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운에 맡기고 싶다면...
Get Lucky ☁
월간차지 2호 > 스테이플스 > 이달의 컴필레이션
나의 사적인 힙합 연대기
👤월간차지 편집부
유튜브 재생목록
Track 1. Remy Shand - Burning Bridges (유민’s Pick!)
Track 2. Blue - One Love (유민’s Pick!)
Track 3. Blaque - As If (유민’s Pick!)
바야흐로 2002년, 아빠의 PC통신 친구인 ‘백두 아저씨’의 집에 놀러 갔어. 아빠와 아저씨가 심도 깊은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그 집의 차녀, 열여덟 살 은혜 언니의 방에 떠맡겨졌어. 언니도 곤란했겠지. 처음 보는 초등학생을 몇 시간씩이나 책임져야 한다니. 어색한 공기 속에 침대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던 나에게 언니가 툭 던진 한마디. “너... 알앤비 좋아하니?”
나는 엉겁결에 “약간요” 라고 대답했고, 그건 실수였어. 휴화산 같던 진성 알앤비 오타쿠를 자극하고 만 거지. 언니가 CD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블루Blue의 ‘One Love’가 흘러나왔고, 우연히도 들어본 적이 있는 노래였고, 내가 홀린 듯 싸비를 따라부른 순간부터 그 방은 더 이상 평범한 여고생의 방이 아니었어.
‘블루’를 아는 초등학생을 만나 고무된 은혜 언니는 선반에서 자기가 구운 컴필레이션 CD들을 왕창 꺼내서는 별안간 청음회를 개최했어. 1번 트랙 블라크Blaque의 ‘As If’가 끝나고, 2번 트랙 레미 션드Remy Shand의 ‘Burning Bridges’가 시작되던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어.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1 중에서]
Track 4. 휘성 - With Me (유민’s Pick!)
Track 5. 빅마마, 거미, 세븐, 휘성 - Color Of The Soul Train 공연 실황 (유민’s Pick!)
나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고(그 사랑은 무려 15년간 지속되었다), 휘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빅마마, 거미, 시스코Sisqo와 크렉 데이빗Craig David을, 급기야는 그의 SNP 동료였던 버벌진트와 피타입의 앨범까지 찾아 듣기 시작했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1 중에서]
Track 6. Double K - Nu Skool (유민’s Pick!)
입원실 천장에는 500원을 넣으면 2시간인가 동안 전원이 들어오는 텔레비전이 달려 있었는데, 나는 수시로 엠넷과 KMTV 같은 음악채널을 켜놓곤 했어. 그런 채널은 대개 최신 뮤직비디오만 줄창 틀어주면서, 실시간으로 문자를 받아서 화면 최하단에 랜덤으로 송출해 주었거든. 내가 보낸 문자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뮤직비디오를 보는 게 낙이었단 말이지. 그 겨울의 인기 차트에는 유난히 힙합 음악이 많았어. 지누션의 ‘전화번호’, 드렁큰타이거의 ‘편의점’, 이현도(a.k.a. D.O.)와 조PD, 김창렬, 에픽하이, 주석, 바스코, Young GM, 에릭의 ‘힙합 구조대’까지. 사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엄청 새로운 건 아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난생처음 보는 스타일의 랩퍼가 등장했어. 그는 다름아닌 ‘더블케이’였는데...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1 중에서]
Track 7. FT아일랜드 - 마중 (포도’s Pick!)
Track 8. Oasis - Wonderwall (포도’s Pick!)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FT아일랜드에 대한 관심을 끊었어. 그때부턴 ‘진짜 밴드’건, 핸드싱크건, 아이돌이건, 그루피, 락스타, 인디밴드건… 어찌 되든 상관없었어. 괜찮아! 나한테는 자비에 돌란이 있으니까. 저 먼 퀘벡에서 찾아온 또 다른 사랑의 상대. 서울까지 올라가 자비에 돌란이 연출한 <마미>를 봤는데, 아주 중요한 순간에 오아시스의 ‘원더 월(Wonderwall)’이 나오더라고. 정방형이던 화면비가 와이드하게 넓어지던 그 순간에. 주인공은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길을 질주하고.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2 중에서]
Track 9. 기리보이 - OUTRO (포도’s Pick!)
