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1

유유민


엿새 전 우리를 태운 김포발 제주행 진에어가 이륙하던 때에 사실은 미약한 난기류가 있었어. 옆자리에서 너는 이미 잠들어 있었으니 몰랐을 테지. 너는 상당히 몸을 구기고 있었지만 왜인지 관절이 많은 동물, 이를테면 기린의 휴식처럼 안전해 보였기 때문에, 굳이 너를 깨우는 일은 외국에 지어진 리조트의 설계 오류에 개입하는 것만큼이나 불필요하게 느껴졌어. 그리고 사실 기린은 관절이 많지 않대. 목뼈가 유난히 긴 것뿐이래.
난기류 시 승무원 안전 수칙. 서비스를 즉각 중단하고 점프시트 혹은 가장 가까운 빈 좌석에 착석하시오.기장이 안내방송으로 화장실 출입을 금지하자마자 기내 조도가 필요 이상으로 낮아졌는데, 이것 역시 지침이었나? 그건 잘 모르겠어. 우리를 마주보는 방향의 간이의자에 앉은 스튜어드가 눈을 감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위아래로 맥없이 흔들렸고, 평온해 보였어. 전날의 수면 부족과 새벽에 공항역사 던킨도넛에서 네가 사다준 커피의 부정교합 탓인지 나는 엄청난 각성 상태로 캐럴라인 냅의 책을 읽었는데, 노랗고 침침한 미등 아래에서 몇 개의 문장은 이상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 보였어. 요컨대, 그녀가 대학에서 19세기 영국 역사와 문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그 분야에 매혹된 것이라기보다 그 과목의 교수 몇 명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라는 회고 같은 것들. 나는 곧장 1999년의 교실로 돌아간다.

     나는 아홉 살이었고 교내 가을 백일장에 막 시를 써낸 참이었어. 옥계 계곡의 바위산 풍경에 대한 시였어.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이원상 선생은 금테 안경이 코 위에서 비뚤어진 줄도 모르고 나를 칭찬하는 데 한 교시 전체를 할애했어. 나름 운명적인 순간이었으므로, 어디에도 말한 적 없지만 나는 여전히 「옥계 계곡」의 첫 행을 기억해. 이원상 선생이 삼십 분이 넘는 시간동안 그 구절을 열 번도 넘게 반복해서 읊고, 그 사이에 이야, 크으, 히야, 같은 감탄사를 배치하며 백일장을 과장된 성역처럼 조성했기 때문이야. 

      “검정 회색 어우러진! 이야, 어우러진! 크으, 바위산 밑, 바위산, 히야.”

감탄사가 과하게 개입되는 것 같지 않아? 문장의 원형을 뚜렷하게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솔직히 약간 의심스럽기도 해. 사실 처음부터 내가 쓴 문장 안에 이야, 나 크으, 가 있었다면? 우유 당번, 철제 사물함, 학급 문고, 태극기와 대걸레와 책걸상이 즐비한 맨부커 시상식을 개최한 것이 나였다면? 선생은 그저 내가 쓴 것을 곧이곧대로 읽었던 것 뿐이라면?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닐지도 몰라. 사실 글 쓰는 데 이골이 난 어른이 된 채로 그 구절을 다시 떠올렸을 때, 나는 이 어린이에게서 어떤 재능이나 영특함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혹시 내 기원의 목록에 대해서 자세히 말한 적이 있었던가?
기후적 항목: 뒷산 군부대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헬리콥터 소리, 경운기 소리, 오토바이 소리, 한맺힌 귀신의 비명 같은 바람소리, 해풍에 전신주 흔들리는 소리, 새벽 닭 울음 소리, 고양이들의 혈투 소리, 짠 바람 냄새, 볏짚을 태우는 냄새, 굴뚝 연기 냄새, 송진 냄새, 올챙이 냄새, 비온뒤 축축한 흙 냄새, 생선 말리는 냄새, 소똥 냄새, 트럭 짐칸의 디젤 냄새

행정적 항목: (이 분류 일체는 비교적 번화한 옆 마을에만 속해 있다) 군부대 경계 철조망, 방역차, 면사무소, 파출소, 약방, 정육점, 홍콩반점, 포항반점, 뉴멕칸통닭, 스머프치킨, 버스정거장, 초등학교, 중학교, 사택, 오락실

