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7호 > 에디터스 레터 >
인용과 감사
👤유유민
최근에 저는 AI 없는 삶에 대해 생각하고는 조금 아득해졌습니다. 직장에서 해외 파트너사와의 심도 깊은 크리에이티브 회의에 홀로 내던져지거나, (영어였다면 이런 말도 안 했을 겁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제한 시간 내에 너무 많은 업무들을 해내야 했거든요. 티로나 캐릿 같은 노트테이킹 서비스나 AI 동시통역 앱들, NotebookLM이나 릴리스가 없었더라면 저는 아마 두 주 전쯤에 이미 해고당했을 겁니다. 사실 저는 업무에서 AI를 활용한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가 궁금하다면 돌아온 교환일기, “인공지능 에이전트 몰래 하는 교신”을 읽어 보세요. 어쨌든 간에, 이번에야말로 가혹한 일정과 컨디션 탓에 대놓고 AI 도구 사용하는 모습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상사들은 일정 내내 제가 사용하는 툴에 큰 흥미를 보이고, AI 활용을 가장 잘하는 직원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노출은 그야말로 ‘야노’에 가까운 수치심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제가 들킨 치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AI를 잘 쓰는 직원에게 상을 주는 세상인데요. 저는 무엇이 부끄러운 것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렴풋이 깨달았습니다. AI의 도움으로 불가능할 뻔했던 일을 겨우 해낸 것이 아니라, AI가 없었다면 주어지지도 않았을 조건의 일을 맡은 거란 걸 말이에요. AI가 아껴준 나의 시간은 나의 여가시간으로 돌아오는 대신 추가 생산 능력으로 즉각 압류당하고 말았습니다. 전 뭘 아끼고, 뭘 감축한 거죠? 적어도 그것이 저의 영역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AI가 가져온 가능성에 쉽게 고무됩니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Isometric NYC
몇 달 된 일인데요. 아이소메트릭뉴욕을 만든 앤디 코에넨의 제작일지를 보면서 저는 AI의 순기능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이소메트릭뉴욕은 직접 코드를 입력하는 일을 최소화하고, AI만으로 뉴욕 전체를 거대한 픽셀 지도로 만들어낸 1인 프로젝트입니다.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제작비와 인력이 천문학적 수준이었을 규모의 작업이죠. AI가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대량 반복 작업을 가능케 해준 겁니다. 이것은 코딩이나 개발 지식이 없는 그 누구라도 사적이고 쓸모없고 멋지고 거대한 욕망을, 조직이나 VC나 외주사의 도움과 허가 없이도 실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께서 어젯밤 Claude로 만들어 본 당신만의 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앤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좀 길 수도 있어요. 제가 겁나 감명받았거든요.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즐거웠던 점은 생각하는 속도로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 마치 무한한 도구 상자를 가진 것 같습니다. [...] 제 생성 앱 코드가 얼마나 엉망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명령형 자바스크립트와 스파게티처럼 얽힌 이벤트 리스너로 가득 차 있죠. 제가 직접 손으로 쓴다면 절대 이렇게 쓰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 저렴하고 빠르다는 점이 단점을 충분히 상쇄해 줍니다.
저는 10년 동안 전자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말 그대로 수천 시간을 화면 속 작은 상자들을 이리저리 끌어당기는 데 보냈습니다. 창작 활동의 상당 부분은 이런 지루하고 고된 작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이건 창의적인 게 아니에요. 그냥 고된 노동일 뿐이죠. 애니메이션, 영상, 소프트웨어 등 모든 창작 분야는 이런 지루한 작업들로 가득 차 있어요. 물론 이런 수작업 자체가 직관력을 갈고닦는 과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제 생각엔 그저 '그럴 만도 하죠'라는 식의 억지 주장일 뿐이에요. 결국 예술의 질은 당신의 결정의 질에 달려 있어요.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느냐는 당신이 얼마나 진심으로 관심을 갖고,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일 뿐이죠.
