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2호 > 교환일기 >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대한 교신 #5
👤유유민

1. 힙합과 일기장의 구분
사람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조차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 심지어 『데카메론』에서는 유서에도 거짓말을 쓴다고 하잖아. 어린 시절 매일 다이어리에 손글씨로 일기를 쓸 적에, 나는 언제나 이 일기를 볼 가능성이 있는 잠재 독자 가운데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어. 세진 언니이거나, 캐리 브래드쇼이거나, 심지어는 박찬욱일 때도 있었어. (‘가능성이 있는’ 이라는 조건에 위배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람 일 모르잖아…) 내가 느끼거나 겪었던 것은 활자화되면서 실제와 조금 다르게 적혔어. 너무 후진 것은 조금 덜 후지게, 너무 비참한 것은 조금 낭만적으로 윤색했어. 또한 나의 의지와 달리 비트겐슈타인적으로 이격되기도 했지.

이걸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거짓말보다는 편집에 가깝지 않을까. 편집보다는 인코딩에 가깝지 않을까. 인코딩보다는 번역에 가깝지 않을까. 번역보다는 요약에, 요약보다는 압축에 가깝지 않을까. 압축보다는 손실에 가깝지 않을까. 실재하는 4K, 아니 8K 이상의 나를 언어라는 저화질 포맷에 욱여넣는 다운그레이드에 가깝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깨지고 손실되는 픽셀들은 해마 속에 보존되다가, 운이 좋으면 활자와 함께 마들렌처럼 돌아오고, 운이 나쁘면 영원히 사라지게 되겠지.

내가 일기 속에서 얼마나 솔직해질지 각오해 봤자 일기라는,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로 채택한 시점에서 그 진실성은 희박해지잖아. 나의 괴로움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서술된 문장이 아니라 “으아아아아아아악!!!!!!” 이나 “꾸에에에에엑—-되에에엑?! 꿰에에엑!!!!” 같은 짐승의 사운드겠지. 단전에서 명치로 끓어올랐다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괴로움의 덩어리. 뜨겁고, 물컹물컹하고, 쉬익쉬익 소리를 내는 무형의 에너지, 그리고 그것을 통과시키는 나의 내장 기관과 피부…

역시나 그것을 박제하기란 쉽지 않겠어. 결국 그 울화를 어법에 맞게, 주어와 서술어로 가공해서, 활자로 적당히 기록하는 것만이 이 감정에 대한 기억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잖아. 너의 말처럼 원형의 감정이 스노우볼처럼 과장되거나, 반대로 축소된다 할지라도. 왜곡하지 않고서는 기록할 수 없으니까.

그런 것 같아. 나의 카오스를 세상의 코스모스로 바꾸려면 나는 나 자신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으니까. 감각하는 나, 비명 지르는 나를 서술하는 내가 관찰하고 맥락을 부여해 기록하는 일을 거쳐야만 일기라는 것을, 혹은 가사라는 것을 쓸 수 있으니까. 자기반영적 가사를 쓰는 이상, 힙합 역시 일기장까지는 못 되더라도 최소한 블로그 포스팅이나 인스타그램 피드는 될 수 있을지 몰라. 나를 주시하는 약간 명의 사람들을 흘끔흘끔 의식하면서… 어느 정도의 솔직한 심정을, 상당히 솔직히 내비치겠다는 각오와 함께 써 내려가는 것이니까. 어쩌면 식자(識字)는 스스로를 어떤 서사 속의 배역으로 캐스팅하지 않고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쓸 수 없는 족속들인 듯?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나는 스스로의 서사에 축축하게 침잠하는 내가 못견디게 싫었어. 내 감정에 도취되어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이, 마스카라를 바르고 울면서 거울 셀카를 찍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꼴 보기가 싫었어. 그래서 그 기간동안 매일 일기 대신 아주 건조한 일지를 썼어. 감정 형용사를 다 쳐내고, 사실과 인과만 늘어놓으면서, 마치 하드보일드 소설의 탐정처럼 무뚝뚝하고 냉정하게 말이야.

71. X와 맥주를 마셨다.
72. 선풍기를 조립했다. 아트나인에서 3D 영화를 보았다. 옆자리 사람과 통성명하고 가지고 있던 관람권을 드렸다.
73. Y와 Z와 같이 점심을 시켜 먹었다. 오후에는 H와 에이미스커피에서 공부를 했다.
74. 탈색하고 베이지색으로 염색을 했다. 머리를 하는 동안 『부바르와 폐퀴셰』 2권을 읽었다.
75. 밤새 장르연구 시험 준비를 했다.
76. 장르연구 시험을 쳤다.
77. 피어싱을 새로 했다. 리포트를 송고하고 Y와 Z와 이야기를 나눴다.
79. 어영부영 하루를 보냈다.
80. H와 코인노래방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폭우가 쏟아져서 비를 쫄딱 맞고 피씨방에 갔다.
81. 한남동 바이닐앤레코즈와 mmmg에서 N의 생일선물을 샀다.
82. 합정에서 U를 만났다.

