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에디터스 레터 | 월간차지의 창간에 부쳐
좌담 | 조커는 크고 록조는 작다: 빅 딕 에너지의 문제

연재소설 | 곡예사 톰의 실종

이달의 빈지와칭 | 붙박이 남자 권오중의 알리바이

여행수첩 | 자동차, 고소공포증, 자전거

교환일기 |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불평불만 | 팥빙수 아브젝시옹

 직업탐구 | 어느 테크 스타트업 OL의 수요일 오후

이달의 컴필레이션 

❿ 내 운명을 알려다오

⓫ 픽션 앤 프랙티스: 결핍 워크숍 프로토콜

⓬ 독자차지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1

유유민


엿새 전 우리를 태운 김포발 제주행 진에어가 이륙하던 때에 사실은 미약한 난기류가 있었어. 옆자리에서 너는 이미 잠들어 있었으니 몰랐을 테지. 너는 상당히 몸을 구기고 있었지만 왜인지 관절이 많은 동물, 이를테면 기린의 휴식처럼 안전해 보였기 때문에, 굳이 너를 깨우는 일은 외국에 지어진 리조트의 설계 오류에 개입하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사실 기린은 관절이 많지 않대. 목뼈가 유난히 긴 것뿐이래.
난기류 시 승무원 안전 수칙. 서비스를 즉각 중단하고 점프시트 혹은 가장 가까운 빈 좌석에 착석하시오.기장이 안내방송으로 화장실 출입을 금지하자마자 기내 조도가 필요 이상으로 낮아졌는데, 이것 역시 지침이었나? 그건 잘 모르겠어. 우리를 마주보는 방향의 간이의자에 앉은 스튜어드가 눈을 감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위아래로 맥없이 흔들렸고, 평온해 보였어. 전날의 수면 부족과 새벽에 공항역사 던킨도넛에서 네가 사다준 커피의 부정교합 탓인지 나는 엄청난 각성 상태로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었는데, 노랗고 침침한 미등 아래에서 몇 개의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어. 요컨대, 그녀가 대학에서 19세기 영국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그 분야에 매혹된 것이라기보다 그 과목의 교수 몇 명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회고 같은 것들. 나는 곧장 1999년의 교실로 돌아간다.

     나는 아홉 살이었고 교내 가을 백일장에 막 시를 써낸 참이었어. 옥계 계곡의 바위산 풍경에 대한 시였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이원상 선생은 금테 안경이 코 위에서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나를 칭찬하는 데 한 교시 전체를 할애했어. 나름 운명적인 순간이었으므로, 어디에도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여전히 「옥계 계곡」의 첫 행을 기억해. 이원상 선생이 삼십 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 구절을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읊고, 그 사이에 이야, 크으, 히야, 같은 감탄사를 배치하며 백일장을 과장된 성역처럼 조성했기 때문이야. 

      “검정 회색 어우러진! 이야, 어우러진! 크으, 바위산 밑, 바위산, 히야.”

감탄사가 과하게 개입되는 것 같지 않아? 문장의 원형을 뚜렷하게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솔직히 약간 의심스럽기도 해. 사실 처음부터 내가 쓴 문장 안에 이야, 나 크으, 가 있었다면? 우유 당번, 철제 사물함, 학급 문고, 태극기와 대걸레와 책걸상이 즐비한 맨부커 시상식을 개최한 것이 나였다면? 선생은 그저 내가 쓴 것을 곧이곧대로 읽었던 것 뿐이라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닐지도 몰라. 사실 글 쓰는 데 이골이 난 어른이 된 채로 그 구절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나는 이 어린이에게서 어떤 재능이나 영특함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혹시 내 기원의 목록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적이 있었던가?
기후적 항목: 뒷산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헬리콥터 소리, 경운기 소리, 오토바이 소리, 한맺힌 귀신의 비명 같은 바람소리, 해풍에 전신주 흔들리는 소리, 새벽 닭 울음 소리, 고양이들의 혈투 소리, 짠 바람 냄새, 볏짚을 태우는 냄새, 굴뚝 연기 냄새, 송진 냄새, 올챙이 냄새, 비온뒤 축축한 흙 냄새, 생선 말리는 냄새, 소똥 냄새, 트럭 짐칸의 디젤 냄새

행정적 항목: (이 분류 일체는 비교적 번화한 옆 마을에만 속해 있다) 군부대 경계 철조망, 방역차, 면사무소, 파출소, 약방, 정육점, 홍콩반점, 포항반점, 뉴멕칸통닭, 스머프치킨, 버스정거장, 초등학교, 중학교, 사택, 오락실

