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연재소설

곡예사 톰의 실종 1

신포도





1. 덩어리 죽음들
유사 죽음들은 일종의 수련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고. 물론 모든 것은 나의 착각일 뿐이다. 그는 조용하고 실력 있는 서커스 단원 같았다. 게으르게 짜인 각본들. 그러나 그 문장을 실현하는 데 드는 공수는 전혀 간단하지 않은 덩어리의 배열들.

불 사이를 뛰어드세요, 못을 씹어 먹으세요. 못을 씹어 먹고는 깨끗해진 입을 관객에게 보여주면 돼요. 그러면 아마 사람들이 박수를 칠 겁니다. 박수 소리에 고양되면 안 돼요. 못 들은 것처럼 행동하세요. 못을 씹을 때는 볼 옆에 이 마이크를 가져다 대면 됩니다. 그는 네라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무대 위에 오르는 종류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반쯤 떨어진 술과 빛 잃어가는 글리터가 덕지덕지 붙은 장막이 오르면, 따끔한 소리 없이 불 위를 걷고, 못을 묵묵히 씹어 먹고 퇴장했을 터였다. 물론 그는 서커스에는 한 번도 나온 적 없었고, 또 어쩌면 서커스라는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테지만. 그의 죽음 벼랑의 순간들은 곧 막을 내리는 서커스장의 곡예 같았다. 구시대의 끄트머리, 인간 학대라는 아고라에서 위태로이 손바닥을 편 채 겨우 균형을 맞추는 인기 없는 곡예사.

자신의 일을 조용하고 제대로 완수해내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심지는 약간 단단해졌다. 마음을 수납했다거나, 과거를 명쾌히 정리했다는 형태의 건강한 감각과는 달랐다. 굳이 벼랑 위에서 발 한 쪽을 내놓고 사는 사람. 시대의 끝자락에서 프레임 모서리를 잡은 채 버티는 것을 선택한 사람. 그럼에도 그는 한 번도 죽지 않았지. 컷이 바뀌면 후라이팬에 맞아 흘러내린 눈알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무한한 심폐소생은 그가 사는 세계의 규칙이었다. 어쩌면 단장의 강압보다 더욱 강한 중력이었을지 몰라.

그는 강압과 위태로움에 이렇다할 불만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다. 청승을 떨지도 않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의 시선도 보내지 않았다. 가혹하지 않아? 가혹할 정도야. 10분 남짓되는 그 에피소드가 끝나면 그는 못을 게워냈을까? 그에게 못을 먹인 빨간 색 인간은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곤 냉정하게 뒤를 돌았을까? 습관처럼 틀었던 그의 죽음들을 목격한 뒤에, 짧은 낮잠을 잘 때면 그는 어찌도 그리 단단할 수 있는지, 그 단단함과 강함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지  답을 찾고 싶었다.

아냐, 답을 찾고 싶었던 것과는 달라. 나에게 필요한 건 답이 아니었어. 그저 내가 던진 질문 자체가 무거웠던 거야. 어떤 생각에는 가혹한 중력들이 있어서 눈꺼풀 위를 지긋이 누르게 되거든. 잠에 들락말락, 기이함이 논리로 연결되는 끄트머리에서 작은 인간이 된 그는, 먼지처럼 속눈썹을 잡고 매달렸다. 내 속눈썹은 프레임이 아닌데. 프레임이기 때문에 프레임에 매달린 게 아니야. 어쩌다 잡다 보니, 프레임이 잡힌 거지. 네 속눈썹도 그곳에 있었을 뿐이고. 그런 그는 오랫동안 잊혔다. 나의 삶에서, 기억에서, TV에서. 이미지의 무덤들. 모르는 얼굴들이 너무 많아져서.

2. 코스요리사 단단함. 그것이 나의 눈꺼풀을 누르지 못하게 되면서, 내가 이리도 취약해진 것일 수 있겠다. 더 이상 내 추상과 구상에는 중력이 자리하지 않았다. 단단한 생각들도 민들레 홀씨처럼 포로롱 퍼져나가, 고체로 남지 않는 듯했다. 작가로서의 나는 능력은 좋으나, 창의성은 없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졌고. 인간에게 바라는 유일한 것이 창의성, 즉 기존의 데이터를 넘어서는 창발적인 무엇을 창조해내는 신적 능력을 취득해야 했을 때. 그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탓이다. 나는 신이 되기에는 너무 모범생이었다. 모범생은 레퍼런스든, 참고문헌이든, 서울대 교수의 책 100권 추천이든, 믿을 수 있는 유저의 왓챠피디아 리스트든, 큐레이션의 모습을 갖춘 신뢰성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했다.

