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교환일기는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한 영화비평가 세르주 다네Serge Daney의 글, ‘영화는 세계의 약속이다’에 보내는 답신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출생한 유유민과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출생한 신포도가 각 3번씩, 총 6번 편지를 주고받았다.
- 첫 일기는 유유민이, 마지막 일기는 신포도가 썼다.
- 세르주 다네에게 영화는 약속이다. “언젠가는 세계의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약속.” 둘은 이 일기에서 언제 세계의 시민이 되었는지에 관해 회상한다. 각자의 취향, 문화, 혹은 허영이 형성되었던 시점, 사건, 순간의 분위기를 더듬어 나간다.
- 유유민에게 영감을 준 세르주 다네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영화에 대한 사랑 이전에, 모든 문명과 관련된 그리고 모든 방향과 모든 시간으로 진행되는 그러한 약속 없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이미 있었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이모션북스, 181쪽)
- 신포도에게 영감을 준 세르주 다네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내게 영화는 그러한 언더그라운드적 경향의 것이 아니었다. 영화라는 것은 이와 같은 오만한 그림 속에 자리 잡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즉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서 더 이상 상상적인 관개가 단절되는 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말이다.” (『영화가 보낸 그림엽서』, 이모션북스, 187쪽)
-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번역된 제목을 따랐다.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은 원어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다. 다만 이 일기는 시점과 순간을 기록하는 형식이므로, 일기 속에서 언급되는 시점 당시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작품의 경우에는 이후에 번역본이 나왔더라도 원어 제목을 유지했다.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1
유유민
엿새 전 우리를 태운 김포발 제주행 진에어가 이륙하던 때에 사실은 미약한 난기류가 있었어. 옆자리에서 너는 이미 잠들어 있었으니 몰랐을 테지. 너는 상당히 몸을 구기고 있었지만 왜인지 관절이 많은 동물, 이를테면 기린의 휴식처럼 안전해 보였기 때문에, 굳이 너를 깨우는 일은 외국에 지어진 리조트의 설계 오류에 개입하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사실 기린은 관절이 많지 않대. 목뼈가 유난히 긴 것뿐이래.
난기류 시 승무원 안전 수칙. 서비스를 즉각 중단하고 점프시트 혹은 가장 가까운 빈 좌석에 착석하시오.기장이 안내 방송으로 화장실 출입을 금지하자마자 기내 조도가 필요 이상으로 낮아졌는데, 이것 역시 지침이었나? 그건 잘 모르겠어. 우리를 마주 보는 방향의 간이 의자에 앉은 스튜어드가 눈을 감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위아래로 맥없이 흔들렸고, 평온해 보였어. 전날의 수면 부족과 새벽에 공항역사 던킨도넛에서 네가 사다 준 커피의 부정교합 탓인지 나는 엄청난 각성 상태로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었는데, 노랗고 침침한 미등 아래에서 몇 개의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어. 요컨대, 그녀가 대학에서 19세기 영국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그 분야에 매혹된 것이라기보다 그 과목의 교수 몇 명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회고 같은 것들. 나는 곧장 1999년의 교실로 돌아간다. 나는 아홉 살이었고 교내 가을 백일장에 막 시를 써낸 참이었어. 옥계 계곡①의 바위산 풍경에 대한 시였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이원상 선생은 금테 안경이 코 위에서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나를 칭찬하는 데 한 교시 전체를 할애했어. 나름 운명적인 순간이었으므로, 어디에도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여전히 「옥계 계곡」의 첫 행을 기억해. 이원상 선생이 삼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구절을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읊고, 그 사이에 이야, 크으, 히야, 같은 감탄사를 배치하며 백일장을 과장된 성역처럼 조성했기 때문이야.
"검정 회색 어우러진! 이야, 어우러진! 크으, 바위산 밑, 바위산, 히야."
감탄사의 분량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아? 문장의 원형을 뚜렷하게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솔직히 약간 의심스럽기도 해. 사실 처음부터 내가 쓴 문장 안에 이야, 나 크으, 가 있었다면? 우유 당번, 철제 사물함, 학급 문고, 태극기와 대걸레와 책걸상이 즐비한 맨부커 시상식을 개최한 것이 나였다면? 선생은 그저 내가 쓴 것을 곧이곧대로 읽었던 것뿐이라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닐지도 몰라. 사실 글 쓰는 데 이골이 난 어른이 된 채로 그 구절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나는 이 어린이에게서 어떤 재능이나 영특함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혹시 내 기원의 목록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적이 있었던가?
기후적 항목: 뒷산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헬리콥터 소리, 경운기 소리, 오토바이 소리, 한 맺힌 귀신의 비명 같은 바람 소리, 해풍에 전신주 흔들리는 소리, 새벽닭 울음 소리, 고양이들의 혈투 소리, 짠 바람 냄새, 볏짚을 태우는 냄새, 굴뚝 연기 냄새, 송진 냄새, 올챙이 냄새, 비 온 뒤 축축한 흙냄새, 생선 말리는 냄새, 소똥 냄새, 트럭 짐칸의 디젤 냄새
행정적 항목: (이 분류 일체는 비교적 번화한 옆 마을에만 속해 있다) 군부대 경계 철조망, 방역차, 면사무소, 파출소, 약방, 정육점, 홍콩반점, 포항반점, 뉴멕칸통닭, 스머프치킨, 버스 정거장, 초등학교, 중학교, 사택, 오락실
생태적 항목: 꿩, 까치, 참새, 솔개, 고양이, 해파리, 밍크고래, 뒷산의 식용견사에서 도망쳐 나온 도사견들, 소, 닭, 청개구리, 두꺼비, 고추잠자리, 배추흰나비, 귀뚜라미, 감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미역, 다시마, 벼, 쑥, 강아지풀, 맨드라미, 매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신 뒤 하얀 포터 트럭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이장 할아버지, 외도가 발각되자 적반하장으로 부인을 두들겨 패 입원시킨 교회 집사, 목이 쉰 할아버지들, 불콰해진 할아버지들, 깡마른 할아버지들, 허리가 굽고 표정이 맑은 할머니들, 뒷짐을 지고 종종걸음을 걷는 할머니들, 나물 캐는 할머니들, 넋 나간 할머니들…나는 가구 수가 고작 일흔 가구에, 슬레이트를 대강 덧댄 기와집들이 느슨하게 줄지어 있는 리 단위 시골 마을에서 자랐어. 해안가에서 일 킬로미터정도 더 걸어 들어가면 나오는 곳이었지. 대부분의 인구가 노인이었고, 90년대에 태어난 어린아이의 등장은 구조의 복구라기보다 결손된 항목의 갑작스러운 복원 같은 것이었어. 인구 고령화가 가속화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아이가 있었겠지. 6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이미 오래전에 마을을 떠났고, 그들이 낳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도시에 속해 있었을 거야. 1998년에 부녀회장의 앞집으로 장한빛과 장한별이 이사 오기 전까지 나는 그 마을에서 유일한 어린이였고, 모두가 나를 알고 있었고 다정하게 '민이'라고 불러주었어. 연고 없는 중국집에 전화를 해서 "양성리 민이네 집이요" 해도 이십 분 뒤에 집 앞으로 짜장면이 왔어. 그 정도로 작은 곳이었지.
또한 마을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소여물을 주거나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거나, 논에서 벼를 심고 미꾸라지를 건져내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아다 시장에 나가서 팔았어. 이것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 활동이었으니까. 우리 집은 거기에서 완전히 예외적인 경우였는데, 이 얘기는 다음 편지에서 더 해볼게.
포도, 너 역시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군지역의 심사 체계는 아주 좁잖어. 그날의 백일장 이후 나는 글짓기대회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비주얼 베이직과 C++), 수학 경시대회, 사생대회, 급기야는 발명대회에 웅변대회까지 온갖 잡다한 콘테스트에 반강제로 출전하고 상장을 마구 쓸어 담기 시작했어. 나는 결코 대단히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랬어. 당시 이원상 선생의 심정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어. 사실 나의 자아와 삶의 방식을 무려 스무남은 해 동안 이끌어온 가장 큰 욕구의 원천이 고작 담임교사의 칭찬이었음을, 그러니까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주였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 그럼에도 그날의 공기압이 나를 계속해서 어딘가로 밀어왔음은 자명해.
짙은산②에서, 유민
P.S. 이 일기를 쓰는 동안 떠올린 사실들
1) 초등학교 때에는 안전상의 문제인지 스테이플러 사용이 권장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원고지의 좌측 상단 모서리에 풀을 발라 붙이곤 했다.
2) 나의 기원인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126번지의 파란 지붕 집은 2018년에 철거되어 이제 고속도로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남영덕 하이패스 톨게이트'라는 삭막한 이름의, 장소조차 아닌 어떤 것이 되었다. 건설공사 당시 우리 집터였던 지층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왜구 방어용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근에 신설된 휴게소 푸드코트에서 통오징어 라면을 판매한다. 오징어의 원산지는 원양산이다.
3) 자기연민 안 하기 개 어렵다. 세르주 다네 대단해~
①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위치한 2km 길이의 계곡. 오늘날에는 노지 캠핑 명소로 입소문이 나 있다고 함.②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27. 연남동에서 아마도 가장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일 것이다.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2
신포도
유민에게
이원상 선생의 감탄사를 활자로 읽으며, 나 역시 입술을 들썩들썩.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의 입술과 마음 언저리에서 재생되는 감탄사는 네가 경험한 이원상의 진짜 감탄사와 얼마나 멀까.