생태적 항목: 꿩, 까치, 참새, 솔개, 고양이, 해파리, 밍크고래, 뒷산의 식용견사에서 도망쳐나온 도사견들, 소, 닭, 청개구리, 두꺼비, 고추잠자리, 배추흰나비, 귀뚜라미, 감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미역, 다시마, 벼, 쑥, 강아지풀, 맨드라미, 매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신 뒤 하얀 포터트럭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이장 할아버지, 외도가 발각되자 적반하장으로 부인을 두들겨패 입원시킨 교회 집사, 목이 쉰 할아버지들, 불콰해진 할아버지들, 깡마른 할아버지들, 허리가 굽고 표정이 맑은 할머니들, 뒷짐을 지고 종종걸음을 걷는 할머니들, 나물 캐는 할머니들, 넋나간 할머니들…
나는 가구수가 고작 일흔 가구에, 슬레이트를 대강 덧댄 기왓집들이 느슨하게 줄지어 있는 리 단위 시골마을에서 자랐어. 해안가에서 일키로미터정도 더 걸어들어가면 나오는 곳이었지. 대부분의 인구가 노인이었고, 90년대에 태어난 어린아이의 등장은 구조의 복구라기보다 결손된 항목의 갑작스러운 복원같은 것이었어. 인구고령화가 가속화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아이가 있었겠지. 6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이미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고, 그들이 낳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도시에 속해 있었을 거야. 1998년에 부녀회장의 앞집으로 장한빛과 장한별이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그 마을에서 유일한 어린이였고, 모두가 나를 알고 있었고 다정하게 ‘민이’라고 불러주었어. 연고 없는 중국집에 전화를 해서 “양성리 민이네 집이요” 해도 이십 분 뒤에 집앞으로 짜장면이 왔어. 그 정도로 작은 곳이었지.

      또한 마을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소 여물을 주거나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거나, 논에서 벼를 심고 미꾸라지를 건져내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아다 시장에 나가서 팔았어. 이것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활동이었으니까. 우리 집은 거기에서 완전히 예외적인 경우였는데, 이 얘기는 다음 편지에서 더 해볼게.

     포도, 너 역시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군지역의 심사 체계는 아주 좁잖어. 그날의 백일장 이후 나는 글짓기대회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비주얼 베이직과 C++), 수학 경시대회, 사생대회, 급기야는 발명대회에 웅변대회까지 온갖 잡다한 콘테스트에 반강제로 출전하고 상장을 마구 쓸어담기 시작했어. 나는 결코 대단히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랬어. 당시 이원상 선생의 심정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어. 사실 나의 자아와 삶의 방식을 무려 스무남은 해동안 이끌어온 가장 큰 욕구의 원천이 고작 담임교사의 칭찬이었음을, 그러니까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주였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 그럼에도 그날의 공기압이 나를 계속해서 어딘가로 밀어왔음은 자명해.

짙은산에서, 유민

P.S. 이 일기를 쓰는 동안 떠올린 사실들
1) 초등학교 때에는 안전상의 문제인지 스테이플러 사용이 권장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원고지의 좌측 상단 모서리에 풀을 발라 붙이곤 했다.
2) 나의 기원인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126번지의 파란지붕 집은 2018년에 철거되어 이제 고속도로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남영덕하이패스 톨게이트’라는 삭막한 이름의, 장소조차 아닌 어떤 것이 되었다. 건설공사 당시 우리집터였던 지층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왜구 방어용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근에 신설된 휴게소 푸드코트에서 통오징어라면을 판매한다. 오징어의 원산지는 원양산이다.
3) 자기연민 안 하기 개 어렵다. 세르주 다네 대단해~



①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위치한 2km 길이의 계곡. 오늘날에는 노지 캠핑 명소로 입소문이 나있다고 함. ②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27. 연남동에서 아마도 가장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일 것이다.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2

신포도


유민에게

이원상 선생의 감탄사를 활자로 읽으며, 나역시 입술을 들썩들썩.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누군가의 입술과 마음 언저리에서 재생되는 감탄사는 네가 경험한 이원상의 진짜 감탄사와 얼마나 멀까.

