고, 내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범위 내에서 세련미와 멋의 최첨단에 위치한 도회적 인물이었어.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니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엿보곤 했거든. 크림파스타를 처음 맛보기도 전에 언니에게서 이태리 정통 카르보나라는 유크림이 아닌 달걀 노른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언니가 가끔씩 고모를 통해 주었던 조미땅콩 벌크나 남보라색 기내용 담요나 짜먹는 볶음고추장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을 상상하게 했고, 고모 댁 욕실 선반을 가득 채운 해외의 코스메틱들은 어지러운 꽃향기를 풍겼어. 올리브영도 시코르도 없던 시절에, 언니의 실크테라피 오일을 동전크기만큼 짜서 몰래 머리 끝에 바르던 미끌거리는 감각이 서른 살을 한참 넘긴 지금까지도 생생한걸. 그날 세진언니의 외침은 나를 도시 생활에, 그리고 어른이 되는 통로에 발들여도 된다는 승인과도 같았어.

너 역시 섹스 앤 더 시티가 중요한 임팩트였다는 것을 읽고 당장 이 얘길 해주고싶어서 얼마나 손이 근질거렸는지.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동년배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야. (이 드라마의 제목이 뭐, “시티 오브 걸스”라든지 “키스 앤 더 시티” 였더라면 가당치도 않았을 일이지!)

그날 세진언니의 승인은 내가 물리적으로 상경하기 이전까지 계속 어딘가 아득히 먼 곳에서 나를 호출하고는 했어…

2010년,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 원서를 넣지 않고 곧장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했지.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재종반은 꿈도 꾸지 못하고 베란다에 딸린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독학재수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됐어. ‘동네의 우등생’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는 소문을 힘닿는 데까지 유예하기 위한 요행이기도 했지만, 슈퍼마켓에 가기 위해서도 30분을 걸어나가야 하는 이곳에서, 그 미약한 문화자본마저도 학력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 같아. 늘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는데도 타고난 머리 덕에 결국은 SKY에 갔다’ 같은 신화적 수기를 써서 수만휘 같은 카페에 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어.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나약했고, 죽도록 공부하기 싫었던 내 성정을 의지가 압도하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줄창 인터넷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폭식을 하며 현실을 도피했을 뿐.

사수(맙소사)를 시작할 즈음에는 집안 사정 탓에 인근의 중소도시로 이사를 했고,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 내가 수능 장수생이라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어. 포항 ‘시민’이 된 것! 그것만이 나에게 짜릿할 정도의 해방감을 주는 사건이었어. 영화관, 서점, 스타벅스, 맥도날드가 있는 동네를 시내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장장 21년만에 처음으로 겪어보는 혁명적인 기쁨이었거든. 나는 더이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도시를 누비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프라를 누릴 수 있게 됐어. 수능특강 따위가, 자이스토리 따위가 눈에 들어왔겠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매일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에 공부를 한 것처럼 가장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양심적 의무가 있었고, 엄마가 출근하면서 나를 시립도서관에 데려다 놓으면, 열람실에 책가방을 던져두고 곧장 영화관으로 직행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나는 원래 영화와 큰 혐의가 없었어. 천만영화쯤은 되어야 간신히 의무적으로 감상하는 정도였거든. 그래서 영화관에 매일 출석하게 된 것은 그냥 체크카드 세 개를 굴비로 엮어서 할인혜택을 활용하면 영화를 편당 삼사천원에 볼 수 있었던데다, 영화를 두 편 보고 점심까지 먹으면 무려 다섯 시간 이상을 때울 수 있다는 개뼉다귀같은 이유였지.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 광고가 끝나고 상영관 불이 꺼지면 비로소 긴장을 풀고 스크린에 빠져들곤 했어.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혼자서 두 개의 영화를 연속으로 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신작의 첫 상영이 끝나면 영화관 직원들이 다가와서 영화가 어땠는지,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창피하기도 우쭐하기도 한 심정으로 짧게 답했던 기억이 나.  