멀고 가까움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교환 일기를 쓰는 지금의 나와 순수하고 기이한 놀이를 즐기던 어린 시절의 나 사이의 거리도 꽤 멀다는 생각에 닿았어. 그만큼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 먼 것이지.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아. 모든 순간이 취향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텐데 그 순간을 다 기억해 내거나, 익히거나, 내재화하지는 못하겠어. 그럼에도 붙잡을 것은 과거뿐이니까.
나는 왜 이렇게 됐지? 나는 왜 무언가를 싫어하고 좋아하게 됐지?
몇 가지 복잡하고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과거를 응축한 조각은 복잡하고 정교한 퍼즐보다는 거칠고 뭉툭한 일곱 개 조각에 가까운 것 같아. 답을 찾기 위해서 이상한 모양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그 놀이①. 서론이 길고 복잡했지만, 응.
칠교놀이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내가 유년기에 즐겼던 이상한 놀이들이 떠올랐어. 누군가에게 영감을 받지도 않고, 그저 내가 개발해 만들어낸 놀이가 지금의 취향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졌거든.
[신포도가 즐긴 놀이의 목록들]
1. 발가락 고정 놀이: 새끼발가락을 네 번째 발가락 위에 올려둔 채 고정한다. 새끼발가락이 네 번째 발가락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꿈치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의미는 없다.
2. 천장 걷기 놀이: 헤드가 돌아가는 양면 거울을 준비한다. 거울의 한 면을 천장에 고정시킨다. 천장을 보는 거울상을 보면서 천장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바닥을 걷는 것이다. 천장에는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다. 조명, 스프링클러, 야광별 스티커, 아버지가 분노로 잡은 박제된 모기의 사체, 경비 아저씨의 말이 (들리지 않지만) 나오는 스피커 등.
3. 개미 죽이기 놀이: 작은 일개미가 나오는 주공 아파트의 ‘옷방’에서 개미들을 집게손가락으로 찍, 눌러 죽인다. 휴지에 박제된 개미의 시체를 닦는다.놀이의 목록을 보면 몇 가지 공통 속성을 발견할 수 있어. 첫째, 의미는 없다는 것. 하지만 이것은 유년기에 즐기는 놀이의 공통적인 속성이기도 하니까.
둘째. 움직임과 거울상. 붙어있지 않은 발가락을 붙이는 것. 존재하지 않는,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는 천장의 장애물들을 붙여두는 것. 개미의 시체를 만드는 것. (시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때로는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고, 혹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거울 안에 가둔 채로 이동하면서 움직이게 만들었지. 어떤 것은 내화면―나의 화면—에 간직하고, 어떤 것은 외화면에 밀어두면서.
셋째. 걷는 것. 이상하게 나는 집안을 정말 많이 돌아다녔어. 물론 개미를 죽이는 것은 걸어 다니는 일은 아니었지만, 걸어 다니는 개미를 보는 것은 좋아했거든. 익숙한 바닥을 걷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 낯선 천장을 걸었고, 발가락 다섯 개가 바닥에 닿는 건 흔한 일이니까 발가락을 구하며 발꿈치로 걸어 다녔지.
걷는 것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집 안에서 걷는 것이 지금 나의 취향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어.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와 달리 내가 자랐던 서산시는 생각보다 큰 도시였거든. 동시에 (진짜) 큰 도시의 문화적 자본은 거세당한 곳이지. 롯데리아는 있지만 그 외의 패스트푸드 가게는 찾을 수 없고. 롯데시네마는 있지만 그 외의 영화관은 찾을 수 없고. 엔제리너스와 카페베네는 존재하지만 스타벅스는 없는 그런 곳.②
지린내가 나는 터미널의 공중화장실. 그 앞에서는 목장갑을 낀 할아버지가 노골적인 표지의 성인 잡지를 팔고 있었어. 그 잡지들의 표지 사진은 엄마를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유년기의 내게 충격적인 스냅숏처럼 남아 있어. 그런데도 공중화장실과 멀지 않은 곳에서 팔던 쥐포를 먹는 건 참 좋아했다. 구운 쥐포는 오백 원. 기름기가 묻어나는 붕어빵 종이에 쥐포를 담아주던 할머니의 주름 잡힌 손 같은 것…
역시 사람은 과거 기억에 매몰되는군. 어쩌다 몇 가지 조각들을 더 늘어놓게 되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야. 서산이라는 소도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크기의 개념이 참 이상하다는 것. 서산시 석림동보다 서산시가 더 좁게 느껴졌고, 서산시 석림동보다 석림동 한 아파트의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거든.
어린 내가 자력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도보 10분 거리 내외의 석림동뿐이었고. 서산시의 롯데리아와 롯데시네마, 엔제리너스와 카페베네에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 어머니의 차를 타고 다녀야 했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자동차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소도시 어린이에게) 공간의 해방보다는 필연이나 강제에 가까워.
석림동을 걸어 다니기 위해서는 나를 보호하던 어머니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거실에서는 그 절차도 필요치 않았어. 헤드가 돌아가는 거울, 어쩌다 발견한 개미, 네 개의 발가락과 굳은살이 박이지 않은 말랑한 발꿈치만 있어도 됐거든. 세계의 허락이나 통과가 필요치 않았던 순수한 방랑. 그곳에서 나는 사막에 불시착한 앵글로색슨족처럼, 비 맞으며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산책했다.
산책과 방랑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손과 거울, 발과 곤충 다음의 통과 의례는 채널③ 사이의 공백이었다는 생각에 닿았어. 여름 방학,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집을 비우면 옷방④의 작은 브라운관으로 무책임한 방랑을 즐겼지. 투니버스와 재능TV, 카툰네트워크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던 날. 리모컨을 광적으로 클릭하며 온갖 팝스타들의 뮤직비디오를 접했어.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였는데, 어릴 때의 나는 ‘섹스’라는 단어를 노출한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 눈물 날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미국은 정말 저런다고?) 여배우가 가슴을 까고 나왔을 때는 심장이 귀에 피를 보낸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어. 만들어진 지 십 년 된 내 심장이, 아주 푸닥푸닥 뛰었다.
어쩌면 나는 서산시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교육과 네트워크보다, 그 옷방 속의 경험을 세상과의 진짜 조우라고 기억하는지도 몰라. 옷방의 작은 기계 안에는 다 있었거든. 타인의 지린내를 맡으며 성인 잡지의 표지를 훔쳐보는 나, 천장을 걸어 다니며 누렸던 전능감, 개미를 죽일 수 있다는 특권을 단번에 선물 받은 느낌이었지. 섹스라는 기표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순간도 우연적이었거든.
그 뒤로도 나는 작은 사각형 안에서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모험을 즐겼다. 롯데시네마에서 해주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토렌트를 깔았고, ‘피어 접속 중’의 문턱을 넘기 위해 4일 내내 컴퓨터를 켜놓았지. CD 롬을 사서 내 힘으로 영화 DVD를 처음 틀어보고. 둔탁한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듣기 좋은 OST들의 원곡자가 데이비드 보위였다는 것을 알아냈었어. 때로는 이완 맥그리거, 혹은 자비에 돌란과 결혼해 다른 국가의 영주권을 따는 상상도 해봤다.
멀리서 보면 내 자세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을 텐데. 그저 컴퓨터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가, 풀었다가, 가끔 기지개를 켰다가. 흥분될 때면 이따금씩 일어났다가. 겸연쩍게 다시 의자에 앉을 뿐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항상 의심했지. 내가 경험한 방랑이 진실된 방랑일까에 대한 의문 같은 것? 내가 읽었던 책들은 진정한 영화광이란 영화관의 어둠에 매혹된 자들이라고 설명했거든. 그 매혹은 나와 너무 멀었어. 내게 주어진 어둠은 기껏해야 작은 옷방의 전등이 눈을 감았을 때 정도였으니까. 나는 내가 사막의 앵글로색슨족, 빗속의 강아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비겁한 히키코모리 정도면 어쩌지?’
취향의 진실성, 방랑의 조건에 관한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인기 이후의 내게 주어진 임무였던 것 같아. 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진짜) 대도시의 문화적 자본이 쌓여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열등감 섞인 합리화도 해보고. 그럼에도 내가 지금 찾은 아주 사소한 답 중 하나는, 결국 모든 취향은 비밀스럽게 형성된다는 것. 죄를 지었다는 감각, 거듭되는 자기 의심. 겸연쩍게 앉고, 참을 수 없이 일어나면서 눈알을 돌려 ‘보면 안 될 것을 봤던’ 순간들, 전기세에 대한 고민 없이 4일 내내 컴퓨터를 켜두는 고등학생의 짧은 생각이 취향의 비밀과 조금은 맞닿아있다는 생각은 들어.
물론, 모든 것은 칠교놀이의 일부일 뿐이야. 정말 내 취향에 석림동 아파트의 옷방이, 데이빗 보위와의 조우가, 다른 국가의 영주권을 상상하던 밤이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더해주었는지는 모를 일이지. 정말 그 조각들이 나의 지금을 만든 조각들일까? 조각은 맞다 쳐도, 그 조각으로 만들어낸 지금의 답, 기껏해야 추상화된 그림이 정말 진실일까? 그 의심에 대한 답을 찾을 만큼 성숙해지지는 못했나 봐. 근데, 뭐 그래도 괜찮아. 의미 있는 놀이라는 게 얼마나 재미없는지는… 너도 알잖아.