   멀고 가까움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교환 일기를 쓰는 지금의 나와 순수하고 기이한 놀이를 즐기던 어린 시절의 나 사이의 거리도 꽤나 멀다는 생각에 닿았어. 그만큼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너무 먼 것이지.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아. 모든 순간들이 취향의 원형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텐데 그 순간을 다 기억해내거나, 익히거나, 내재화하지는 못하겠어. 그럼에도 붙잡을 것은 과거 뿐이니까.

   나는 왜 이렇게 됐지? 나는 왜 무언가를 싫어하고 좋아하게 됐지?

   몇 가지 복잡하고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나는 기억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과거를 응축한 조각은 복잡하고 정교한 퍼즐보다는 거칠고 뭉툭한 일곱 개 조각에 가까운 것 같아. 답을 찾기 위해서 이상한 모양의 조각들을 이리저리 배치하는 그 놀이. 서론이 길고 복잡했지만, 응.

   칠교 놀이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내가 유년기에 즐겼던 이상한 놀이들이 떠올랐어. 누군가에게 영감을 받지도 않고, 그저 내가 개발해 만들어낸 놀이가 지금의 취향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갖고 있을까 궁금해졌거든.
[신포도가 즐긴 놀이의 목록들]

1. 발가락 고정 놀이: 새끼 발가락을 네 번째 발가락 위에 올려둔 채 고정시킨다. 새끼 발가락이 네 번째 발가락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발꿈치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의미는 없다.

2. 천장 걷기 놀이: 헤드가 돌아가는 양면 거울을 준비한다. 거울의 한 면을 천장에 고정시킨다. 천장을 보는 거울상을 보면서 천장을 걷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바닥을 걷는 것이다. 천장에는 생각보다 장애물이 많다. 조명, 스프링쿨러, 야광별 스티커, 아버지가 분노로 잡은 박제된 모기의 시체, 경비 아저씨의 말이 (들리지 않지만) 나오는 스피커 등.

3. 개미 죽이기 놀이: 작은 일개미가 나오는 주공 아파트의 ‘옷방’에서 개미들을 검지 손가락으로 찍, 눌러 죽인다. 휴지에 박제된 개미의 시체를 닦는다.
놀이의 목록을 보면 몇 가지 공통 속성을 발견할 수 있어. 첫째, 의미는 없다는 것. 하지만 이것은 유년기에 즐기는 놀이의 공통적인 속성이기도 하니까.

    둘째. 움직임과 거울상. 붙어있지 않은 발가락을 붙이는 것. 존재하지 않는, 심지어 움직이지도 않는 천장의 장애물들을 붙여두는 것. 개미의 시체를 만드는 것. (시체는 움직이지 않으니까.) 때로는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고, 혹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거울 안에 가둔 채로 이동하면서 움직이게 만들었지. 어떤 것은 내화면—나의 화면—에 간직하고, 어떤 것은 외화면에 밀어두면서.

   셋째. 걷는 것. 이상하게 나는 집안을 정말 많이 돌아다녔어. 물론 개미를 죽이는 것은 걸어다니는 일은 아니었지만, 걸어다니는 개미를 보는 것은 좋아했거든. 익숙한 바닥을 걷는 것은 재미가 없으니까 낯선 천장을 걸었고, 발가락 다섯 개가 바닥에 닿는 건 흔한 일이니까 발가락을 구하며 발꿈치로 걸어다녔지.

   걷는 것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집안에서 걷는 것이 지금 나의 취향에 꽤나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어.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와 달리 내가 자랐던 서산시는 생각보다 큰 도시였거든. 동시에 (진짜) 큰 도시의 문화적 자본은 거세당한 곳이지. 롯데리아는 있지만 그 외의 패스트푸드 가게는 찾을 수 없고. 롯데시네마는 있지만 그 외의 영화관은 찾을 수 없고. 엔젤리너스/카페베네는 존재하지만 스타벅스는 없는 그런 곳.

[도판]
어머니와 시내를 돌아다니다 지치면 롯데리아에 들렀다. 나는 햄버거를 좋아하지 않아 치즈스틱과 감자튀김을 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롯데리아 감자튀김이 가장 맛있다.
사진 출처: Maximum의 터미널 기행 https://cafe.daum.net/busmania/3Cbp/126 target="_blank">https://cafe.daum.net/busmania/3Cbp/126

지린내가 나는 터미널의 공중화장실. 그 앞에서는 목장갑을 낀 할아버지가 노골적인 표지의 성인 잡지를 팔고 있었어. 그 잡지들의 표지 사진은 엄마를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던 유년기의 내게 충격적인 스냅숏처럼 남아 있어. 그런데도 공중화장실과 멀지 않은 곳에서 팔던 쥐포를 먹는 건 참 좋아했다. 구운 쥐포는 500원. 기름기가 묻어나는 붕어빵 종이에 쥐포를 담아주던 할머니의 주름잡힌 손 같은 것….