이 프로젝트는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생성형 모델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이 정도 규모의 작업을 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뉴욕시의 모든 건물을 픽셀 아트로 손으로 직접 그릴 만큼 큰 규모의 아티스트 팀을 고용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AI 에이전트는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창의적인 프로젝트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 버튼 하나만 누르면 콘텐츠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콘텐츠는 상품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가치는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점이 제가 인공지능과 창의성에 대해 낙관적인 가장 큰 이유입니다. 어려운 부분이 쉬워지면,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사랑'이 되니까요.①
오 마이 갓. 잇츠 소 뷰티풀, 이즌 잇? 여러분이 꼭 봤으면 하는 앤디의 또 다른 글이 있는데, 에디터스 레터를 발췌문으로 가득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직접 접속해 읽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어요. 딱 한 문장만 맛보여 드리죠. (라고 썼더니 신포도가 구글독스에 “네 문장이에요”라는 메모를 달아두었더군요… 네 문장을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소프트웨어는 도구이고, 도구의 주된 역할은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 소프트웨어 산업 혁명은 블룸 박사와 수천 명의 동료들에게 마치 마법처럼 갑자기,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도구를 필요에 따라 만들어낼 수 있는 엄청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이는 마치 전 세계 모든 암 연구자에게 넷플릭스 구독료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하룻밤 사이에 세계 최고 수준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팀을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②
앤디는 AI의 등장을 소프트웨어 산업혁명에 비유합니다. 허튼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럼 뭐, 지금의 거부감은 다 그냥 과도기의 성장통이니까 눈 질끈 감고 버티다 보면 지나갈 일인가? 그건 아닙니다. 산업혁명과 그 이후의 모든 기술혁신 역시 사진, 영화, 전축, 인쇄, 샘플링, 디지털 편집 같은 것들을 등장시키면서 창작과 저자의 지위를 흔들긴 했지만, 창작이라는 것은 기묘하게도 오뚝이 인형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아무리 흔들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신기술이 횡행하고 까불어봤자 창작의 근원에는 인간의 선택이, 인간의 표현이 남아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창작과 예술의 핵심만큼은 기술이 손 뻗치지 못할 자리에 있다는 믿음이요. 그러나 LLM의 등장은 그 마지막 믿음에 직접 접속하고 젓가락으로 뇌수를 휘저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네… 그래서 AI가 가져올 산업혁명급 가능성에 몹시 흥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개같은 것 같습니다…
2026년의 초여름, 저와 신포도는 힘에 부칠 정도로 바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에디터스 레터가 인용 투성이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2의 ‘차지 기념일’이라 할 만한 비밀스러운 변곡점을 넘겼고, 각자 발리며 강릉으로 여행을 다녀왔으며, 포미아트동 선생님들과 함께 ‘아주 사적인 지도 만들기 워크숍’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데다, 8월 8일 대구 최고의 영화 큐레이팅 서점 이미지북을 점거할 준비까지 착착 해내고 있답니다. 착착 해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어김없이 몇 개의 글은 늑장 업로드됩니다. (아니, 진짜로 바빠 죽겠다니까요?) 교환일기 3편과 4편은 8월 둘째주에, 5편과 6편, 그리고 이달의 컴필레이션 “AI는 이해 못할 음악”은 8월 셋째주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③
UFO의 제4종 근접조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
『월간차지』
7호는 AI의 시대를 온몸으로 통과하고 있는 불우한 자들의 고민과 고뇌와 때로는 희망과 걱정으로 가득합니다. 재미있고 섬뜩하고 감동적인 글로 참여해 주신 금동현 평론가와 이광호 평론가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으스스한 점괘로 우리의 한 달을 지탱해 주시는 레지나 펠렌지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AI+영화 소용돌이 세미나 대화록은 앞으로도 수 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초여름의 금요일 밤을 공간차지와 함께해 주신 8명의 인간 여러분과 3종류의 LLM 에이전트 여러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사실 AI는 차지의 모든 일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수만 가지 대화거리를 남겼습니다. 그 점에 감사드립니다.
① About Isometric NYC (https://cannoneyed.com/projects/isometric-nyc) 중에서 발췌 후 기계번역
② The Software Industrial Revolution(https://cannoneyed.com/essays/software-industrial-revolution) 중에서 발췌 후 기계번역
③ ‘처음이랑 말이 다르지 않나?’ 라고 생각한 당신, 예리하십니다. 8월 4일에 조금 현실적으로 업로드 일정을 조정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