해피헤비드링커⑤에서 비밀스럽게 샤잠하며, 포도가
① 어릴 적 신포도는 칠교놀이의 정답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별자리를 보면서 ‘저게 황소라고?’ ‘저게 저울이라고?’를 질문하는 아이와 비슷했다. ‘소’ 그림을 조각으로 짜맞추라고 하는데 정답을 맞혀봤자 소 그림처럼 보이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도 신포도의 칠교 조각 중 하나로 남아있다.②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서산에는 스타벅스도 들어왔고, 터미널 앞에는 올리브영이 생겼다. 고등학생이 될 때쯤 맘스터치가 생겼고, 서산을 떠날 때쯤 맥도날드가 생겼다. 가본 적은 없지만 CGV도 생겼다고 한다. ③ 데이빗 보위가 외계인 역할로 나오는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는 9개의 TV를 동시에 보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채널의 리니어함을 동시성으로 번역해 낸 장면이다. 외계인은 TV를 정말 저렇게 보나? ④ 신포도는 거의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옷방’이 ‘오빵’으로 쓰이는 게 아닐까 ‘상상’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곳에 옷을 두지 않고 본인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오빵’이라는 넘겨짚기는 어떤 논리적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306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3
유유민
포도에게
최근에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 모든 취미생활 모임을 망라했을 때 가장 질 나쁜 남자들이 모이는 곳은 단연 영화 동호회이며, 이는 문화적 고상함을 전시하고 싶은 남자 가운데 자본을 지불할 의지가 없거나 지불할 만한 자본이 없는 이들이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거야. 뜨끔했어. 저 남자들처럼, 설마 나도 그러한가?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동기는 어쩌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표면적으로 나 역시 영화라는 매체에 현혹되어서, 혹은 글 쓰는 게 즐거워서, 그것도 아니면 앞서 언급한 남자들처럼 교양을 가장한다거나,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성장해 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애초에 선택지라는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는 시립 교향악단의 무료 공연, 미술관, 연극, 콘서트, 오페라 같은 즐비한 선택지가 있었잖아. 그 안에서 영화를 골랐던 거지. 너무 비싸거나, 너무 번거롭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게 더 즐겁다는 각자의 이유로 말이야.
나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보냈어. 중증 천식 때문에 외부의 공기는 적대적 환경에 가까웠거든. 그 때문인지 나는 집 바깥의 세계보다 집 안의 사물들에 둘러싸여 지냈고, 어쩌면 그것들이 나를 대신 교육했다고 느껴. 너의 편지를 읽으며 "서산시 석림동보다 서산시가 더 좁게 느껴졌고, 서산시 석림동보다 석림동 한 아파트의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다"는 대목에서는 거의 탄복했어. 나의 지리적 감각 또한 그러했기에.
처음 보냈던 편지에서 우리 집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 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말했지. 나의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퇴직 교사 출신으로 모든 살림을 전담하고 나를 24시간 돌보면서 틈틈이 글을 썼어. 집안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책과 잡지, 레코드판,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가 있었지.
작은 마을에서는 문화 자본이 실제적인 자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었고, 사실과 관계없이 나는 넉넉한 형편의 아이처럼 취급되곤 했어. 자전거를 갖고 싶다는 내 생떼에 아버지가 대부분의 오디오와 레코드판을 팔아치워야만 했는데도. 하지만 항변하기에는 영 이상한 일이잖아.
2004년의 여름방학에, 나는 인생 최초로, 부모의 차를 통해서가 아닌 내 스스로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 보겠다고 결심했어. 너의 말처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필연이나 강제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기이할 만큼 비효율적인 동선일지라도 남의 도움 없이 내가 직접 움직여보는 일은 아름다웠어. 양성리에서 30분을 걸어나가 장사리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강변역에서 염창역까지 다시… 아마도 일곱 시간 정도가 걸렸을 거야. 정차한 휴게소에서 친구에게 원티드의 멤버 서재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후로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
서울에 도착한 나는 고모 댁에 묵게 됐어.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지만 중학교 1학년이 혼자서 숙박업소에 묵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타협을 했던 거지. 첫날은 하루 종일 고모의 가이드에 따라 서울시티투어버스①를 타고 서울특별시 전역을 관광했어. 동대문 에이피엠에서 연두색 팔부바지를 사고, 경복궁 근정전을 걷고, 이태원에서는 버거킹 와퍼를 먹었지. 조카가 첫 서울 여행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길 바랐던 고모의 기획이었지만 배은망덕한 사춘기의 유민은 사실 '친척 어른과 함께 관광객처럼 다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어. 태생부터 서울에 거주했고 지하철이 익숙한, 어디를 가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지은이들(나는 '지은'이라는 이름이 가장 서울적인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어)처럼 굴고 싶었거든. 일정을 마치고 조금 뾰로통한 상태로 고모의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세진 언니의 방에 짐을 풀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는 나오지 않는 케이블 채널들을 탐방하면서. 니켈로디언, 채널V, MTV… 그리고 동아TV라는 채널에 이르러 나는 우측 상단에 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섹스 앤 더 시티!
대낮의 굴욕적이었던 투어버스 관광을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까?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설렘을 느끼며 손톱을 마구 뜯었던 것 같아. 저런 제목의 드라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니,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기로서니, 저렇게나 마구잡이로 살 수 있다니, 근데 너무 멋지다?! 캐리와 미란다의 삶을 동경하고 어른이 된 내 모습과 겹쳐보게 된다는 점에서 〈섹스 앤 더 시티〉는 AV 같은 저급한 포르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화끈한 콘텐츠였어.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퇴근한 세진언니가 들어왔고, 나는 돌덩이처럼 얼어붙었어. 망했다. 나의 끔찍한 욕망을 들켰어. 이제 나는 가문에서 쫓겨나 뒤주에 갇히고 말 거야. 섹스칼럼니스트는커녕 처녀귀신으로 죽게 될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공포에 정신이 아득할 무렵 세진 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외치는 거야.
"저거 재밌지!!?!"
고모의 둘째 딸인 세진 언니는 당시 아시아나항공 국제선의 객실 승무원이었고②, 내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범위 내에서 세련미와 멋의 최첨단에 위치한 도회적 인물이었어.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니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엿보곤 했거든. 크림파스타를 처음 맛보기도 전에 언니에게서 이태리 정통 카르보나라는 유크림이 아닌 달걀노른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언니가 가끔 고모를 통해 주었던 조미 땅콩 벌크나 남보라색 기내용 담요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을 상상하게 했고, 고모 댁 욕실 선반을 가득 채운 해외의 코스메틱들은 어지러운 꽃향기를 풍겼어. 올리브영도 시코르도 없던 시절에, 언니의 실크테라피③ 오일을 동전 크기만큼 짜서 몰래 머리카락 끝에 바르던 미끌거리는 감각이 서른 살을 한참 넘긴 지금까지도 생생한걸. 그날 세진 언니의 외침은 나를 도시 생활에, 그리고 어른이 되는 통로에 발 들여도 된다는 승인과도 같았어.
너 역시 '섹스 앤 더 시티'가 중요한 임팩트였다는 것을 읽고 당장 이 얘길 해주고 싶어서 얼마나 손이 근질거렸는지.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동년배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야. (이 드라마의 제목이 뭐, '시티 오브 걸스'라든지 '키스 앤 더 시티' 였더라면 가당치도 않았을 일이지!)
그날 세진 언니의 승인은 내가 물리적으로 상경하기 이전까지 계속 어딘가 아득히 먼 곳에서 나를 호출하고는 했어…
2010년,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 원서를 넣지 않고 곧장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했지.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재종반은 꿈도 꾸지 못하고 베란다에 딸린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독학 재수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됐어. '동네의 우등생'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는 소문을 힘닿는 데까지 유예하기 위한 요행이기도 했지만, 슈퍼마켓에 가기 위해서도 30분을 걸어나가야 하는 이곳에서, 그 미약한 문화자본마저도 학력 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 같아. 늘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도 타고난 머리 덕에 결국은 SKY에 갔다' 같은 신화적 수기를 써서 '수만휘'④ 같은 카페에 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어.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나약했고, 죽도록 공부하기 싫었던 내 성정을 의지가 압도하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줄창 인터넷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폭식하며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
사수(맙소사)를 시작할 즈음에는 집안 사정 탓에 인근의 중소 도시로 이사를 했고,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기 시작했어. 내가 수능 장수생이라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어. 포항 '시민'이 된 것! 그것만이 나에게 짜릿할 정도의 해방감을 주는 사건이었어. 영화관, 서점, 스타벅스, 맥도날드가 있는 동네를 시내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장장 이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겪어보는 혁명적인 기쁨이었거든. 나는 더 이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도시를 누비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프라를 누릴 수 있게 됐어. 수능특강 따위가, 자이스토리 따위가 눈에 들어왔겠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매일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에 공부를 한 것처럼 가장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양심적 의무가 있었고, 엄마가 출근하면서 나를 시립도서관에 데려다 놓으면, 열람실에 책가방을 던져두고 곧장 영화관으로 직행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나는 원래 영화와 큰 혐의가 없었어. 천만영화 정도나 의무적으로 감상하는 정도였거든. 그래서 영화관에 매일 출석하게 된 것은 그냥 체크카드 세 개를 굴비⑤로 엮어서 할인 혜택을 활용하면 영화를 편당 삼사천 원에 볼 수 있었던데다, 영화를 두 편 보고 점심까지 먹으면 무려 다섯 시간 이상을 때울 수 있다는 개뼉다귀 같은 이유였지.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 광고가 끝나고 상영관 불이 꺼지면 비로소 긴장을 풀고 스크린에 빠져들곤 했어.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혼자서 두 개의 영화를 연속으로 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신작의 첫 상영이 끝나면 영화관 직원들이 다가와서 영화가 어땠는지,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창피하기도 우쭐하기도 한 심정으로 짧게 답했던 기억이 나.
