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컴필레이션
신포도
2025년의 n계절
신포도
음악 감상은 기후적이다. 같은 음악도, 필연처럼 묶인 공기의 온습도, 구름의 밀도에 따른 빛의 세기에 맞춰 다른 경험으로 가장한다. 2025년에도, 그 전의 무수한 시간들처럼 계절이 존재했다. 2025년의 마지막 날에 창간된 『월간차지』의 독자들을 위해 한해의 기후 감각을 소환하는 음악을 준비했다. 사계절의 선형성은 (의도적으로) 메스업해 뒤섞어놨다. 그게 컴필레이션의 매력이니까.
p.s. 이 컴필레이션은 비가 오는 초겨울 오후 2시에 꾸려졌다.
늦여름의 게으름은 소진과 닮았다. 겨우 더위에 익숙해졌는데, 순식간에 추워질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계절. 늦여름의 인간들은 무서운 속도로 선명해지는 불안을 애써 못 본 체한다.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는 데 남은 체력을 쥐어짠다. '산성비(Acid Rain)'의 초입, 흑연이 닳는 소리와 콜 헤이든Cole Haden의 촘촘한 콧수염을 겨우 뚫고 나오는 목소리는 늦여름의 소진과 닮았다. 늦여름에 자는 낮잠은 왜 끝맺을 때쯤 땀을 내뿜을까. 이 노래를 들으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Track 2. Time Waited - My Morning Jacket - 초가을
낙엽은 천천히 물들고, 순식간에 떨어진다. 나뭇잎들은 천성적으로 여유가 넘치지만, 가냘픈 잎자루로는 며칠의 추위도 견디지 못한다. 느긋하게 바뀌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늦가을. 'Time Waited'는 초가을의 나뭇잎 같다. 여유로운데 미약한 탓에 빠르게 진동한다. 작게 작게 튕기는 손가락에도 휘릭 흔들린다. 웰메이드 밴드 음악에는 다양한 종류의 속도감이 응축돼 있다. 그런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사람 얼굴 보는 것마냥, '참 옹골차다'는 생각이 든다.
낙엽은 천천히 물들고, 순식간에 떨어진다. 나뭇잎들은 천성적으로 여유가 넘치지만, 가냘픈 잎자루로는 며칠의 추위도 견디지 못한다. 느긋하게 바뀌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늦가을. 'Time Waited'는 초가을의 나뭇잎 같다. 여유로운데 미약한 탓에 빠르게 진동한다. 작게 작게 튕기는 손가락에도 휘릭 흔들린다. 웰메이드 밴드 음악에는 다양한 종류의 속도감이 응축돼 있다. 그런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프란시스 베이컨이 그린 사람 얼굴 보는 것마냥, '참 옹골차다'는 생각이 든다.
Track 3. 레이어드 - 씨잼 - 한여름
씨잼은 맨정신으로 견디기 어려운 한국의 더위를 랩 가사로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내 뇌피셜이긴 한데, 오피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이상한 단어들을 문장 구조 위에 레이어드할 리가 없다. 잠들기 직전에 솟구치는 논리 없는 논리들처럼, 이 노래의 가사는 패러노익하다. "빈 컵을 위해 흘린 컵은 넘쳐. 남은 건 그게 더 길어지게 하는 것…." 잘 쳐봐야 2% 정도의 의밋값만 가진 이 노래에서 가장 선명한 가사는 다음 세 줄이다. "망가질 때까지 계속 도망을 갔어. 도착한 적은 없는데 갑자기 스탑. 내가 받은 것들이 다 내 거울엔 없었어." 씨잼은 너무 놀랐다고 한다.
시간을 먹고 자란 '노리시드 바이 타임'은 겨울을 위한 음악을, 겨울 속에서 만드는 아티스트다. 때로는 입을 과도하게 찢으면서 발음을 흘리고, 의도적으로 't' 발음을 생략한다. 발음을 은근하게, 이상하게 하는 게 그의 매력이다. 겨울처럼 읊조리는 그의 노래를 듣다 보니, 2025년의 한겨울은 도착할 듯, 계속 도착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닿았다. 엇! 아니다! 생각해 보니 2025년의 1월과 2월에 코가 빨개진 기억이 난다. 루돌프 코와 잘 벌어지지 않는 프로즌 마우스. 나는 올해 초, 노리시드 바이 타임이 노래하듯 말했다. 사랑love은 추위에 덜덜 떨리는 턱주가리처럼 자동적인automatic 것이다.
간절기.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는 계절. 비염 환자에게 가혹한 그 붕뜨고 짧은 시간. 스타크 리얼리티의 사이키델릭 재즈도 기이함과 괴롭고 들뜨는 짧은 시간을 닮았다. 참고로 스타크 리얼리티도 간절기처럼 빠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캘리포니아 투어 관객이 너무 없어서 밴드가 해체됐다… 하지만 잊었다가도 때가 되면 찾아오는 비염처럼, 스타크 리얼리티도 2025년 포도에게, 갑자기, 도착했다. 재채기는 괴롭고 시원하다. 스타크 리얼리티의 음악도 간질간질하다.