나는 이 노래의 가사들이 왜 좋았을까? 이유를 따지며 노래를 듣는 것. 학교에 가거나 싫어하는 애들과 친해지는 것. 친해지는 법. 잘나가는 애들 밑을 기는 것. 불안과 혐오로 응축된 교실 풍경을 이렇게 정확히 묘사할 수 있을까? 객관을 흉내 내거나,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않고도? 기리보이는 자기가 래퍼가 아니래. 사람들이 자신을 래퍼라고 잘못 알고 있어서 힙플에서 너무 거친 평가를 받는대. 그런데도 무대를 내려가는 게 너무 힘들어서 그냥 음악을 한다는 거야. 신화와 김동률, 휘성과 거미, 브로콜리너마저와 버벌진트, 앤덥과 스윙스의 자장 위에서.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2 중에서]
Track 10. 기리보이 - 좀 해 (포도’s Pick!)
지하철도 못 탈 정도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다는 기리보이의 애티튜드는 허세라는 래퍼의 바이브로 설명할 수 있겠지. 어떤 허세는 거짓말 같은데, 막 래퍼로 불리기 시작한 기리보이의 허세는 연민과 더 가까워 보여. 동물들은 위험에 처하면 강한 척하려고 몸을 과하게 부풀리잖아. 그 부풀린 몸을 볼 때야 그 존재의 나약함이 비로소 드러나고. 예전의 나는 누군가를 동경하기만 했거든? 근데 기리보이의 저 앨범을 듣고 있자면, 은밀한 연민을 느끼곤 해.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2 중에서]
Track 11. Double K- City Hunter (유민’s Pick!)
더블케이의 데뷔앨범 9번 트랙은 ‘씨티 헌터(City Hunter)’라는 곡이었어. 바스코와 길성준이 작곡자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3 중에서]
Track 12. DMX - Get It On The Floor (유민’s Pick!)
이후 나는 이름하여 ‘본토힙합(물론 나의 본토는 미대륙이 아님)’에도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문화를 이해해야 음악을 제대로 듣는 것이라는 소신 아래 A4 사이즈 화일에다가 힙합 용어나 배경지식 같은 것들을 스크랩해서 들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어. 쨍하니 파란 색에 도트무늬가 빼곡한 미키마우스 파일철이었는데. 사우스 코스트와 웨스트 코스트의 특징에서부터 라이벌 관계, 누가 누구에게 총을 쐈는지, 호미(homie)나 인 다 하우스(in da house)는 무슨 뜻인지 달달 외우려 했어. 투팍과 비기를 익혔고, 칸예, 나스, KRS-ONE을 좋아하게 됐어. 공부하다 보니 더 많은 소울 음악도 알게 되었지. 인디아 아리, 맥스웰, 트레이 송즈, 본 석스 앤 하모니를 좋아했고, 왜인지 디안젤로는 싫었어. 그렇지만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단연 DMX였어. 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어린 나의 니즈에 부합했던 거야. 그렇게 나는 그 꺼끌꺼끌한 언어들을 경전처럼 받들어 나가고 있었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3 중에서]
Track 13. 스윙스 - Gravity (Ft. 매드클라운, 기리보이) (유민’s Pick!)
당시에는 국힙이라는 말조차 없었어. 있었다 해도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해. 오늘날의 ‘국힙’이라는 기표에는 미미한 조롱과 자조의 기의가 젖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미 힙합이 부르조아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야. 00년대의 힙합은 처절한 언더그라운드의 세상이었잖아. ‘Gravity’의 가사에서 스윙스가 부르짖듯이, “그럼 왜 만드냐고? 하고 싶으니까, 음원차트에 올리고 싶으니까, 힙합을…” 힙합 차트 1위를 찍어봤자 멜론 종합 탑 100에도 들지 못하던 험지였으니까. 무엇을 부르고 무엇을 주장하든 그것은 장르의 투사로서 ‘어그로라도 끌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내지르는 발악 같은 맛이 있었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3 중에서]
Track 14. VASCO - 말달리자 (Ft. 천재노창, 씨잼) (유민’s Pick!)