그다음이 문제였어. 매일 시간을 때우려면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가 나타나야 하는데, 볼 영화가 소진된 거야. 돈도 없는데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건 낭비 같고 말야. 포항에는 세 개의 영화관―CGV 북포항, CGV 포항, 롯데시네마 포항점―이 있었는데 사실상 프로그래밍은 대동소이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제법 절박했기 때문에 CGV 공식 홈페이지에다 건의 사항을 써서 보냈어.
유민: 저는 CGV 북포항과 포항 지점을 주로 이용하는 관객입니다. 지방 지점에도 다양한 영화를 형식적으로나마 상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소도시에서도 박스오피스 순위권 밖의 영화를 볼 기회가 필요합니다. 부디 숙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⑥
CGV 고객센터: 고객님의 건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부처에 적극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놀랍게도 나의 건의는 일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졌고, 상영 시간표에는 갑자기 포항에 상영될 리 없는 이상한(?) 아트하우스 영화들 여러 편이 평일 하루 한 타임, 혹은 이틀에 한 타임 수준으로 포진되기 시작했어. 상영관에는 대부분 나 혼자였고, 그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어디에 생색내거나 전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가능한 최선을 몽땅 다해준 거잖아. 시네마테크나 지역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 같은 곳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치도 않은 소리. 그런 공간조차 대부분의 소도시에는 허락되지 않아. (사실 서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말해봤어.)
그럼에도 월말이 되자 볼 영화가 바닥났고, 마침내 원정을 시작하게 되었지. 주말마다 "머리를 식히러"라는 미명 하에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나기 시작한 거야.
[2012년 11월 4주 차 주말 계획표]
7:20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이동 (1시간 40분)
9:00 도착, 지하철 타고 대연역으로 이동 (1시간)
10:00 대연역 앞 편의점에서 밥 먹고 국도예술관으로 도보 이동 (20분)
10:20 국도예술관, 〈심플 라이프〉 관람
12:00 버스 타고 무비꼴라쥬⑦ 서면으로 이동 (30분)
12:30 건물에서 간단하게 점심 때우기
12:50 무비꼴라쥬 서면, 〈나우 이즈 굿〉 관람
14:40 무비꼴라쥬 서면, 〈내가 고백을 하면> 관람
16:30 서면에서 센텀시티로 이동 (1시간)
17:40 영화의전당, 〈엔딩노트〉 관람
19:40 부산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1시간)
21:00 부산에서 포항으로 이동 (1시간 40분)
※ 원정은 거의 당일치기였으며 대개 수기로 작성되었다. 위의 내용은 조금의 MSG도 치지 않은 22세 유유민의 실제 하루 계획이었으며, 매달 1~2회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당일치기였던 것도, 저렇게 비상식적인 동선을 소화한 것도, 하루에 저렇게 많은 영화를 봐야 했던 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허락된 날, 허락된 지역, 허락된 시간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돌아와야만 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아니라 조건의 남은 자리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왔다는 생각을 해. 내가 원하던 두루뭉술한 덩어리―도시성, 예술적인 것, 어두운 곳, 집이 아닌 곳, 저절로 시간이 가는 곳―를 향해 움직이다 보니, 우연히 영화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티켓이었을 뿐. 만약 같은 값에 매일매일 오페라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오페라광이 되어있었을지도… 하지만 그런 세계는 나에게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도시의 영화동호회 남자들이 비겁한 이유는 그들이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야.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음을 은폐하고, 마치 영화야말로 순수한 열정의 대상으로 처음부터 유일하게 존재했던 것처럼 포장하기 때문인 거지.
해피헤비드링커, 집, 검진 센터로 향하는 택시 등등에서, 유민
① 서울의 인기있는 스폿들을 거점으로 운행하는 순환버스 관광상품. ② 당시 세진 언니는 "올해부터 이코노미 짱이 되었다"라는 말을 해주었는데, 객실이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로 나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유민에게는 거의 암호처럼 들렸다. ③ 천연 실크 단백질 성분을 기반으로 한 미국 프로페셔널 헤어 케어 브랜드. 정식 명칭은 바이오실크 테라피. ④ "수능날 만점 시험지를 휘날리자"를 줄인 것으로, 2004년 2월 네이버에 개설된 수험생 커뮤니티의 이름. ⑤ 당시 KB국민카드에는 한 개의 카드만 최소 전월 실적을 달성하면 다른 카드까지 혜택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혜택을 줄줄이 엮어 쓸 수 있다는 점에서 굴비카드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⑥ 당시 유민의 일기장과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내용이며, 실제로는 아마 상당히 더 '안경 척' 스럽고 호소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랜 장수 생활로 사회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⑦ CGV아트하우스의 전신. 2007년부터 2014년까지 유지되다 개칭되었다.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4
신포도
유민에게…
연두색 팔부바지가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직도 나는 '서울에서 산 옷'에 관한 이상한 동경이 있는지도 몰라.
편집부 주석
세 번째 편지를 읽은 신포도는 “연두색 바지 탐난다”고 유민에게 카톡을 보냈으나, 그것은 끔찍한 바지였다는 답이 돌아왔다.
방금은 연희동 카키스에서 생일 쿠폰을 쓰고, 파타고니아의 플리스 재킷을 샀어. 힙스터들이 가득한 그 공간의 기운에 짓눌려서, 바깥으로 나와 주섬주섬 새 옷으로 갈아입었지."입고 갈게요" 한마디를 못해서 바깥에서 옷을 갈아입는 내가 좀 웃겼달까. 옛날 같았으면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한심하지…' 생각했을 텐데. 오늘은 카페로 향하면서 '신포도, 참 귀엽다' 하고 생각했어. 성인이 된 지 십년쯤 흐르니까 나를 대하는 넉살 같은 것도 조금 생기나 봐.
네 교환 일기를 읽으면서 내 취향과 관련한 몇 가지 사건에 관해 떠올렸어. 지난 일기에서 이야기한 놀이와 집 안에서의 방랑은 주어진 조건이나 전제, 상황이었던 것 같아. 그런 전제들을 뒤흔드는 뾰족한 사건도 분명 존재했던 것 같아서. 네 과거가 내 일기의 길잡이가 되어 주네… 멋진 작업①.
네게 세계의 인준과도 같았던 세진 언니의 한마디를 들으니, 취향의 형성에 있어 '타인'의 존재를 배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마주할 세계의 테두리를 제시하는 가족이나, 지리적 조건과 같은 필연이 아닌… 갑자기 솟아오르는 종류의 일들 있잖아.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였지?' 그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던 사건들. 취향의 유령, 세르주 다네를 닮은 유령이 나타나서 이상한 나를 마주하라며 그 사건으로 내몬 순간들.
내게는 소설가 이외수와의 트위터 키보드 배틀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 열다섯 살이 된 당시에 막 트위터에 재미를 붙였었거든. 모든 트윗이 별세계인 데다가, 트위터리안 특유의 '안경 척' 스탠스가 멋져 보였달까? 당시 이외수는 작가이자 논객으로서 보수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심심치 않게 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걸 못 견디겠는 거야.
사실 이외수가 올리던 트윗들이 보수 정권을 까는 말인지, 진보 정권을 까는 말인지도 구분하지 못했어. 나한테 주어진 테두리,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판단의 로직이 선 거지.
1. 이외수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소설을 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는 내가 아는 꽤나 유명한 작가다.
2.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작가는 공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3. 공인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심지어 변두리, 정치 관심 없는 중학생이 볼 수 있는) 트위터에 정치적 의견을 밝힌다?
4. 그래,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자고로 공인이라면 본인의 정치적 의견을 밝히는 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꼰대 중학생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음).이외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렸던 정치 관련 트윗에 답멘션을 보냈지. "안녕하세요. 15살 중학생입니다. 공인이신데, 이렇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올리시면 안 될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작가님의 트윗을 보고 흔들릴 수도 있잖아요."
그때 내가 말한 '누군가'는 정확히 '나'였어.
'이외수 작가님, 당신이 계속 이렇게 제게 정치적 메시지를 노출시킨다면, 저도 거기에 휘둘릴 것 같아요. 제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다가… 당신이 저, 신포도를 정치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제게 당신의 메시지를 이염시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당신은 유명 작가라서 그러한 부담감, 내지는 책임감을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 보자면, 나는 이외수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거지. 15살의 나는 그런 책임감과 부담감을 등에 진 채 말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연희동 카키스 변두리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내가 15년 전에는 얼마나 더 겁쟁이였겠어.
근데 이외수가 답장을 한 거야(!). 정확한 답신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 정치적, 문학적 백그라운드가 부족한 중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을 수도 있겠어. 그러나 내가 그의 답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후에 엄청난 양의 악플이랄까… 멘션을 받았었거든. 이외수를 사랑하는 팬들과, 이외수의 정치적 의견에 동조하는 수많은 어른들의 쓴소리들. '작가님, 중학생이 아니라 보수 우파 지지자인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 '이외수 작가님이 왜 공인이냐?②' … '한심하다'… (로 시작해 대한민국 정치판의 썩은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의 멘션들).