그 다음이 문제였어. 매일 시간을 때우려면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가 나타나야 하는데, 볼 영화가 소진된 거야. 돈도 없는데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건 낭비같고 말야. 포항에는 세 개의 영화관–CGV 북포항, CGV 포항, 롯데시네마 포항점–이 있었는데 사실상 프로그래밍은 대동소이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제법 절박했기 때문에 CGV 공식 홈페이지에다 건의사항을 써서 보냈어.
유민: 저는 CGV 북포항과 포항 지점을 주로 이용하는 관객입니다. 지방 지점에도 다양한 영화를 형식적으로나마 상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소도시에서도 박스오피스 순위권 밖의 영화를 볼 기회가 필요합니다. 부디 숙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GV 고객센터: 고객님의 건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부처에 적극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나의 건의는 일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졌고, 상영시간표에는 갑자기 포항에 상영될리 없는 이상한(?) 아트하우스 영화들 여러 편이 평일 하루 한 타임, 혹은 이틀에 한 타임 수준으로 포진되기 시작했어. 상영관에는 대부분 나 혼자였고, 그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 그래서 나는 CGV가 무슨 뻘짓을 해두 비난하기가 힘들어. 왜냐면 진심으로 고마웠거든. 어디에 생색내거나 전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가능한 최선을 몽땅 다해준 거잖아. 시네마테크나 지역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 같은 곳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치도 않은 소리. 그런 공간조차 대부분의 소도시에는 허락되지 않아. (사실 서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말해봤어.)

그럼에도 월말이 되자 볼 영화가 바닥났고, 마침내 원정을 시작하게 되었지. 주말마다 ‘머리를 식히러’ 라는 미명 하에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나기 시작한 거야.
[2012년 11월 4주차 주말 계획표]
7:20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이동 (1시간 40분)
9:00 도착, 지하철 타고 대연역으로 이동 (1시간)
10:00 대연역 앞 편의점에서 밥먹고 국도예술관으로 도보이동 (20분)
10:20 국도예술관 - <심플 라이프> 관람
12:00 버스 타고 무비꼴라쥬 서면으로 이동 (30분)
12:30 건물에서 간단하게 점심 때우기
12:50 무비꼴라쥬 서면 - <나우 이즈 굿> 관람
14:40 무비꼴라쥬 서면 - <내가 고백을 하면> 관람
16:30 서면에서 센텀시티로 이동 (1시간)
17:40 영화의전당 - <엔딩노트> 관람
19:40 부산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1시간)
21:00 부산에서 포항으로 이동 (1시간 40분)

※원정은 거의 당일치기였으며 대개 수기로 작성되었다. 위의 내용은 조금의 MSG도 치지 않은 22세 유유민의 실제 하루 계획이였으며, 매달 1~2회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당일치기였던 것도, 저렇게 비상식적인 동선을 소화한 것도, 하루에 저렇게 많은 영화를 봐야했던 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허락된 날, 허락된 지역, 허락된 시간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돌아와야만 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아니라 조건의 남은 자리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왔다는 생각을 해. 내가 원하던 두루뭉술한 덩어리–도시성, 예술적인 것, 어두운 곳, 집이 아닌 곳, 저절로 시간이 가는 곳–를 향해 움직이다 보니, 우연히 영화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티켓이었을 뿐. 만약 같은 값에 매일매일 오페라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오페라광이 되어있었을지도… 하지만 그런 세계는 나에게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도시의 영화동호회 남자들이 비겁한 이유는 그들이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야.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음을 은폐하고, 마치 영화야말로 순수한 열정의 대상으로 처음부터 유일하게 존재했던 것처럼 포장하기 때문인 거지.

해피헤비드링커, 집, 검진센터로 향하는 택시 등등에서
유민 




① 서울의 인기있는 스폿들을 거점으로 운행하는 순환버스 관광상품. ② 당시 세진언니는 “올해부터 이코노미 짱이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객실이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로 나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유민에게는 거의 암호처럼 들렸다. ③ 천연 실크 단백질 성분을 기반으로 한 미국 프로페셔널 헤어 케어 브랜드. 정식 명칭은 바이오실크 테라피. ④ 당시 KB국민카드에는 한 개의 카드만 최소 전월실적을 달성하면 다른 카드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혜택을 줄줄이 엮어쓸 수 있다는 점에서 굴비카드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⑤ 당시 유민의 일기장과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내용이며, 실제로는 아마 상당히 더 ‘안경척’ 스럽고 호소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랜 장수생활로 사회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