(당시의 실제 일지에서 발췌. 포도, 자네의 흔적을 찾아보시게나.)


그런데 몇 년을 그런 식으로 기록하다 보니 그게 더 지독한 연극처럼 여겨지더라구. 그 드라이하고 냉소적인 관찰자 또한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종류의 배역일 뿐일진대. 결국 ‘거대한 감정의 파고 속에서도 초연한 나’라는 새로운 자의식을 생성해 낸 것에 다름없었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자기 주연의 서사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것인가? 괴롭다, 괴로워. (꾸에에에에엑—-되에에엑?!)

그래서 차라리 양홍원의 ‘오보에’ 앨범이 좋았던 것인지 몰라. 미숙하고 병들고 슬픈 모습을 포장지 없이, 꾸미거나 정제하지도 않고 대충 쓴 다음에, 그마저도 웅얼웅얼 뭉갠 발음으로 노래하는 것이. 그가 떠나간 연인 ‘현주’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다시 바로 세우고 싶어 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고 생각했어. 이모(emo) 래퍼들이① 상처받고 병든 자아 앞에 조명기를 설치한다면, ‘오보에’는 조명기 설치할 기력도 없어서, 암막 커튼 틈새로 들어오는 햇빛을 피할 힘도 없어서, 라꾸라꾸 침대에 누워 왼쪽 팔로 눈을 가린 채 발화하는 최후의 웅얼거림처럼 들렸거든. 그럴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면 2021년의 양홍원에게 미안한 일일까? 뭐, 괜찮겠지? 지금은 현주 씨 다시 만나서 루아 낳고 행복하게 사니까… 양홍원은 회사도 안 다니잖아… 돈도 많구…

흠…
다음 주에 노래방 갈래?



2. 증보: 스윙스의 비명 비평
[유유민 16:41] 음악 랜덤재생 시켜놨는데
[유유민 16:41] 갑자기 스윙스가
[유유민 16:41] 진짜 구라 안 치고
[유유민 16:41] “으아아아아아아악!!!!!!” 이나 “꾸에에에에엑—-되에에엑?! 꿰에에엑!!!!”
[유유민 16:41] 이거
[유유민 16:41] 하는 거야
[유유민 16:41] No Mercy③ ;;
[신포도 16:43] 아 다시 들었는데 개웃기고 너무 크리피함
[유유민 16:43] 근데 저 일기 쓰고 나서 스윙스의 성정?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해 보니
[유유민 16:43] 저 비명이 갑자기 이해되고 마음아픔
[신포도 16:43] ㄷㄷ 그것도 일기에 써 줘
[유유민 16:44] 그래야겠다;;
[신포도 16:44] 존나 웃긴다
[신포도 16:44] 너무 이상한 비명임
[신포도 16:46] 비명비평 가능;; ㄷㄷ
[유유민 16:46] 비명비평 ㄷㄷㄷㄷㄷㄷㄷ
[유유민 16:46] 세계최초임

이같은 연유로, 또한, 기존의 일기가 너무 갑자기 끝나버려 당혹스럽다는 신포도의 의견을 수용하여, 본 일기를 증보하기로 하였다.


구글이 사용자 대화를 무단으로 도청해서 광고에 활용한 혐의로 6,8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지급하게 됐다는 기사를 봤거든. 불과 어제 말이야. 그런데 구글 드라이브에다가 꾸웨에엑, 으아아악 이런 비명 소리를 좀 썼기로서니, 그 즉시 내 애플뮤직에서 스윙스가 정확히 그같은 소리를 지르는 노래를 찾아 틀어줬다는 게 새삼 무서워.



사실 스윙스는 누구보다 언어에 성실한 래퍼라고 생각해. 일단, 본인을 수식하는 a.k.a.부터가 ‘펀치라인 킹’이잖아. 언어유희를 즐기고, 일단 말을 잘 하고, 도치법 남발로 놀림받긴 하지만 조리 있는 사람이잖아. 스윙스는 대중에게 조롱받는 캐릭터가 되더라도 트렌드나 담론의 변화에 맞춰 말을 바꾸거나 정확히 피해 가는 쨉쨉이가 아냐. 청자들을 향해 영원히 증명과 설득을 지속하는 사람이지. 나는 항상 이런 ‘일자유식’한 사람들에게 끌려. 가치관이라는 말이 유명무실해진 시대에 얼마나 소중한 인재들이니. 설령 이행기를 맞닥뜨렸을 때 죽일 놈이 되고 바보, 꼰대, 노인 취급을 받더라도,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 우직함(혹은 미련함)을 가진 사람들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언어로 인코딩하려는 사람이기에, 역설적으로 스윙스에게는 언어화되지 않은 잉여가 무지막지하게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거대한 댐만큼 많이 쌓였겠지.

그러니 저 비명은, 스윙스가 가진 방대한 어휘력과 논리로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범람하는 소리가 아닐까? 둑이, 댐이 터져나가는 소리. 스윙스의 목울대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그가 언어로 간신히 지탱하던 세계가 때때로 무너진다는 것을, 또는 도저히 완전한 방식으로는 조형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르겠어.