[도판]
현대슈퍼 앞에서 쥐포를 사먹을 수 있었다.
사진 출처: Maximum의 터미널 기행 https://cafe.daum.net/busmania/3Cbp/126

역시 사람은 과거 기억에 매몰되는군. 어쩌다 몇 가지 조각들을 더 늘어놓게 되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야. 서산이라는 소도시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크기의 개념이 참 이상하다는 것. 서산시 석림동보다 서산시가 더 좁게 느껴졌고, 서산시 석림동보다 석림동 한 아파트의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거든.

    어린 내가 자력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도보 10분 거리 내외의 석림동뿐이었고. 서산시의 롯데리아와 롯데시네마, 엔젤리너스와 카페베네에 가기 위해서는 아버지, 어머니의 차를 타고 다녀야 했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자동차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소도시 어린이에게) 공간의 해방보다는 필연이나 강제에 가까워.

   석림동을 걸어다니기 위해서는 나를 보호하던 어머니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거실에서는 그 절차도 필요치 않았어. 헤드가 돌아가는 거울, 어쩌다 발견한 개미, 네 개의 발가락과 굳은살이 배기지 않은 말랑한 발꿈치만 있어도 됐거든. 세계의 허락이나 통과가 필요치 않았던 순수한 방랑. 그곳에서 나는 사막에 불시착한 앵글로색슨족처럼, 비 맞으며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산책했다.

   산책과 방랑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손과 거울, 발과 곤충 다음의 통과 의례는 채널 사이의 공백이었다는 생각에 닿았어. 여름 방학,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집을 비우면 옷방의 작은 브라운관으로 무책임한 방랑을 즐겼지. 투니버스와 재능TV, 카툰네트워크를 벗어나기로 결정했던 날. 리모컨을 광적으로 클릭하며 온갖 팝스타들의 뮤직비디오를 접했어.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섹스 앤 더 시티였는데, 어릴 때의 나는 ‘섹스’라는 단어를 노출한 드라마가 있다는 것이 눈물날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미국은 정말 저런다고?) 여배우가 가슴을 까고 나왔을 때는 심장이 귀에 피를 보낸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어. 10년 된 내 심장이, 아주 푸닥푸닥 뛰었다.

   어쩌면 나는 서산시에서 접할 수 있는 수많은 교육과 네트워크보다, 그 옷방 속의 경험을 세상과의 진짜 조우라고 기억하는지도 몰라. 옷방의 작은 기계 안에는 다 있었거든. 타인의 지린내를 맡으며 성인 잡지의 표지를 훔쳐보는 나, 천장을 걸어다니며 누렸던 전능감, 개미를 죽일 수 있다는 특권을 단번에 선물받은 느낌이었지. 섹스라는 기표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순간도 우연적이었거든.

    그 뒤로도 나는 작은 사각형 안에서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모험을 즐겼다. 롯데시네마에서 해주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토렌트를 깔았고, ‘피어 접속중’의 문턱을 넘기 위해 4일 내내 컴퓨터를 켜놓았지. CD롬을 사서 내 힘으로 영화 DVD를 처음 틀어보고. 둔탁한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듣기 좋은 OST들의 원곡자가 데이빗 보위였다는 것을 알아냈었어. 때로는 이완 맥그리거, 혹은 자비에 돌란과 결혼해 다른 국가의 영주권을 따는 상상도 해봤다.

   멀리서 보면 내 자세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을 텐데. 그저 컴퓨터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가, 풀었다가, 가끔 기지개를 폈다가. 흥분될 때면 이따금씩 일어났다가. 겸연쩍게 다시 의자에 앉을 뿐이었을 텐데.

   그럼에도 항상 의심했지. 내가 경험한 방랑이 진실된 방랑일까에 대한 의문 같은 것? 내가 읽었던 책들은 진정한 영화광이란 영화관의 어둠에 매혹된 자들이라고 설명했거든. 그 매혹은 나와 너무 멀었어. 내게 주어진 어둠은 기껏해야 작은 옷방의 전등이 눈을 감았을 때 정도였으니까. 나는 내가 사막의 앵글로색슨족, 빗속의 강아지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비겁한 히키코모리 정도면 어쩌지?’