정확히 기억하는 하나의 사실은 그날이 내 열다섯 살 생일이었다는 것이야. 생일 선물로 모르는 어른들의 쓴소리를 들은 셈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그보다는 도파민에 잠긴 채 두근거렸지. 모르는 이들과 활자로 연결되었고, '공인', '셀럽'으로 대표되던 이외수와 한 마디라도 나눠봤으니까. 실제로 내가 이외수를 '공인'이라고 칭한 것은 찬사의 뜻이 담겨 있었어. 나는 이외수와 대화하기 전까지 이외수만큼 유명한 사람과 대화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즈음이었던 것 같아. '아 그래, 나 서울에 가야겠어. 유명한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싶어. 주목받고 싶어. 나는 주인공이 될 거야. 작가든, 미술가든, 음악가든, 영화감독이든…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랑 (네가 언급한) '지은이들'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③
그게 내 사춘기의 시작점이었어. 트랙 위에서 총성이 울린 것처럼, 그 시점부터 마구 달려 나갔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다는 걸 느꼈거든.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의 조각만 우적우적 씹어먹는 게 아니라,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나도 그들의 세계, 어쩌면 '섹스 앤 더 시티' 안에서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허황된 감각을. 사춘기를 고양시키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신호탄이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는 내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놨어. 지금이라면 고려해 볼 법도 한데, 당시에는 매일같이 어린이를 마주해야 한다는 게 싫었거든. "나는 초딩들 싫은데?" 어머니와 아버지도 맞섰어. "네가 하고 싶은 게 달리 없다면, 엄마 아빠 뜻에 따라 선생님을 하는 게 좋겠다"라고 말이야. 너무 합리적이잖아? 반박할 근거를 찾으려고 서부평생학습관④에 가서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학문 설명 시리즈를 훑어봤었어. 그러다가, 어쩌다가, 『MT 영화학』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된 거야.
영화 제목으로 25칸 빙고도 채우지 못하던 내가 어쩌다 '영화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어. 『MT 영화학』에 그만한 힘이 있었나? 책에 소개된 한 챕터는 영화 비평의 세계를 다뤘고, 영화라는 작은 매체를 통해서 세계를 보는 관점을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어. 나는 이미 이외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집 안에서의 방랑 바깥을 엿봤으니까. 영화를 만드는 건 히키코모리 습성을 타고난 내게 너무도 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방에 갇혀서, 조각을 씹어먹으면서,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는 비평에 관심을 갖게 됐지.
네이버 지식iN에 글을 올렸어. "영화과 교수가 되어서 비평을 쭉 공부한 다음에, 영화철학과라는 걸 만들고 싶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답을 달았어. "영화철학과를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너무 맞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영상이론과'라는 것이 있으니, 그걸 알아보시죠. 내공 잘 받아 갑니다."
그게 뭔데. 그 학과를 찾아보고… 그 학과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그 학과를 나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고… 그 학과의 설명과 커리큘럼을 찾아보고… 무엇보다 '예술 학교'라는 이름에 끌려 무턱대고 그 학교를 준비하겠다고 마음먹었어.⑤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겠지? 그나마 전교권을 유지하던 자식이 갑자기 돈도 되지 않을 예술학교에, 그마저 익숙하지도 않은 괴랄한 학문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말이야. 엄마 아빠는 물론 반대했어. 전교 일등을 하면 허락해 달라고 조건을 단 뒤에, 결국 전교 일등을 해냈었지. (자랑스러워서 항상 이야기하고 싶지만, 자랑스러워한다는 게 쪽팔려서 이야기는 못 하는 신화임.) 사실 영화 공부를 하게 되면서, 국어 성적이 엄청나게 올랐어. 국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부터 나는 '입시 준비', 즉 학력 자본을 획득한다는 명목으로 영화를 마음껏 봤다. 수능 준비에 돌입하기 전인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매일 밤 두 시간을 투자해 영화 한 편씩은 꾸준히 봤지. 필요하다면 영화를 보러 서울에 갔어. 낙원상가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처음 봤던 영화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수도원〉이었는데, 아 쉽지 않더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꾸벅꾸벅 졸았지만. 그 장소에 있던 내가 너무 대견했달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아트시네마 한켠에 마련된 도서관에서 영화를 다룬 책과 지난 영화제의 리플렛들을 살펴보면서 힙스터가 됐다는 착각도 해보고… 텅 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 때로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나 〈잉투기〉 같은 한국 독립 영화를 보러 서울에 오기도 했어. 나는 기껏해야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결국 모든 것이 '입시 준비'를 위해 치러진 의식이었어.
학교 안에서도 나의 개인적 욕망을 완성하고, (다른 서산 친구들과는 달랐던, 하지만 우월하다고 믿었던) 나만의 취향을 자랑하기 위한 활동들을 '학생부 종합 전형'에 끼워 넣었던 기억이 나. 프랑스의 수능인 바칼로레아와 비평의 필요성에 관한 소논문을 쓰고, 동아리 운영비 삼십만 원을 받아 영화 잡지를 펴냈지. 동료가 있었지만 사실 90%의 글은 내가 썼어. 진짜 영화평론가의 인터뷰를 싣겠답시고 무작정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 서울로 첫 출장을 가기도 했었다. 『FAIM』이라는 이름의 그 잡지… 사실 엉망이었어. 교정 교열도 할 줄 몰라, 틀린 맞춤법과 비문이 뒤섞인 결과물이었지. 기획의 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자기중심적 배출이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을 다뤘거든. 대니 보일이나 자비에 돌란 같은 사람들. 그럼에도 모든 반의 사물함 위에 '내가 만든 영화 잡지'를 놔두던 순간의 뿌듯함만은 생생해.
잡지 『FAIM』. Film, Art, Imagination, Magazine의 약자였다. 그렇다면 '파임'이라 읽는 게 맞는데, 왜인지 나와 친구는 계속 '페임'이라 읽었다. 둘 다 간지나서 괜찮은 것 같다.
열여덟 살의 10월에는 엄마와 함께 부산 영화제에도 갔었어. 서산에서 부산은 너무 먼 길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새벽같이 차를 운전해 줬지. 그걸 천안아산역에 주차해 두고,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린 뒤, 부산역까지는 다른 열차를 타고 갔던 것 같아. 그렇게 먼 길을 함께 와준 어머니께 〈언어와의 작별〉을 보여주는 불효를 범하고… 〈라폴로니드〉의 후속작으로 초청된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로랑〉을 봤어. 〈라폴로니드〉를 너무 좋아해서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의 토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셀카도 찍고, 사인도 받았었다. 그때 사인 받았던 노트에 이런저런 글을 마구 적었던 기억이 있어. 소중한 사인이 번지지 않게 문구점에서 산 코팅지도 붙여 뒀는데,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입시를 준비한답시고 매주 중앙대학교에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강의를 들었었어. 시네마테크, 앙리 랑글루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들… 모르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제대로 알아들은 것도 없지만, 그냥 매주 상경해 강의를 듣고, 이상한 이름들을 듣고, 신기한 영화 제목들을 듣고, 영화를 공부하는 멋진 사람들의 곁에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아. 이모 집은 오류동. 중앙대학교까지 매주 1시간 10분이 되는 거리를 오가면서도 지치지 않았어. 이외수 콤플렉스가 이렇게까지 힘이 셀 줄이야.
그럼에도 내가 벌인 돌발적인 사건들은 사실 '돌발'과 '이상한 짓'으로만 남으면 안 됐거든? 어떻게든 입시 준비라는 이름 아래에 포섭돼야 했지. 나는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다양한 조각들을 씹어먹고, 그 조각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었거든. 입시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할 영화, 듣지 못할 이름과 음악,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만났어. 그렇게 내 취향이 점점 커지고, 또 단단해진 것 같은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입시'라는 분류로 포섭된 채 형성된 취향이 '온전히 깨끗하지는 않다'는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너처럼 어딘가에서 도피하기 위해 취향을 만난 게 아니라…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취향을 쌓았거든.
사실 진짜 취향은 그런 게 아닌데. 죄악이고, 죄책감이고, 인준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학생부 종합 전형이나, 논술이나, 자기소개서 같은 촌스러운 이름들이랑은 가장 먼 곳에 위치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게 내가 지난 십년 간 극복해야 했던 열등감인가 봐. 그런데 오늘은 '신포도, 참 귀엽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 교환 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그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 물론 극복도 내가 순수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은 아니겠지. 이제야 나는 목적 없는 취향을 즐기고 있으니까. 목적 없는 취향에 다다른 다음에야,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취향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거니까. 지금의 솔직함마저도 일종의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아닐까.
이외수, 『MT 영화학』을 쓴 정재형 교수, 유운성 평론가와 김성욱 프로그래머, 장 뤽 고다르와 베르트랑 보넬로, 대니 보일과 짐 캐리, 자비에 돌란… 당신들이 내게 한 짓을 알고 있어요?
〈대홍수〉를 보며 오열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포도가.
① 배우 정우성이 여성에게 보낸 플러팅 DM에서 차용한 문장. 그는 "작업을 잘하시고 즐기는 것 같"은 분께 "멋진 직업"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신포도는 이토록 대충 플러팅을 던질 수 있는 그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그래서 써봤다.② 아마 이외수의 답신이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 같다. "본인은 그저 작가일 뿐, 정치적 의견을 밝히면 안 되는 공인이 아니다. 그리고 공인이라고 해도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기억 속의 활자는 오랜 시간을 견딜 힘이 없다. 정확한 모양을 유지할 수 없다. ③ 이외수와 트위터에서 대화를 나눈 뒤로, 신포도는 아주 자신만만해졌다. 온갖 사람들에게 트위터로 편지를 보내고, 보잘것없는 그림을 보냈다. 실제로 그는 트위터 시기, 칸이 사랑한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 코미디 연기의 대부 짐 캐리 등에게 멘션을 받았다. 이 짧은 멘션이 신포도에게는 취향의 승인, 세계의 인준 같은 것이었다.④ 충청남도교육청서부평생교육원은 충청남도 서산시 석림동에 있는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다. ⑤ 고등학교 2학년 진로 상담 당시, 담임이었던 이정주 선생님께 학과 진학에 대한 뜻을 밝히니 선생님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거긴 예술 하는 애들이 가는 데야!"라고 말씀하셨다. 신포도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름이 예술학교인데) 제가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어릴 때부터 싹바가지가 없었던 것 같다.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5
유유민
답장이 단단히 늦어버렸구만. 회사 일이 너무 바빴어. 용서해 줘.