난 이겨낼 거야 난 이뤄낼 거야
헐크처럼 앞의 벽을 밀어낼 거야
내 뼈를 깎아도 너무나 아파도
하나씩 무너뜨릴 거야
Like dominoes




자전거를 처음 배운 뒤 빠르게 달리는 데 혈안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아빠가 말했었지. 엄청나게 빨리 달리는 것보다 엄청나게 천천히 달리는 게 훨씬 어렵다고, 천천히 달리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대단한 고난도 기술이라고 말이야. 느리게 달리려 해보니 과연 그렇더군. 핸들을 잡은 나의 팔과 전신이 마구 흔들렸어. 자전거가 좌우로 미친 듯이 휘청거렸거든. 스윙스의 다짐에서 방점은 아무래도 ‘밀어낼 거야’도 ‘헐크처럼’도 아닌 ‘하나씩’에 있는 것 같아. 도미노만큼이나 빽빽하게 도열한 벽을, 타노스처럼 한 방에 파괴하고 폭파시키는 대신 하나씩 성실하게 차근차근 깨부수겠다는 마음. 수행자의 마음… 그 인고의 과정이 스윙스를 비명지르게 만들었겠지. 그것이 “끄아아아아아악!!!!!”을 노래의 미주처럼 달아놓은 연고일 거야. 마음이 아프다.

비명 비평이라는 제목을 달고 쓸 수 있는 말은 그닥 많지 않은 것 같아. 이 정도로 됐어. 비명이라는 비언어적 파열을 다시 비평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가두는 게 좋은 시도였는지는 잘 모르겠어. 괜히 했나 싶기도… 문 스윙스, 미안해요. 하지만 재미있었죠?

3. 나가며
사실 나 이번 교환일기가 제대로 ‘교환’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어. 아니 사실은 지금도 확신은 없어. 뭐랄까, 우리 각자가 가장 몰두했던 힙합의 연대가 너무 다른 나머지, 서로 완전히 다른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달까. 첫 번째 일기를 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와썹크루의 FLOW2S나 VegaFlow, Demonicc, Scorpion, Roy.C 같은 래퍼들, 쌈디의 믹스테이프, 힙합플레이야, 무브먼트와 마스터플랜이 양분하던 국힙 씬, 에픽하이의 Lesson 시리즈, 이현도와 힙합 구조대, 지기펠라즈, 혼란속의 형제들, 소울맨 앤 마이노스에 대해서 잔뜩 이야기하게 될 줄 알았어.

하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네가 힙합을 듣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에 즈음하여 힙합에 냉담해졌던 것 같지. 난 기리보이나 노창에 관해 아는 것이 없고, 너는 소울컴퍼니나 소울커넥션에 대해 잘 모르고. 공명하는 지대가 없으니 각자의 용례를 붙들고 제법 뜬구름 잡는 소리들을 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미약하게 핑퐁이 되고 있다는 점이 사실 꽤 재미있기는 했어.

막바지에 오니 이 기획이 우리가 ‘말달리자’와 ‘그래비티’를 좋아한다는 데서 시작됐다는 게 황당할 지경이야. 나의 끝물과 너의 진입점이 겹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지점에 하필이면 빌스택스와 씨잼, 스윙스와 매드클라운이 서 있었다는 말인데. (도대체 하필 어떻게 딱 그 두 곡이 겹친 거지…) 어찌 보면, 그 덕에 이 교환일기는 2005년부터 2025년이라는, 무려 20년에 걸친 국힙의 연대기를 단 한 해의 손실도 없이 포괄할 수 있었지 뭐야?!

어쨌든 다음 주에 노래방 가자. 우리가 노래방에서 이상한 힙합곡을 잔뜩 부르고 서로 더블링을 쳐줄 수 있는 유일한 동무라는 사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이참에 다음 주에는 노래방 셋리스트에 변화를 좀 줄까.

일단은 나 ‘08베이식’ 부를 거야. 왜냐하면 나 요즘 진짜 “X밥처럼 사는” 거 “지긋지긋” 하거든… ‘말달리자’ 다음에는 바로 ‘그래비티’ 넘어가지 말고 ‘노 머시’ 이중창 하는 거 어때? 후주 나올 때 비명도 같이 지르구. 그… 전에 너가 부른 <이빨, 다리, 깃발, 폭탄> 비슷한 거, 그것도 외워갈게.

<타짜4>의 흥행을 응원하며, 유민

① 2010년대 중후반 사운드클라우드 등의 온라인 플랫폼을 중심으로 발달한 힙합의 하위 장르. 감정적이고 우울한 록 음악의 일종인 '이모(Emo)'와 힙합 '랩(Rap)'이 결합된 형태로, 우울증, 불안, 외로움, 실연, 상처 등 내면의 어둡고 사적인 감정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가사에 담아낸다.
② 백종관 감독의 2012년작으로, 유민과 포도가 재미삼아 꼽은 ‘95년 이후 최고의 영화 BEST 10’에서 2관왕을 차지했다.

Tags: 유유민 2호 교환일기 음악


Updated 26.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