게으른 나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때쯤 나뭇잎들을 공기 중으로 내보낸다. 그건 세상에 대한 도전 같은 거다. 인류가 지구를 아무리 망쳐놔도, 힘 되는 데까지는 나뭇잎들을 내보낼 거라는 선언. 한번 해보자고 외쳐보는 잎자루들. 스월비도 나뭇잎 내는 나무처럼 가사를 쓴다. 세상에 뭔가를 토해내듯이 노래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필기 공책 같은 가사들. 개 같은 사람들. 어찌 보면 실패한 많은 만남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내는 건 고통스럽고, 또 얼마간 처연하다.
Track 7. Don't Smoke In Bed - Nina Simone - 모든 종류의 쓸쓸한 어둠
Track 7. Nina Simone - Don’t Smoke In Bed - 모든 종류의 쓸쓸한 어둠
사람들은 여름을 긴 낮으로, 겨울을 짧은 낮으로 기억하지만, 어느 계절에나 어둠은 있다. 여름의 어둠은 수줍음이 많고, 겨울의 어둠은 질척일 뿐. 어둠 속의 담뱃불은 특히 매력적이다. 똥 싸듯 재를 내뿜고, 고약한 냄새가 나고, 금방이라도 꺼질 듯 파리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불씨를 받아내면 금방이라도 타오를 이불 위에서 타오르는 담배 불빛은 얼마나 매력적일까. 니나 시몬은 얇고 위험한 불씨만이 줄 수 있는 낭만을 아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나 간절하게, 이불 위에서 담배 금지라고, 처연하게, 읊조리는 것 같다.
이달의 컴필레이션
춤추기 좋은 음악
유유민
Track 1. Le Freak (2018 Remaster) - Chic
디스코로 시작하는 건 그게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춤을 추라고 몸을 설득할 필요도 기분을 고양시켜 보리라는 의지도 필요하지 않다. 이미 몸이 다음 동작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비트를 학습하는 찰나의 망설임 없이 곧장 흔들면 된다. 2018 리마스터 버전은 베이스가 더 선명하게 들린다.
Track 2. In the stone - Earth, Wind & Fire
주방의 그릇 소리 같은 악기 불명의 타격음에 맞춰 몸을 흔들자. 멋지게 춰야 한다는 강박 없이, 지렁이처럼 꾸물대는 기타리프를 따라 팔다리를 움직이다 보면 내 근육과 관절이 평소의 다섯 배는 더 잘게 분절되는 기분이다. 불 꺼진 방도 몇 평은 더 커진 것 같다.
Track 3. Han Jan (Edit) - Peggy Gou
앞의 세 곡에서 사지를 크게 움직였다면 이제 팔꿈치를 구부리고 스타카토로 출 차례다. 얼굴 앞으로 팔을 세워 가드를 만든 채 흔드는 게 자연스럽다. 한 잔, 두 잔, 세 잔, 네 잔, 페기구의 주술 같은 목소리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주방으로 이동해 메밀차를 한 잔 마신다. 데낄라라면 더 좋겠지만 우리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숙취는 금물이다.
Track 4. Liverpool Street In the Rain - Mall Grab
Han Jan의 기세를 이어 계속해서 작게 출 수 있는 음악. 베이스가 낮게 깔리고 그 위로 패드 사운드가 비처럼 내린다. 이쯤 되면 당신의 고양이는 당최 저 인간이 무슨 일로 저렇게 춤을 추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다가올지 모른다. 북슬북슬한 털이 다리를 휘감고 지나간다. 괘념치 말고 움직여야 한다.
Track 5. Lady (Hear Me Tonight) - Modjo
다시 에너지를 올릴 차례다. "As we dance, by the moonlight"…도입부에 머금고 있던 필터가 천천히 열리면서 점점 선명해지는 멜로디를 느낀다. 조금 구태의연한 후렴구의 흐름이 더 좋다. 후렴 하나에 하나의 단위가 만들어지는 기분이다. 아마도 발이 이전과는 달리 좀 바삐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Track 6. Love Is Real - Loods
사랑이 진짜라는 걸 보여달라는 순전한 외침이 한겨울 양송이 수프처럼 뭉근하게 울려 퍼진다. 반복되는 보컬을 들으면서 아주 천천히, 3분 20초에 걸쳐 춤을 멈추자. 킥은 끝나지 않았지만 춤을 출 체력도 슬슬 바닥을 보이고 있으니, 땀을 식히고, 숨을 고르고, 마지막 노래에 성심성의껏 대응해 본다. 헤드폰을 벗고 불을 켜면 다시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 밀린 업무들이 떠오르겠지만 괜찮다. 지치면 또다시 이 플레이리스트를 켜고 춤을 추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