이 교환일기, 오랜 시간 동안 놓지 못했던 자격지심을 강에 떠내려 보내는 기분으로 쓰고 있어. 이 강가에 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난생처음 말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 알량하고 비밀스러운 과거들을 터놓으면서 아… 만 서른넷의 유민은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 될 수밖에 없었는가?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중인 것 같아.
지난달까지만 해도, '지은이들'이 버스로 20분 남짓 이동하면 쉽게 볼 수 있었던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보기 위해 순례길을 걷듯이 서울에 가곤 했던 2012년의 날들을 복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 어쩌면 그 경로 사이사이에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공연, 숙박, 정치적 집회 같은 수많은 맥락이 덧붙여지면서 나는 점점 성인의 꼴을 갖춰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심영섭의 〈아무르〉 (Amour) 시네마톡 하나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힘들게 온 김에, 대통령 후보 유세를 한다고 하니 도산대로며 광화문이며 잘 알지 못하는 동네들에도 쏘다녀 보고, 혼자 경험 삼아 집회에 나갔다가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앞줄에서 스크럼을 짜다 최루액도 맞아보고, 눈물을 닦으며 도망쳐 들어간 '미정국수0410'에서 입천장이 데도록 튀김 주먹밥도 씹어 보고, 밤을 새워버린 김에 다음날 스폰지하우스와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한 편씩 더 보고, '오월의 종'이나 '교보문고'나 'mmmg' 같은 지은이들의 장소에도 가보고… 서울이 어떻게 생겨먹었고 어느 동네와 어느 동네가 붙어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청량리에서 목동에서 혜화에서, 강변 찍고 다시 이태원으로 향하던 극도의 비효율적 동선.
그러고 보면 영화보다, 영화를 보기 위한 무작위적인 이동 자체가 나를 구성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이동의 과정 속에서 본 것들, 사람들, 시장, 거리, 냄새, 조명, 경찰, 빵, 프라푸치노, 책, 백화점, 양성리에서는 가능할 리 없었던 종류의 파편들이, 어쩌면 내가 그 시절 사랑했다고 착각한 대상들(이건 또 너무 냉정한 분석 같기도 하지만)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거야. 물론 이 역시 사후적인 해석이겠지.
또는, 〈페어리〉(La fée)를 보러 가던 날의 기억. 정작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영화 속 모텔 주인이 밤새도록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다이나 와싱턴Dinah Washington의 목소리라든지, 영화가 상영되던 동성아트홀의 춥고 건조한 기운이나 영사기의 덜덜거림, 빛 속에 뒤섞여 떠다니던 먼지 같은 것들만을 기억하듯이.
네가 처음 세르주 다네의 글을 보여주던 날에 내가 흥분했던 이유도, 영화를 보러 가던 나의 위치, 좌표계 속에서 나에게 부여되었던 방향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었어. 그 관점에서 보면 나는 확실히 영화를 사랑한 게 아니었나 봐. 적어도 일반적인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고, 어쩌면 사랑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에 매혹되었던 거야. 영화를 보러 다닐 수 있는 행정구역, 그 구역으로 향하는 나의 이동성,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 아주 구체적인 조건들, 구역을 어지러이 이동하며 감각한 것들…
그러나 처음 다녔던 대학에서, 영화는 내가 동경하던 조건들과 갑작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어. 서울과 물리적으로 많이 가까워진 덕에 (알다시피 나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천안에서 대학을 다녔어) 영화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갑자기 생긴 코골이 탓에 기숙사 룸메이트가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서울로 직행해 심야 영화를 보는 것으로 숙박을 대신했던 날들.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홀리 모터스〉(Holy Motors)를 보며 까무룩 잠들던 기억, 혹은 강남역의 24시 카페들에서, 강변에서 마지막 타임의 영화를 본 뒤 동서울터미널 근처의 찜질방 수면실에서 칠천 원을 내고 잠을 청하던 일… 취객들, 불결한 느낌, 그 즈음하여 읽은 광진구 어귀의 살인사건에 관한 기사 같은 것들. 뭐랄까? 더 이상 향기롭지 않은 것들과 영화가 붙기 시작한 거야. 어쩌면 이 시기에 내가 지금 깨달은 것들―당시의 내가 영화보다는 영화에 결부된 조건이나 영화를 보기 위한 이동 자체에 끌렸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영화 보기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나는 내가 영화 자체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유지했고, 그런 불결함 가운데서도 끝끝내 영화 보기를 지속했어.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변화들 때문에 나는 영화를 좀 더 제대로 알고 싶어졌던 것 같아. 이해하고 싶었고, 끌어안고 싶었고, 영화 주변의 조건들이 아닌 영화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 그래서 전공 수업을 내팽개치고, 영화과 이론 수업을 일반선택과목으로 수강하기 시작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 대학에 영화과가 있었던 것과, 이론 전공 교수가 있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조건이었고, 일종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유민 인생 최초로 영화이론을 공부했던 두 권의 책.
뭘 공부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영화이론입문' 수업에서 나는 처음으로 배움의 기쁨을 느꼈어. 영화를 보는 걸 넘어 영화를 읽는 방법을 접하면서. 쇼트와 몽타주, 미장센과 사운드, 장르와 작가주의, 페미니즘, 스튜디오 시스템,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우면서. 영화 주변을 배회하며 느끼던 갈증이 뭔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됐어.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어떤 것을 담지하고 있는지, 나아가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없었던 거야. 그냥 애호하는 상태로 주변에 머물 뿐. 그날 강의실에서 나는 비로소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기 위한 일종의 스타터 키트를 얻은 셈이었어. 이후로 그 교수님의 수업을 줄곧 따라다녔지. 그리고 곧 생각하게 됐어. 나는 영화를 질리도록 보면서, 그리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살고 싶은 것이구나. 분명히 해두자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기보다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을 거라고 봐.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게 되면 영화에, '시티'의 근거리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도구상자와 이론들이 필요했고, 그 마음은 절박해지다 못해 급기야 영화이론을 전공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비약하게 되었지. 내가 다녔던 대학의 영화과에는 이론 수업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 소양의 함양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수업이었을 뿐 제대로 된 심화 과정은 없었고(개설된 이론 수업 중 대부분을 이미 다 수강했던 것으로 기억함), 연출과 매체 연기에 특화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약간의 구글링을 통해서 영상원에 이론을 전공하는 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덜컥 지원서를 접수하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수업에서 썼던 교재를 몇 번 복습하고,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 딱 한 권을 읽었어. 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시험 칠 때까지 결국 이해 못 했음. 지금은 과연…?) 이후에 벌어질 일을 그때 알아야 했는데…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을 준비하던 중에, 서울독립영화제 자원봉사단에 지원하게 됐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건 정말 인생 전부를 다 걸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적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거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기소개서와 영화 리뷰(지원한 팀과 상관없이 필수 제출 서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아마도 〈소셜포비아〉 리뷰를 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변요한을 아주 좋아했으니까…)를 보냈는데, 뜻밖에도 사무국에서 내가 지원한 팀이 아닌 관객심사단으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 누군가 내 글을 쓸만하다고 생각해 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세진 언니의 "저거 재밌지!?!!"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영화에 더 가까이 와도 된다는, 이 세계에 발 들여도 된다는 새로운 승인처럼 느껴졌어.
막상 자원봉사를 시작하니, 거기는 또 다른 '시티'더라구. 영화를 둘러싼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가진 사람들, 영화제가 익숙한 사람들… 나는 한 달 남짓한 활동기간 내내 엄청난 열등감에 시달렸어. 강변역 찜질방 수면실의 불결함과는 다른 종류의 불편이 엄습했어. 내가 발붙일 곳이 아니라는 감각, 내가 얼마나 변두리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순간의 연속.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마감에 맞추어 글을 쓰고, 인터넷에 공식적으로 내 이름을 단 글이 발행되고, 사람들이 내 글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상영 후에는 배우들과 술을 마시고 만취해 보는… 그런 경험들이 나를 엄청나게 고무시켰음은 분명한 것 같아.①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캐리 브래드쇼가 맨해튼에서 무표정하게 칼럼을 쓰듯이, 나도 서울에서 영화에 관해 쓰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화라는 세계의 내부에 위치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 어드메에 위치할 수 있을까? 마침내 '지은이'가 될 수 있을까? 비록, 영상원조차 새로운 '시티'로 가는 경유지임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전적 대학의 영화이론 수업에서는 기호학과 할리우드 스타시스템, 방대한 영화사의 개괄을 배웠어. 파롤, 랑그, 〈전함 포툠킨〉(Battleship Potemkin)(서인숙 교수님이 [포템킨]이라고 절대 발음하지 않고 언제나 [포툠킨]이라고 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짜릿한 기쁨이었다), 진 켈리, 고다르, 트뤼포, 누벨바그,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그런 것들이 영화 공부의 최상단이라고 생각했지. 여전히 나에게 영화란 무비꼴라쥬였고, 부산 국도극장이었고, 어쩌면 불가해한 영역으로서의 크리스티앙 메츠였어.