그럼에도 ‘말 달리자’의 가사에서, 바스코는 자신의 가난하고 형형하던 과거와 현재의 ‘달라진 돈벌이’ 사이를 잇는 다리를 성실하게 놓고 있어. “Show Money 나간 뒤에 달라진 돈벌이, 부정하고 싶진 않아. Biggie가 한 말이 맞더군. (...) 나보다는 내 아들 섭일 위해 뭐든 사고픈 걸 사는 것. 내가 돈맛 보고 변하길 바라지? 돈만 보고 달려온 삶은 아니기에 (...) 꿈을 팔고 번 돈을 다시 더 큰 꿈에 집중 투자해. 그리고 거기서 번 돈으로 잘 봐, 내 주위 모든 사람...” 난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어. 나는 바스코가 분명히 그 과도기에서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정당화하고 합리화해 내야 한다는 일종의 켕기는 감정에 사로잡혀있다고 느꼈어. 왜냐하면 2절을 담당한 씨잼의 가사에서는 한국 힙합을 보릿고개부터 이끌어온 큰형님의 고뇌에는 관심도 없이 그냥 벌스 내내 돈자랑만 해대는 철딱서니밖에 보이지 않았거든. 바스코가 이 앨범을 발매하고 얼마 되지 않아 ‘빌스택스’로 랩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도 나는 그 켕김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을 했어. 과거의 바스코에서 현재의 빌스택스의 모습 사이를 잇는 급격한 커브, 그것을 억지로 윤색하는 대신 솔직한 타락을 택하겠다는, 위선을 떠느니 위악을 부리겠다는 모종의 결심. 진짜로 집에 지폐를 쌓아둘 만큼 부유해지지 않았다 해도, 빈지노나 도끼만큼의 돈을 모으지 못했다 해도, 그래도 더 이상 ‘바스코’일 수는 없으니까…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3 중에서]
Track 15. 천재노창 - 다음에 또 봐ㅇ (포도’s Pick!)
Track 16. 천재노창 - All Day (Ft. 타블로) (포도’s Pick!)
노창의 위악에는 3가지가 빠져 있어. 통일성, 방향 감각, 그리고 목적의식. 상황에 맞게 몸집을 부풀리는 것처럼 말하곤 하지. 동물의 부풀림보다는 인간의 부풀림에 가깝달까? 노창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대외적으로 어떻게 말해야 하고 비춰져야 하는지에 관해 잘 모르는 것 같아. 노창이 타블로와 함께 ‘All Day’라는 노래를 낸 적 있는데, 당시 했던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 혼란과 혼돈이 잘 드러나. 원래는 그 노래를 장기하나 유세윤한테 주려고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노창이 직접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거야. 근데 노창이 조금 망설였대. 본인은 힙합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 그래? 그래도 나 힙합하는 사람인데.” 근데 그 바로 앞에 이렇게 말하거든. “저는 원래 힙합만 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평소에 여러 가지 스타일의 곡들을 많이 만들어 놔요.” 인터뷰어가 바로 물어봐. “아니, 아까는 힙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거기에 대해서 노창은 여태 발표한 곡들이 힙합이고, 힙합을 준비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답변을 뭉개지. 사실 노창은 자기 자신이 힙합을 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도 잘 몰라.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어.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4 중에서]
Track 17. 천재노창 - 너 (포도’s Pick!)
여기에서 또 한 발자국 더 나아가자면, 자기 자신을 ‘힙합하는 사람, 혹은 힙합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과연 솔직한 걸까? 그런 깨달음을 바깥에 전시하는 것에 과연 본인을 포장하거나 납득시키려는 목적의식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노창의 저 통일성 없는 말에서, 한입으로 두말하는 저 문단을 읽으며 과연 진짜 솔직함은 어디까지 건드려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를 떠올렸어. 사실 노창은 자신을 정의하는 것도, 자신을 정의하지 못한다고 정의하는 것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않지. 그 실패와 중얼거림이 아주 낮고 단순한 수준의, 그렇기에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솔직함은 아닐까? 그리고 그의 가사들을 훑고 있자면… 굳이 인터뷰를 통과하지 않아도 ‘정의할 수 없음’에서 오는 열패감이 느껴지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4 중에서]
Track 18. 최엘비 - 주인공 (포도’s Pick!)