생태적 항목: 꿩, 까치, 참새, 솔개, 고양이, 해파리, 밍크고래, 뒷산의 식용견사에서 도망쳐나온 도사견들, 소, 닭, 청개구리, 두꺼비, 고추잠자리, 배추흰나비, 귀뚜라미, 감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미역, 다시마, 벼, 쑥, 강아지풀, 맨드라미, 매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신 뒤 하얀 포터트럭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이장 할아버지, 외도가 발각되자 적반하장으로 부인을 두들겨패 입원시킨 교회 집사, 목이 쉰 할아버지들, 불콰해진 할아버지들, 깡마른 할아버지들, 허리가 굽고 표정이 맑은 할머니들, 뒷짐을 지고 종종걸음을 걷는 할머니들, 나물 캐는 할머니들, 넋나간 할머니들…
나는 가구수가 고작 일흔 가구에, 슬레이트를 대강 덧댄 기왓집들이 느슨하게 줄지어 있는 리 단위 시골마을에서 자랐어. 해안가에서 일키로미터정도 더 걸어들어가면 나오는 곳이었지. 대부분의 인구가 노인이었고, 90년대에 태어난 어린아이의 등장은 구조의 복구라기보다 결손된 항목의 갑작스러운 복원같은 것이었어. 인구고령화가 가속화되기 이전에는 수많은 아이가 있었겠지. 6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 이미 오래 전에 마을을 떠났고, 그들이 낳은 어린아이들은 모두 도시에 속해 있었을 거야. 1998년에 부녀회장의 앞집으로 장한빛과 장한별이 이사오기 전까지 나는 그 마을에서 유일한 어린이였고, 모두가 나를 알고 있었고 다정하게 ‘민이’라고 불러주었어. 연고 없는 중국집에 전화를 해서 “양성리 민이네 집이요” 해도 이십 분 뒤에 집앞으로 짜장면이 왔어. 그 정도로 작은 곳이었지.

      또한 마을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소 여물을 주거나 지게를 지고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거나, 논에서 벼를 심고 미꾸라지를 건져내고, 나머지는 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아다 시장에 나가서 팔았어. 이것이 동해안 어촌계의 표준적인 직업활동이었으니까. 우리 집은 거기에서 완전히 예외적인 경우였는데, 이 얘기는 다음 편지에서 더 해볼게.

     포도, 너 역시 공감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군지역의 심사 체계는 아주 좁잖어. 그날의 백일장 이후 나는 글짓기대회뿐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래밍(비주얼 베이직과 C++), 수학 경시대회, 사생대회, 급기야는 발명대회에 웅변대회까지 온갖 잡다한 콘테스트에 반강제로 출전하고 상장을 마구 쓸어담기 시작했어. 나는 결코 대단히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는데도 그랬어. 당시 이원상 선생의 심정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어. 사실 나의 자아와 삶의 방식을 무려 스무남은 해동안 이끌어온 가장 큰 욕구의 원천이 고작 담임교사의 칭찬이었음을, 그러니까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 외주였음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거든. 그럼에도 그날의 공기압이 나를 계속해서 어딘가로 밀어왔음은 자명해.

짙은산에서, 유민

P.S. 이 일기를 쓰는 동안 떠올린 사실들
1) 초등학교 때에는 안전상의 문제인지 스테이플러 사용이 권장되지 않았고, 학생들은 원고지의 좌측 상단 모서리에 풀을 발라 붙이곤 했다.
2) 나의 기원인 영덕군 남정면 양성리 126번지의 파란지붕 집은 2018년에 철거되어 이제 고속도로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남영덕하이패스 톨게이트’라는 삭막한 이름의, 장소조차 아닌 어떤 것이 되었다. 건설공사 당시 우리집터였던 지층 아래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왜구 방어용 성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인근에 신설된 휴게소 푸드코트에서 통오징어라면을 판매한다. 오징어의 원산지는 원양산이다.
3) 자기연민 안 하기 개 어렵다. 세르주 다네 대단해~



① 경상북도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에 위치한 2km 길이의 계곡. 오늘날에는 노지 캠핑 명소로 입소문이 나있다고 함. ②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미산로29안길 27. 연남동에서 아마도 가장 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