    취향의 진실성, 방랑의 조건에 관한 질문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인기 이후의 내게 주어진 임무였던 것 같아. 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진짜) 대도시의 문화적 자본이 쌓여야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열등감 섞인 합리화도 해보고. 그럼에도 내가 지금 찾은 아주 사소한 답 중 하나는, 결국 모든 취향은 비밀스럽게 형성된다는 것. 죄를 지었다는 감각, 거듭되는 자기 의심. 겸연쩍게 앉고, 참을 수 없이 일어나면서 눈알을 돌려 ‘보면 안 될 것을 봤던’ 순간들, 전기세에 대한 고민 없이 4일 내내 컴퓨터를 켜두는 고등학생의 짧은 생각이 취향의 비밀과 조금은 맞닿아있다는 생각은 들어.

   물론, 모든 것은 칠교 놀이의 일부일 뿐이야. 정말 내 취향에 석림동 아파트의 옷방이, 데이빗 보위와의 조우가, 다른 국가의 영주권을 상상하던 밤이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더해주었는지는 모를 일이지. 정말 그 조각들이 나의 지금을 만든 조각들일까? 조각은 맞다 쳐도, 그 조각으로 만들어낸 지금의 답, 기껏해야 추상화된 그림이 정말 진실일까? 그 의심에 대한 답을 찾을 만큼 성숙해지지는 못했나봐. 근데, 뭐 그래도 괜찮아. 의미 있는 놀이라는 게 얼마나 재미없는지는… 너도 알잖아.

해피헤비드링커에서 비밀스럽게 샤잠하며, 포도가


① 어릴 적 신포도는 칠교 놀이의 정답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별자리를 보면서 ‘저게 황소라고?’ ‘저게 저울이라고?’를 질문하는 아이와 비슷했다. ‘소’ 그림을 조각으로 짜맞추라고 하는데 정답을 맞춰봤자 소 그림처럼 보이지 않아서 당황했던 기억도 신포도의 칠교 조각 중 하나로 남아있다. ② 물론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서산에는 스타벅스도 들어왔고, 터미널 앞에는 올리브영이 생겼다. 고등학생이 될 때쯤 맘스터치가 생겼고, 서산을 떠날 때쯤 맥도날드가 생겼다. 가본 적은 없지만 CGV도 생겼다고 한다. ③ 데이빗 보위가 외계인 역할로 나오는 영화 <지구에 떨어진 사나이>에는 9개의 TV를 동시에 보는 외계인이 등장한다. 채널의 리니어함을 동시성으로 번역해낸 장면이다. 외계인은 TV를 정말 저렇게 보나? ④ 신포도는 거의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옷방’이 ‘오빵’으로 쓰이는 게 아닐까 ‘상상’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그곳에 옷을 두지 않고 본인을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오빵’이라는 넘겨짚기는 어떤 논리적 생각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⑤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306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3

유유민


포도에게

최근에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 모든 취미생활 모임을 망라했을 때 가장 질나쁜 남자들이 모이는 곳은 단연 영화 동호회이며, 이는 문화적 고상함을 전시하고 싶은 남자 가운데 자본을 지불할 의지가 없거나 지불할만한 자본이 없는 이들이 쉽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거야. 뜨끔했어. 저 남자들처럼, 설마 나도 그러한가?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동기는 어쩌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표면적으로 나 역시 영화라는 매체에 현혹되어서, 혹은 글쓰는게 즐거워서, 그것도 아니면 앞서 언급한 남자들처럼 교양을 가장한다거나, 돈을 들이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누리기’ 위해서 이렇게 성장해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애초에 선택지라는 것이 많지 않았으니까. 그들에게는 시립 교향악단의 무료 공연, 미술관, 연극, 콘서트, 오페라 같은 즐비한 선택지가 있었잖아. 그 안에서 영화를 골랐던 거지. 너무 비싸거나, 너무 번거롭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게 더 즐겁다는 각자의 이유로 말이야.

나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집 안에서 보냈어. 중증 천식때문에 외부의 공기는 적대적 환경에 가까웠거든. 그때문인지 나는 집 바깥의 세계보다 집 안의 사물들에 둘러싸여 지냈고, 어쩌면 그것들이 나를 대신 교육했다고 느껴. 너의 편지를 읽으며 “서산시 석림동보다 서산시가 더 좁게 느껴졌고, 서산시 석림동보다 석림동 한 아파트의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다”는 대목에서는 거의 탄복했어. 나의 지리적 감각 또한 그러했기에.