최엘비가 낸 ‘독립음악’ 앨범을 자주 들었어. 본인의 비겁하고 무력한 모습을 엄청나게 직선적인 문장들로 표현하거든. 자신의 비겁함과 무력함을 반성하면서도, 때로는 그 과거에서 추진력을 얻지. 기리보이의 크루에 들어간 것이 본인의 넥스트 챕터였다는 걸 인정하고. 친구였던 씨잼과 비와이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그때의 감정을. [...] 이 앨범에서 최엘비는 ‘아는 사람 이야기를 한다’라는 아주 투명한 레토릭을 쓰면서 자신의 고백을 열지. 나는 당당하게 ‘천재’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사람보다는 루피의 친구 역할에 만족하는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 때문일까? 나는 최엘비의 이 앨범을 아주 좋아하면서도 듣기 힘들어해. 너무 직선적이고, 진솔하고, 솔직하고, 그에게서는 어떠한 악의나 가장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나 역시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이 될 자신은 없어 부반장에 입후보했으면서,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는 체한 적 있기에.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4 중에서]
Track 19. 양홍원 - 하긴 (유민’s Pick!)
그래서 차라리 양홍원의 ‘오보에’ 앨범이 좋았던 것인지 몰라. 미숙하고 병들고 슬픈 모습을 포장지 없이, 꾸미거나 정제하지도 않고 대충 쓴 다음에, 그마저도 웅얼웅얼 뭉갠 발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그가 떠나간 연인 ‘현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다시 바로 세우고 싶어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고 생각했어. 이모(emo) 래퍼들이 상처받고 병든 자아 앞에 조명기를 설치한다면, ‘오보에’는 조명기 설치할 기력도 없어서, 암막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을 피할 힘도 없어서, 라꾸라꾸 침대에 누워 왼쪽 팔로 눈을 가린 채 발화하는 최후의 웅얼거림처럼 들렸거든. 그럴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면 2021년의 양홍원에게 미안한 일일까? 뭐, 괜찮겠지? 지금은 현주 씨 다시 만나서 루아 낳고 행복하게 사니까… 양홍원은 회사도 안 다니잖아… 돈도 많구…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5 중에서]
Track 20. 스윙스 - No Mercy + Buffalo 2012 (유민’s Pick!)
사실 스윙스는 누구보다 언어에 성실한 래퍼라고 생각해. 일단, 본인을 수식하는 a.k.a.부터가 ‘펀치라인 킹’이잖아. 언어유희를 즐기고, 일단 말을 잘 하고, 도치법 남발로 놀림받긴 하지만 조리 있는 사람이잖아. 스윙스는 대중에게 조롱받는 캐릭터가 되더라도 트렌드나 담론의 변화에 맞춰 말을 바꾸거나 정확히 피해 가는 쨉쨉이가 아냐. 청자들을 향해 영원히 증명과 설득을 지속하는 사람이지. 나는 항상 이런 ‘일자유식’한 사람들에게 끌려. 가치관이라는 말이 유명무실해진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인재들이니. 설령 이행기를 맞닥뜨렸을 때 죽일 놈이 되고 바보, 꼰대, 노인 취급을 받더라도,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 우직함(혹은 미련함)을 가진 사람들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언어로 인코딩하려는 사람이기에, 역설적으로 스윙스에게는 언어화되지 않은 잉여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거대한 댐만큼 많이 쌓였겠지. 그러니 저 비명은, 스윙스가 가진 방대한 어휘력과 논리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범람하는 소리가 아닐까? 둑이, 댐이 터져나가는 소리.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5 중에서]
Track 21. 스윙스 - 이겨낼거야 2 (Ft. GRAY) (유민’s Pick!)
자전거를 처음 배운 뒤 빠르게 달리는 데 혈안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아빠가 말했었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것보다 엄청나게 천천히 달리는 게 훨씬 어렵다고, 천천히 달리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대단한 고난도 기술이라고 말이야. 느리게 달리려 해보니 과연 그렇더군. 핸들을 잡은 나의 팔과 전신이 마구 흔들렸어. 자전거가 좌우로 미친 듯이 휘청거렸거든. 스윙스의 다짐에서 방점은 아무래도 ‘밀어낼 거야’도 ‘헐크처럼’도 아닌 ‘하나씩’에 있는 것 같아. 도미노만큼이나 빽빽하게 도열한 벽을, 타노스처럼 한 방에 파괴하고 폭파시키는 대신 하나씩 성실하게 차근차근 깨부수겠다는 마음. 수행자의 마음… 그 인고의 과정이 스윙스를 비명지르게 만들었겠지. 그것이 “끄아아아아아악!!!!!”을 노래의 미주처럼 달아놓은 연고일 거야. 마음이 아프다.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5 중에서]
Track 22. 이수린 - 그물, 덫, 발사 대기, 포획 (Ft. 양홍원) (포도’s Pick!)