인간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그런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데이터베이스는 그저 인공지능의 포식을 위해 잘 차려진 코스 요리 같은 것에 가까웠지. 리스트를 짜고, 별점을 매기고, 매력적인 신생 브랜드를 모으는 데 혈안이 된 힙스터들은 인공지능을 위한 코스 요리를 만드는 3류 셰프들 같았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을 거야. 하지만 포식을 함으로써 포식당하는 것은 관객의 원죄였다. 포식을 하려면 포식당해야만 했다. 포식당하고자 한다면 싫어도 욱여넣어야지.

당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아. 당연하지는 않았지만, 익숙해져야 했다. 저는 인간인데요? 틀린 말이었다. 인간은 인공지능조차도 추월해야 하는 존재였다. 인공지능이 자신들보다 잘날 수 있다는 것을, 더 정확히 말해서는 잘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의 패배이자 종말이었다.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멸종당할 수 있지만, 본인들이 멸종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멸종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존감의 문제이니까. 그래서 인간들이 이토록 디스토피아를 원하고, 아니,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예상하고, 발설하고, 토론하고, 말을 얹으려는 것일지 모른다. 사실 나도 다 예상했어. 인류한테는 아직도 그 문장이 필요해.

그즈음 나의 애인은 중동과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에 설치할 안면 인식 기계를 개발하는 조직에 속해 있었다. 현은 누군가를 얼굴로 파악하고, 총으로 쏴버리는 일을 돕고 있었다. 주도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현에게는 그 정도의 배포랄까. 배포는 아니지. 능력이 없었다. 숫자와는 언제가 거리가 멀었으니까. 현의 능력이라곤 바닥을 닦고, 휴지를 비우고, 인간들의 타액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 정도였다. 세계에 인간의 것으로 남은 회사들, 그러니까 굳이 나의 타액을 청소해줄 타인을 고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자본을 갖춘 회사들은 모두 그런 일들을 했다. 사람의 얼굴을 0과 1로 바꾸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수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 무언가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일들. 건물 청소와 회사원들의 타액을 훔치는 것이 유일한 낙이자, 능력이었던 현은 우리의 진짜 삶을 위해서는 가치 있는 것들을 죽이는 회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나를 설득했다.

3. 얼굴 뭉개는 입자 기계 현은 자신이 사는 세계에서 얼굴은 이상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호패 같은 것이라고 평했다. 그게 조금 이상해. 구한말에 한탕 잡아보겠다는 졸부 같다고. 호패라는 것이 이미 권력으로서의 쓸모를 다했는데, 그걸 갖겠다고  돈을 내고, 썩어빠진 나무 상자 안에 고이 넣어두는 느낌. 그도 그럴 것이 현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염치 없는 이야기를 해도 얼굴을 꼿꼿이 들고 다녀야 했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될 때까지 속이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얼굴은 뭉개질 게 분명했다.

얼굴이 뭉개진다고? 얼굴은 뭉개지지. 지나치게 위를 쳐다보고, 쨍쨍한 햇빛이든, 질척하게 젖은 구름이든, 무언가를 직시하는 데에도 에너지가 든다. 모든 것에 염치의 진동을 느끼는 사람들은 필연 느리게 늙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이 사는 세계의 사람들은 오토바이의 속력을 최대로 높여두고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이었다. 죽은 다음에, 뭉개진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보라고. 매끈한 얼굴, 젊은 얼굴, 세상의 에너지를 직시하기를 피한 얼굴, 창피한 눈빛을 하고도 문을 통과할 수 있어? 통과할 수는 있다, 그런데 오래 가지는 못할 거야.

얼굴을 그냥 스캔하겠어? 거기에도 분명 입자라는 게 존재한다고. 입자들이 얼굴 표면에 달라붙어서 숫자를 보낼 거야. 해봤자 0이나 1이겠지만, 이미 세계는 그 두 개 숫자로도 모든 걸 표현할 수 있어. 나머지 숫자들은 버리면 되거든. 애초에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무자비한 숫자 입자들이 연약한 얼굴들은 더 빠르게 뭉개버릴 거야. 비릿해진 얼굴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통과하기를 포기해. 포기하지 않으면, 이미 얼굴은 뭉개진 다음인 거지. 그러니까 일종의 통과의례야. 현은 손가락을 퉁퉁, 테이블 위를 두드리며 말했다.