하지만 새로 만난 이들이 취급하는 영화의 최전선은 다른 것이더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트랜스-아시아. 내가 사랑했던 감독들과 비평가들이 아닌, 이름 모를 수많은 이론가와 마니 파버와 흰 개미… 들뢰즈, 푸코, 후설, 아피찻퐁, 이강생, 빅토르 에리세, 에드워드 양, 타르코프스키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어. 나의 범위에는 시네마테크가, 문화학교가, 그밖에 영화에 대한 아트시네마적 취향을 키울 수 있는 촉매가 없었고, 그래서 몰랐어. 더 당혹스러웠던 건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말하는 게 왜인지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거야.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때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어. 그것이 저급하거나, 심지어는 저능한 취향으로 인지될 것이라는 두려움.
지금은 그것이 허상임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겁먹은 상태였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숨기기 시작했어. 항상 쿨키드가 되기를 원했으니까. 새롭게 보고 배운 것들이 싫었다는 건 아냐. 좋은 것들, 재미있고 유의미한 것들을 많이 배웠지. 다만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양 굴었던 시절에(이제는 시절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겠지) 나는 너무나 피로했어. 그런 식의 불필요한 자기검열이나 가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슬픈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프(if)의 세계라는 것은 없으니까, 나는 결국 언제라도 동일한 시행착오를 겪고야 말았겠지.
교환일기를 쓰면서 이제야 알게 되는 것들. 나는 평생 같은 패턴을 반복해 왔다는 것. 시티를 발견하고, 시티를 향해 가려고 발버둥 치고, 시티에 도달하면 영주권을 받기 위해 애쓰고, 그러다 다른 시티를 발견하고, 또 이동하면서… 섹스 앤 더 시티로, 영화제로, 영상원으로, 비평 씬으로… 사실 모든 시티는 신기루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고,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자격이나 인준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니까.
배운 것들을 가지고 야망 넘치는 프로젝트를 발족하기도 했었지. 분명 그때는 구체적인 욕망과 열정과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화나 비평과는 관계없는 이유로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더라면, 체증을 벗어던지기 위해 의식적으로 영화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러고 보니 나는 심지어 영화에서 멀어진 이유조차 영화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신기루의 가장 잔인한 지점은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라, 그 신기루에 발을 들였다고 믿었을 때, 별안간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이 아닐까? 그러니 내가 마지막 시티에서 목격한 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겠지.②
결국 모든 시티가 나에게 영주권 따위 허락하지 않는 신기루였다고 해도, 그 신기루를 만지기 위해, 신기루에 속하기 위해 거쳐온 동선이 지금의 나를 조형했음은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겠어. 영화는 나에게 가보지 못한 세계를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내 좌표를 부지런히 옮겨 다녔지. 최종 목적지가 실체 없는 오아시스임을 알게 되었을지언정, 이동하는 과정에서 내가 감각한 것들, 배우고 만나고 절교한 것들이 나를 이루는 지층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지난한 발버둥은 헛수고가 아니라, 나를 양성리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가장 정직한 지질학적 이동이었던 게 아닐까.
영화에서 멀어진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어느덧 육 년 차 직장인이 되었고, 영화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을 하며 살고 있고. 물론 그 시간 동안 새로운 종류의 고통이 있었음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최근에 나는 회사 밖에서는 인간이 아닌 어떤 무형질의 개체로 존재하는 느낌에 대해 자주 생각했어. 너와 거의 매일 그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에게 직장인으로서 특별한 긍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일의 부당함을 구조 탓으로 돌리며 한탄하는 일도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 다만 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갖게 됐어. 회사 밖에서까지 업무 스트레스에 영향받는 대신, 나라는 개체로서 독립적이고 행복하고 생산성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조건이 만든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의 인준을 받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이라는 점인 것 같아. 드디어 나는 누구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게 되었어.
여전히 나는 조건의 남은 자리를 따라 움직여. 출근 전과 퇴근 후에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농담이야. 어쨌든 이제는 거룩한 이들에게 주눅드는 대신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지. (물론 그 웃어넘김은 너그러움과는 관계없는 조롱, 심지어는 로스팅에 가까운 형태이긴 해. 근데 뭐 잘못됐나?) 늦은 퇴근 후 노트북을 펼치고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나는 이제 새로운 시티를 모색하는 대신 보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보고, 읽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읽고, 듣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고 작심해. 그럴듯해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나 승인받기 위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를 인용하고 지껄이는 일을 그만두어서 기뻐. 와. 너무 속 시원하다.
너는 어때? 서산에서 서울로, '파임'에서 '노마드'로, 옷방에서 극장으로, 관객에서 뭔가 다른 것들로… 니가 찾아다닌 것도 시티였을까? 그리고 너도 시티가 필요 없음을 알게 되었을까?
그런데 솔직히 바칼로레아 소논문을 쓰고 매주 낙원상가에 가는 서산의 여고생 신포도는 너무 귀엽고 멋지다. 짐 캐리나 자비에 돌란한테 답멘션 받은 건 내 생각에는 이력서에 써도 될만한 스펙이야. 묘비명에도 써도 돼. 그게 너무 헤비하면 사후 너의 평전에 기록해. 내 평전에는 뭘 남기지…
스타벅스 합정메세나폴리스점에서, 유민
① 최근 유민은 대본리딩 뒤풀이 자리에서 당시 두 번이나 함께 술을 마셨던 배우를 다시 만났으나, 그는 유민을 기억하지 못했다. ② 그러나 언젠가는 써내고 말리라.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6
신포도
자동인형처럼 출근 준비를 하던 오전 6시 부근, 네 일기를 받아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어. 그래, 세 번째 교환일기를 쓰면서 조금은 해이해진 내 정신과 마음을 다시 깨워내야겠다. 졸리고 귀찮은 탓에, 샤워를 생략할까 했는데 네 일기에 답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욕실 벽으로 밀어 넣더라고.
그래. 네 말처럼, 내가 찾아다닌 것도 결국은 시티였을까? 세르주 다네는 "집에서 문화라는 개념을 창조해야만 했"대. 나는 평생을 집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애썼거든. 집 안을 걸어야 했을 때도, 집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쳐야 했을 때도, 집보다 작은 서산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결심에서도 말이야. 나는 왜 다네처럼 집의 교육자 역할에서 제3의 의미를 찾지 못한 걸까?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구조를 반복하는 도시. 이름과 옷을 고쳐 입으며 새로운 모습인 양 꼿꼿이 선 통과의례들. 왜 나는 그들의 품으로 도피해야만 진짜 취향과 문화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 서산시를 떠나 지은이들의 도시에 오면서, 나는 나만의 방과 집을 갖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집 안에서의 산책과 방랑이라는 경험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외주를 맡겼지. 이외수에게, 그 수많은 '파임'의 이름들에게,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한 채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보였던 과거의 동료들에게, 믿고 따르고 싶었던 선생들과, 나의 관심사와 경험을 모두와 공유할 수 있을 것이란 환상들에게.
내가 지나친 몇 가지 분기점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유년기의 편린 속 기이한 놀이를 즐기던 순간들, 카툰네트워크와 '섹스 앤 더 시티'를 목도한 브라운관의 순간, 입시라는 정상적 통과의례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견뎠던 지난한 순간,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열린 별세계. 진짜 지은이들의 공간.
그래 맞아, 석림동 아파트와 서산 터미널의 문을 열고 나가니 그때는 순간이 아닌 공간만 있더라고. 별세계는 '따로 떨어진 세상'이라는 뜻이래.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별세계는 아직도 별들의 세계 같아. 도시이자 구조인 서울에는 순간보단 공간이 가득해. 눈 깜짝할 사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빈 공간들. 나는 그동안 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토록 달렸거든? 그 순간들이 너무 지겹고, 괴롭고, 힘들어도. 문을 통과했을 때의 기쁨을 느끼고 싶었어. 나는 내가 통과할 문이 그래도 몇 개는 더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서산 터미널의 문이 마지막이었더라고. 그 뒤에는 문인 줄 알고 두드리니 풀썩 무너지고. 문인 줄 알고 열고 들어갔더니 빈 초원밖에 없더라고. 뒤를 돌아보면 내가 연 문이 활짝 열려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지식iN의 누군가가 '영화철학과를 만든다'는 문에는 이미 못질을 해버렸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에코만 왕왕… 에코가 에코를 만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어떻게든 해석해 보려 애쓰고.
애썼다? 글쎄. 내 대학 생활은 그리 애쓴 것과 가깝지는 않아. 그저 술을 마셨지. 술을 마시고. 또 마셨어. 알잖아, 우리 술 마시다가 친해진 거. 수업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뒤엔 수업에 나갔지. 그때 수업 듣기와 술 마시기에 뇌를 다 써버린 탓에, 수업에서 뭘 보고 뭘 읽었는지도 잘 안 떠올라. 남은 건 몇 가지의 파편들?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이상한 단어들. 봤으나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제목과 감독의 이름. 읽었나, 읽지 않았나 아직도 헷갈리는 책의 제목들.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상한 선배들의 대학 생활. 너도 알겠지만, 그때 썼던 글들은 내가 쓴 글인지도 모를 정도잖아.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싶잖아.
어쩌면 그 낯섦의 감각은 네가 말한 '저능한 취향에 대한 두려움'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나는 사실 대니 보일, 자비에 돌란, 짐 캐리가 좋았는데. 대니 보일의 〈트랜스〉(Trance)와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을 좋아하던 UK 2등 시민이었는데. 갑자기 마니 파버, 다니엘 위예를 보고 읽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영화와 글들에 진정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좀… 구리다고 생각했어. 그 없어도 무방한 열등감이 사실은 문도 아닌 걸 문으로 만들어버린 거야. 나는 아직 부족하구나. 내가 아직 찾지 못한 문이 어딘가엔 있겠구나…하면서.