처음 보냈던 편지에서 우리 집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 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말했지. 나의 어머니는 중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퇴직교사 출신으로 모든 살림을 전담하고 나를 24시간 돌보면서 틈틈이 글을 썼어. 집안에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책과 잡지, 레코드판,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가 있었지.

작은 마을에서는 문화 자본이 실제적인 자본과 혼동되는 경향이 있었고, 사실과 관계 없이 나는 넉넉한 형편의 아이처럼 취급되곤 했어. 자전거를 갖고 싶다는 내 생떼에 아버지가 대부분의 오디오와 레코드판을 팔아치워야만 했는데도. 하지만 항변하기에는 영 이상한 일이잖아.

2004년의 여름방학에, 나는 인생 최초로, 부모의 차를 통해서가 아닌 내 두 발로 이 작은 마을을 벗어나보기로 결심했어. 너의 말처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은 필연이나 강제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기이할 만큼 비효율적인 동선일지라도 남의 도움 없이 내가 직접 움직여보는 일은 아름다웠어. 양성리에서 30분을 걸어나가 장사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동서울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강변역에서 염창역까지 다시… 아마도 일곱 시간 정도가 걸렸을 거야. 정차한 휴게소에서 친구에게 원티드의 멤버 서재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후로 서울에 도착할때까지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나.

서울에 도착한 나는 고모 댁에 묵게 됐어. 완전한 자유를 갈망했지만 중학교 1학년이 혼자서 숙박업소에 묵는 일은 아무래도 무리였기 때문에 최소한의 타협을 했던 거지. 첫날은 하루종일 고모의 가이드에 따라 서울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서울특별시 전역을 관광했어. 동대문 에이피엠에서 연두색 팔부바지를 사고, 경복궁 근정전을 걷고, 이태원에서는 버거킹 와퍼를 먹었지. 조카가 첫 서울 여행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길 바랐던 고모의 기획이었지만 배은망덕한 사춘기의 유민은 사실 ‘친척어른과 함께 관광객처럼 다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어. 태생부터 서울에 거주했고 지하철이 익숙한, 어디를 가도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는 지은이들(나는 ‘지은’이라는 이름이 가장 서울적인 이름이라고 지금까지도 믿고 있어)처럼 굴고 싶었거든. 일정을 마치고 조금 뾰루퉁한 상태로 고모의 아파트에 도착한 나는 세진언니의 방에 짐을 풀고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어. 우리 집에는 나오지 않는 케이블 채널들을 탐방하면서. 니켈로디언, 채널V, MTV… 그리고 동아TV라는 채널에 이르러 나는 우측 상단에 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섹스 앤 더 시티!

대낮의 굴욕적이었던 투어버스 관광을 만회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걸까?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설렘을 느끼며 손톱을 마구 뜯었던 것 같아. 저런 제목의 드라마가 세상에 존재한다니,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기로서니, 저렇게나 마구잡이로 살 수 있다니, 근데 너무 멋지다?! 캐리와 미란다의 삶을 동경하고 어른이 된 내 모습과 겹쳐보게 된다는 점에서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1998~2004)는 AV 같은 저급한 포르노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화끈한 콘텐츠였어.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퇴근한 세진언니가 들어왔고, 나는 돌덩이처럼 얼어붙었어. 망했다. 나의 끔찍한 욕망을 들켰어. 이제 나는 가문에서 쫓겨나 뒤주에 갇히고 말 거야. 섹스칼럼니스트는커녕 처녀귀신으로 죽게 될 거야. 그런 말도 안되는 공포에 정신이 아득할 무렵 세진언니가 반가운 표정으로 외치는 거야.

        “저거 재밌지!!?!”

고모의 둘째딸인 세진언니는 당시 아시아나항공 국제선의 객실 승무원이었고, 내가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범위 내에서 세련미와 멋의 최첨단에 위치한 도회적 인물이었어. 대단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언니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엿보곤 했거든. 크림파스타를 처음 맛보기도 전에 언니에게서 이태리 정통 카르보나라는 유크림이 아닌 달걀 노른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걸 배웠고, 언니가 가끔씩 고모를 통해 주었던 조미땅콩 벌크나 남보라색 기내용 담요나 짜먹는 볶음고추장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국을 상상하게 했고, 고모 댁 욕실 선반을 가득 채운 해외의 코스메틱들은 어지러운 꽃향기를 풍겼어. 올리브영도 시코르도 없던 시절에, 언니의 실크테라피 오일을 동전크기만큼 짜서 몰래 머리 끝에 바르던 미끌거리는 감각이 서른 살을 한참 넘긴 지금까지도 생생한걸. 그날 세진언니의 외침은 나를 도시 생활에, 그리고 어른이 되는 통로에 발들여도 된다는 승인과도 같았어.