현이 사는 세계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대체 눈코입의 배치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기에 의례인지, 죽음이니 삶이니, 꼿꼿한 자세나 입자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은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자신은 0과 1이라는 입자, 표면에 달라붙어 살점과 함께 떨어지는 진득한 에너지들과 함께 일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현의 얼굴은 입자 센서기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는 그가 타액과 점액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입자에 뭉개지는 것도 일종의 특권이라며, 현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그딴 게 특권이라니, 현의 입이 삐죽거렸다.

대신 현은 가슴팍에 출입 카드를 붙이고 다녔다. 과시하듯 가슴을 센서기에 대면, 입자 센서기는 파르르 눈을 감은 채 현을 통과시켜 주었다. 얼굴이 뭉개지는 사람들이 굳이 가슴 근육을 키울 필요가 없는 건 입자 기계 때문일까? 현은 이상하리만치 벤치프레스에 집착했다. 굳이 찢어낸 근육으로 출입증을 인식시키고는, 뭉개진 얼굴에서 흘러나온 침과 오줌을 닦았다. 입자에 감싸지는 사람들의 답없고 취약한 인간성의 증좌들을 닦아 없앴다. 입자의 세계에서 타액은 취약함의 증거인 것마냥 취급됐다. 휴지 하나가 쌓이면 비우고, 음식물 찌꺼기 하나가 붙으면 현은 세면대에 칫솔질을 했다.

4. 푸른 공기/한기 현이 하루 8시간을 보내는 그 세계는 국방용 드론을 생산하는 스타트업이었다. 입자 센서기가 곳곳에 붙어 있는 건물로부터 150킬로미터 떨어진 공장에서는 하루에도 수천 대의 드론을 생산할 기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들? 물론 그들에게도 지능이 있었다. 타액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기계들이 드론을 만들었다. 기계의 지능에서 탄생한 드론은 스리랑카 공해상에 무작위 투하된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일자리를 찾아 스리랑카로 떠난 한국인들이 타액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는데, 그곳의 공기는 푸르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푸른 공기를 잘 견디지 못할 거야. 현은 중얼거렸다. 푸른 공기는 바다를 닮았어. 한국인들은 바다에서 살기에는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이거든. 스리랑카 공기는 서늘해. 콘크리트가 한기를 머금어서. 머금은 한기들이 푸른 빛으로 시각화되는 것이야. 그곳의 창문들은 모두 네모낳다. 모든 창문은 네모난 것 아니야? 한국의 네모난 창문은 스리랑카의 그것보다 조금 큰 편이라고 했다. 한국만큼 샷시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푸른 콘크리트의 한기가 집 안으로도 쉴새없이 들어온다고 했다. 한기가 집안 전체를 채울 정도인데, 드론이 들어가지 못할 리는 없지.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사실 헛수고하는 거야. 한기에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겠다고 드론을 집 안에 들여보낼 수는 없어. 창문을 뚫고 지나갈 드론 같은 것은 찾기 힘들다고. 현은 비행기를 탄 적은 없다고 했다.

뭉개지는 얼굴들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나도 어느곳에선 꼿꼿이 고개를 세웠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세웠다. 그 꼿꼿함 때문에 내가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나름의 방어기제를 총동원해 이유를 찾았다. 만화 작가로서 얼굴을 그리지 못하게 된 것은 꽤나 큰 손실이었다. 혼잣말로도, 대화로도, 계속 되뇌었다. 다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을 만들어야 해. 그려야 해. 꼭 사람의 얼굴은 아니어도 돼. 진짜 사람만큼 정교하지는 않아도 돼. 꼭 사람의 얼굴은 아니어도 돼.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이면 돼.

사람이 좋아하는 얼굴이 뭔데? 입자 센서기가 우주적 스케일로 커진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점차 뭉개진 얼굴들에 익숙해졌어. 눈코입의 선명한 배치나 예리한 펜선은 너무도 구시대적이었기에 퓨처리즘적인 창작 스킬이 됐다. 시대가 막 뒤엉켰어. 누군가가 걸은 발자국을 보면 길이 보인다고 하던데. 온갖 곳에 사람들 발자국이 찍혀 있어서 뭐가 길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백악기 공룡, 쥐라기 공룡 뼈가 한데 뒤섞였는데 내가 그걸 분류해야 하는 거야. 뭐가 뭔지도 모르는데. 현의 둔한 노트북에는 중생대 위키 문서가 떠있다.

그러니까. 이젠 나도 뭉개진 얼굴을 그려야 해. 너도 끔찍한 살점 덩어리와 함께 일하니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