스무 살이 되고 나서 했던 첫 발제는 질베르토 페레즈의 『The Material Ghost』①였어. 당시엔 국역도 되지 않았었기에 영어들을 드문드문 읽어 나갔지. 서산의 롯데리아를 닮은 그곳에서 신메뉴로 출시된 모짜렐라 치즈버거를 먹으며 괴로워했던 기억만은 선명해. 내 괴로움의 원인은 영어가 아니었어. 그냥 그 안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별세계였지. 자신만의 전문 용어로 울타리를 치며 학계를 이끄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코드와 컨벤션. 오래된 이론에 관한 문제 제기. 부재하는 세계라는 모순된 단어의 연결. 나는 몽타주를 배우기 전부터도 몽타주 된 것들을 읽었어. 실제로 몽타주를 배울 때는 조금 시시하다고 느꼈지. 그래서 건너뛰었던 것 같아. 술이나 마시면서. 사실은 몽타주에 대해서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멋지다고 착각했지. 더닝 크루거 효과를 내 몸에 덧씌우면서 그렇게 나만의 문화와 취향을 만들어 나간 거야. 다네가 보면 기겁하겠지? "이 게으른 교육자!"
근데 정말 취향에 문이나 통과의례 같은 게 있었을까? 유운성 평론가의 말마따나, 영화학·영화이론이라는 것에 제대로 된 학습 프로세스가 있을 리 없잖아. 수1을 끝내고 수2로, 주어·동사·목적어를 배우고 1형식부터 5형식을 배우는 커리큘럼이 취향에는 주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습관처럼 문을 찾아다니니까 계속 유령같이 투명한 가짜 문들을 만든 거지.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밉고. 낯설 만큼 구린 화질로 구현된 〈게임의 규칙〉②을 당연한 것처럼 보면서 이해하려 애쓰고. 그렇게 문들을 하나씩 통과하면 나도 언젠가는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고, 조너선 로젠봄Jonathan Rosenbaum③과 대화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눈시울 붉히며 보고, 이해조차 어려운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보며 멋쟁이처럼 떨을 피울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스트라우브와 너무 멀고, 먼 곳에 살잖아. 석림동에서 뉴욕까지 날아가려면 너무 긴 시간이 걸리잖아. 오즈 야스지로의 시대로 가려면, 나는 아인슈타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야 하잖아. 그걸 인정하기에 나는 어렸던 것 같아. 그래서 가끔은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대학에 갔다는 생각도 가끔 해. 문이 없는 별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안 뒤에 갔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내가 진심으로 수업을 듣고, 스트라우브의 영화를 즐기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을까? 그를 즐기는 척하는 추한 허영심들과는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내가 놓친 진실된 감동은 얼마나 많을까. 셀 수도 없겠지. 셀 수도 없다는 감각은 일종의 열등감일까? 아니면 포도송이 앞에 선 여우의 마음과 비슷한 걸까?
잔뜩 굶주린 여우 한 마리가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간 덩굴에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올라도 손이 닿지를 않았다. 그러자 여우는 포기하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덜 익었군."
– 이솝 우화 중 「여우와 포도송이」지금은 알아. 사실 별세계에 문이라는 건 없다는 걸. 좋은 것을 읽고, 보고, 때로는 불평하는 게 전부라는 걸. 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그 많은 취향들을 귀동냥했나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그저 하루하루, 한 편 한 편,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삼키면서 제리가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고 허무는 게 전부지.
어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수집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사 책에 나오는 리스트를 섭렵한다면, 나는 영화를 정말 취향이자 문화로서 대하고 있는 걸까? 이미 대다수가 고등 교육의 수혜자인 지금, 우리는 문화와 취향에도 단계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다네는 집에서 문화를 창조해야 했대. 자신이 교육자 역할을 해야 했대. 그래서 스트라우브의 영화를 높게 평가하더라고. 그 영화들은 모두 "교육학적"이라고. 사실 나는 영화가 교육의 탈을 쓴 나쁜 짓이어서 좋아했는데. 그래서 영화 보기를 사랑했던 건데.
어쩌면 나는 영화에서 그 어떤 것도 배우고 싶지 않았나? 사실은 나 역시 도피하고 있었나? 순간이라는 중력에서. 통과한 문을 닫은 이후 찾아오는 허망함에서. 사실은 내게도 영화가 방랑이었나 봐. 그래서 내가 그토록 수업을 대충 듣고. 술이나 퍼마시러 다녔나 봐.
외주 맡긴 방랑을 다시 찾아와야겠더라고. 더 이상 영화에 문을 만들면서, 영화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어. 만들지도 못할 영화철학과에 시간을 태우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영화로서 나 자신을 교육하기를 끝냈어. 기어코 끝냈지. 끝낼 수밖에 없었고, 끝내고 싶었고,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끝내길 잘했어.
영화를 향한 기이한 매달림에서 벗어나고 나서 참 많은 걸 얻었지. 데이빗 보위와 기리보이④ 바깥의 새로운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프레스를 구독하며 온갖 세상사들을 읽었어. 언어의 망각에 관한 책이나, 원시인과 인류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기 드보르가 쓴 스펙터클에 대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강박적인 음주 습관에 관한 회고⑤를 읽었어. 수전 손택이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일기를 많이 썼다는 걸 알게 됐어. 베스트고어의 대문 기억을 되살리며 피 터지고 살 자르는 영화들을 다시 생각했어⑥. 시 수업을 들었어. 몇 년 만에 다시 독서대를 샀어. 기타를 배웠어. 개러지밴드로 듣기 싫은 음악들을 만들었어. 과거를 용서했어.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 법을 배웠어. 혼자 일본에 가고, 유럽에 갔지. 『아슈타바크라 기타』⑦를 들었어.
기리보이는 아직도 좋아. 데이빗 보위는 내 팔 한편에 숨 쉬지. 그즈음 되니, 질베르토 페레즈의 『영화, 물질적 유령』을 한국어로, 쾌적하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더라고. 사실 『영화, 물질적 유령』은 문도 아니었던 거지. 그냥… 무수한 책과 이야기와 활자 중 하나였던 거야. 근데 그때는,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밉고 싫었을까?
이 교환일기를 닫으며, 어제의 부고가 떠올라. 브리짓 바르도가 죽었대.
왜 갑자기 브리짓 바르도냐고? 내가 내 돈으로 처음 산 영화 DVD가 장 뤽 고다르 초기작 모음집이었거든. CD는 4개, 영화는 3편이었어.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와 〈경멸〉(Le mépris).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미치광이 피에로〉야. 그다음은 〈네 멋대로 해라〉. 그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진 세버그야. 그다음은 안나 카리나. 그러니까 〈경멸〉과 브리짓 바르도는 내 첫 통과의 경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았어. 꼴찌였다고. 브리짓 바르도가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 배우는 나의 취향 밖이었던 거지.
진 세버그는 나의 출생 한참 전에, 안나 카리나는 내가 영화 속 문을 통과하고 있던 때 죽었던 것 같아. 브리짓 바르도는 내가 온갖 이상한 것들을 읽고 듣는 지금 죽었네. 진 세버그의 죽음은 경험한 적도 없고. 안나 카리나의 죽음은 왜인지 와닿지 않았는데, 브리짓 바르도의 죽음은 이상하더라고. 어제는 부고 기사를 막 읽었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브리짓 바르도에 관해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대. "그녀가 성숙해지기를 바라지만, 변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바르도가 90세를 맞아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 "제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NYT는 이렇게 평가하네. "보부아르가 바랐던 대로,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나 왜… 브리짓 바르도가 죽은 게 이렇게 슬프지? 브리짓 바르도가 죽은 게 너무 슬프다. 몰랐는데, 되게 슬프네. 서산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인 고다르 DVD 셋을 꺼내야겠어. 지금 〈경멸〉을 보면 어떨까? 그럼 나는 진 세버그보다 브리짓 바르도를 더 좋아하게 되려나? 어찌 됐든, 이 슬픔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내 안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이상한 리스트에만 목매고 있을 수는 없어. 그렇지?
콜비 애커프의 If I Were the Devil을 들으며, 포도가.
① 영화학자 질베르토 페레즈의 책. 국내에는 2024년 『영화, 물질적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② 장 르누아르 감독의 1939년 영화. 왓챠플레이에서 감상 가능하다. ③ 미국의 영화 평론가. 인스타그램 @jrosenbaum2002 ④ 기리보이는 가사를 정말 잘 쓴다. ⑤ 기 드보르는 회고록 『파네지릭』에 이렇게 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벼운 취기가 좋았지만, 머지않아 지독한 취기 이상의 상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너머에서는 끔찍하게도 황홀한 평화와 흐르는 시간의 진정한 맛을 맛볼 수 있었다. (...) 이렇게 술을 마셔대느라 정작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그게 딱 적당했다. 글쓰기란 흔치 않은 행위로 남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⑥ 신포도는 올해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지속고어 프로젝트'라는 글을 뉴스레터로 연재했다. 현재는 블로그에서 열람할 수 있다. ⑦ 『아슈타바크라 기타』는 힌두교 전통의 철학 경전으로, 현자 아슈타바크라와 미틸라의 왕 자나카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텍스트다. 인간의 참된 자아와 해탈에 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세계와 자아를 둘로 나누는 생각이 환상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