너 역시 섹스 앤 더 시티가 중요한 임팩트였다는 것을 읽고 당장 이 얘길 해주고싶어서 얼마나 손이 근질거렸는지. 우리는 엄밀히 말하면 동년배도 아닌데 신기한 일이야. (이 드라마의 제목이 뭐, “시티 오브 걸스”라든지 “키스 앤 더 시티” 였더라면 가당치도 않았을 일이지!)

그날 세진언니의 승인은 내가 물리적으로 상경하기 이전까지 계속 어딘가 아득히 먼 곳에서 나를 호출하고는 했어…

2010년,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 원서를 넣지 않고 곧장 재수를 하겠다고 선언했지.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재종반은 꿈도 꾸지 못하고 베란다에 딸린 작은 방에서 시작했던 독학재수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됐어. ‘동네의 우등생’이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는 소문을 힘닿는 데까지 유예하기 위한 요행이기도 했지만, 슈퍼마켓에 가기 위해서도 30분을 걸어나가야 하는 이곳에서, 그 미약한 문화자본마저도 학력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한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달았던 것 같아. 늘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는데도 타고난 머리 덕에 결국은 SKY에 갔다’ 같은 신화적 수기를 써서 수만휘 같은 카페에 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어.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나약했고, 죽도록 공부하기 싫었던 내 성정을 의지가 압도하는 멋진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줄창 인터넷을 하거나 잠을 자거나 폭식을 하며 현실을 도피했을 뿐.

사수(맙소사)를 시작할 즈음에는 집안 사정 탓에 인근의 중소도시로 이사를 했고, 시립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어. 내가 수능 장수생이라는 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았어. 포항 ‘시민’이 된 것! 그것만이 나에게 짜릿할 정도의 해방감을 주는 사건이었어. 영화관, 서점, 스타벅스, 맥도날드가 있는 동네를 시내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장장 21년만에 처음으로 겪어보는 혁명적인 기쁨이었거든. 나는 더이상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도시를 누비며,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인프라를 누릴 수 있게 됐어. 수능특강 따위가, 자이스토리 따위가 눈에 들어왔겠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매일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까지의 시간에 공부를 한 것처럼 가장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양심적 의무가 있었고, 엄마가 출근하면서 나를 시립도서관에 데려다 놓으면, 열람실에 책가방을 던져두고 곧장 영화관으로 직행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어.

나는 원래 영화와 큰 혐의가 없었어. 천만영화쯤은 되어야 간신히 의무적으로 감상하는 정도였거든. 그래서 영화관에 매일 출석하게 된 것은 그냥 체크카드 세 개를 굴비로 엮어서 할인혜택을 활용하면 영화를 편당 삼사천원에 볼 수 있었던데다, 영화를 두 편 보고 점심까지 먹으면 무려 다섯 시간 이상을 때울 수 있다는 개뼉다귀같은 이유였지.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는 것? 광고가 끝나고 상영관 불이 꺼지면 비로소 긴장을 풀고 스크린에 빠져들곤 했어.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혼자서 두 개의 영화를 연속으로 보고 가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라도 났는지 신작의 첫 상영이 끝나면 영화관 직원들이 다가와서 영화가 어땠는지, 어떤 장면이 재미있었는지 물어보기도 했는데, 창피하기도 우쭐하기도 한 심정으로 짧게 답했던 기억이 나.  