<이빨, 다리, 깃발, 폭탄> 비슷한 그 노래는 언오피셜보이의 <그물, 덫, 발사대기, 포획>이야. 나는 <이다깃폭>을 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 즉시 <그덫발포>를 떠올렸지. 우리가 경험한 것의 선후관계가 뒤섞여있긴 하지만, 그것이 교환될 때 의 즐거움이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6 중에서]
Track 23. 염따 - 돈 Call Me (포도’s Pick!)
돈 없으면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가 마지막에 구라라고 덧붙이는 그의 밴댕이소갈딱지미가 느껴져? 근데 실제로 음악을 들으면 ‘구라야’가 거의 안 들리거든. 그 와중에 약간의 자존심을 챙겨본 거지. 너도 알다시피 염따는 이 노래를 낸 이후에 플렉스할 돈을 충분히 벌고, 더콰이엇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쇼미더머니의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하고, ‘아마두’라는 히트한 캐럴 힙합곡도 내고, 티셔츠도 팔고, 도지코인도 샀다가. 그래 티셔츠를 팔다가, 티셔츠를 열심히 팔다가… 마미손이 발굴한 미래 힙합 인재를 가로채려다 나락의 길을 걷게 됐지.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6 중에서]
Track 24. 염따 - 윽! (포도’s Pick!)
이 앨범에 수록된 노래 ‘윽!’에서 염따는 마미손과 황세현에게 사과해. 더콰이엇과 동급이 된 줄 알았다는 자기 자신의 쪽팔린 과거를 담담히 이야기하지. 최엘비의 회상이 과거 자신의 비겁함과 겁을 읊어나간다면, 염따의 회상은 그보다 지질하고 사소해. 사람들은 지나치게 겁을 먹는 사람에게는 어느 정도의 연민을 느끼지만, 과잉된 자신감과 나르시시즘을 뽐내는 사람은 까내리고 싶어하니까. 나는 염따의 삶과 진심 따위는 잘 모르고, 또 관심도 없지만 그가 83년생 무명의 힙합 뮤지션이었다가 금세 떠오르고, 또 자신을 향한 과도한 믿음으로 인해 나락에 가는 짧은 서사 정도는 알고 있어. 그 서사를 알고 나서 덕지덕지 괄호에 피처링진이 적히지 않은 트랙의 제목들을 볼 때의 감각, 화려한 싱글로 컴백하지 않고, 살아숨셔 연작을 담담히 내놓은 선택, 자신이 화려하게 컴백했다는 허세를 놓지 않은 염따의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지. 그 어떤 것도 포장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서. 대중에게 용서를 비는 것 같지도 않아서. 더콰이엇한테 다시 인정받고 싶다는 비겁함이 보이지 않아서. 그 앨범 전체가 ‘돈 Call Me’의 가장 끝부분, 의밋값 없는 추임새처럼 들리는 “구라야”의 태도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6 중에서]
Track 25. 블랙넛 - 0 (포도’s Pick!)
나는 [...] 조금 생각이 복잡해졌어. 일기에 라임과 음의 높낮이, 운율과 비트를 씌우면 그것은 힙합이 되는 걸까 하고. 하지만 스윙스와 염따가 알려주는 것처럼, 일기를 힙합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삶의 노출증을 감행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해. 뻔뻔함과 실수와 착오 같은 것들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이상한 짓들과 의미 없는 싸움을 지리멸렬하게 이어오면서. 블랙넛과 지미페이지(구 ‘고어텍스’)도 싸웠다고 하는데. 나는 그 사실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서로에겐 서로밖에 없었을 것 같아서. 사실 고어텍스보다는 블랙넛을 생각하면 조금 더 마음이 아픈데. 그건 내가 블랙넛의 삶을 더 많이 알고 있어서일까? 혹은 블랙넛의 콤플렉스나 괴로움이 나의 삶 어딘가와 맞닿아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인 걸까?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관한 교신 #6 중에서]
Tags: 2호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