그 다음이 문제였어. 매일 시간을 때우려면 계속해서 새로운 영화가 나타나야 하는데, 볼 영화가 소진된 거야. 돈도 없는데 똑같은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건 낭비같고 말야. 포항에는 세 개의 영화관–CGV 북포항, CGV 포항, 롯데시네마 포항점–이 있었는데 사실상 프로그래밍은 대동소이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제법 절박했기 때문에 CGV 공식 홈페이지에다 건의사항을 써서 보냈어.
유민: 저는 CGV 북포항과 포항 지점을 주로 이용하는 관객입니다. 지방 지점에도 다양한 영화를 형식적으로나마 상영해주시기 바랍니다. 수요가 많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소도시에서도 박스오피스 순위권 밖의 영화를 볼 기회가 필요합니다. 부디 숙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GV 고객센터: 고객님의 건의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부처에 적극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소중한 의견 감사합니다.
놀랍게도 나의 건의는 일시적으로나마 받아들여졌고, 상영시간표에는 갑자기 포항에 상영될리 없는 이상한(?) 아트하우스 영화들 여러 편이 평일 하루 한 타임, 혹은 이틀에 한 타임 수준으로 포진되기 시작했어. 상영관에는 대부분 나 혼자였고, 그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상당한 죄책감을 느꼈던 기억이 나. 그래서 나는 CGV가 무슨 뻘짓을 해두 비난하기가 힘들어. 왜냐면 진심으로 고마웠거든. 어디에 생색내거나 전시하지도 않고 조용히, 가능한 최선을 몽땅 다해준 거잖아. 시네마테크나 지역 독립영화관, 예술영화관 같은 곳에 가면 되는 거 아니냐고? 당치도 않은 소리. 그런 공간조차 대부분의 소도시에는 허락되지 않아. (사실 서산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말해봤어.)

그럼에도 월말이 되자 볼 영화가 바닥났고, 마침내 원정을 시작하게 되었지. 주말마다 ‘머리를 식히러’ 라는 미명 하에 부산으로, 대구로, 서울로 떠나기 시작한 거야.
[2012년 11월 4주차 주말 계획표]
7:20 포항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으로 이동 (1시간 40분)
9:00 도착, 지하철 타고 대연역으로 이동 (1시간)
10:00 대연역 앞 편의점에서 밥먹고 국도예술관으로 도보이동 (20분)
10:20 국도예술관 - <심플 라이프> 관람
12:00 버스 타고 무비꼴라쥬 서면으로 이동 (30분)
12:30 건물에서 간단하게 점심 때우기
12:50 무비꼴라쥬 서면 - <나우 이즈 굿> 관람
14:40 무비꼴라쥬 서면 - <내가 고백을 하면> 관람
16:30 서면에서 센텀시티로 이동 (1시간)
17:40 영화의전당 - <엔딩노트> 관람
19:40 부산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 (1시간)
21:00 부산에서 포항으로 이동 (1시간 40분)

※원정은 거의 당일치기였으며 대개 수기로 작성되었다. 위의 내용은 조금의 MSG도 치지 않은 22세 유유민의 실제 하루 계획이였으며, 매달 1~2회 비슷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당일치기였던 것도, 저렇게 비상식적인 동선을 소화한 것도, 하루에 저렇게 많은 영화를 봐야했던 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허락된 날, 허락된 지역, 허락된 시간 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고 돌아와야만 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나에게 주어진 조건들이 아니라 조건의 남은 자리를 따라 이리저리 움직여왔다는 생각을 해. 내가 원하던 두루뭉술한 덩어리–도시성, 예술적인 것, 어두운 곳, 집이 아닌 곳, 저절로 시간이 가는 곳–를 향해 움직이다 보니, 우연히 영화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티켓이었을 뿐. 만약 같은 값에 매일매일 오페라를 볼 수 있었다면 나는 어쩌면 오페라광이 되어있었을지도… 하지만 그런 세계는 나에게 존재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도시의 영화동호회 남자들이 비겁한 이유는 그들이 영화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야. 무수한 선택지가 있었음을 은폐하고, 마치 영화야말로 순수한 열정의 대상으로 처음부터 유일하게 존재했던 것처럼 포장하기 때문인 거지.

해피헤비드링커, 집, 검진센터로 향하는 택시 등등에서
유민 




① 서울의 인기있는 스폿들을 거점으로 운행하는 순환버스 관광상품. ② 당시 세진언니는 “올해부터 이코노미 짱이 되었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객실이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로 나뉜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유민에게는 거의 암호처럼 들렸다. ③ 천연 실크 단백질 성분을 기반으로 한 미국 프로페셔널 헤어 케어 브랜드. 정식 명칭은 바이오실크 테라피. ④ 당시 KB국민카드에는 한 개의 카드만 최소 전월실적을 달성하면 다른 카드까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혜택을 줄줄이 엮어쓸 수 있다는 점에서 굴비카드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⑤ 당시 유민의 일기장과 기억에 의존해 재구성한 내용이며, 실제로는 아마 상당히 더 ‘안경척’ 스럽고 호소문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랜 장수생활로 사회성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