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2호 > 교환일기 > 
국힙을 사랑하게 된 경위에 대한 교신 #3
부제: 빌스택스는 시대의 양심이다
👤유유민

그래. 중요한 건 해방감이야.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말 잘 듣고 예의 발라야 한다는 강박 속의 유년기. 게다가 서양 고전음악과 Hi-Fi 오디오의 광이었던 아빠가 꾸린 거실에서 내가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흐나 생상스, 베토벤 정도였으니. 돈 받고 파는 음반 속에 쌍욕을 쓰고 꼰대들을 욕하고 사회를 비판하고, 그런 행위 자체가 선언처럼 근사해 보였어. 19금 딱지 붙은 앨범을 듣는다는 게 너무 쿨해서 자랑스러울 지경이었지.

더블케이는 잘생겼어.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첫 번째 임팩트였어. 대충 걸치고 나온 듯한 군밤 장수 모자에 패딩을 입고, 멋있게 보일 필요 없다는 듯한 무심한 걸음걸이로 무대를 어슬렁거리면서 노래를 했지. 그 모자를 따라 샀어. 앨범은 시내에 있던 신나라레코드 바로 옆, 참새방앗간처럼 들러 CD를 사던 작은 음반 가게에서 샀어. 자주색과 곤색의 타탄체크 무늬 교복 치마를 입고, 파나소닉의 흰색 CDP를 책가방에 끼워넣고, 지퍼 틈 사이로 빼낸 이어폰 선을 귀에 꽂은 채.

엄마가 와병하는 동안 나는 혼자 남겨졌어. 하교하면 병원 어귀의 허름한 독서실에서 CDP로 더블케이 1집을 돌려 들으며 낙서를 했어. 스카이 독서실. 공부는 하지 않았어. 시간을 때우고자 했을 뿐이지. 늘 내 옆자리에 앉던, 항상 열심히 공부하던 언니가 있었어. 유성여고 교복을 입고 있었고, 단발머리에, 지금 생각해 보면 이유영을 닮았네. 어느 날 그 언니는 자리에 엎드려서 한참 동안 울기만 했어.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돌려서, 눈물에 지저분하게 얼룩진 얼굴로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너 중학생이지? 모의고사가 뭔지 알아?”

그러더니 다 구겨진 성적표를 펼쳐서 보여줬어. 너무 복잡하고 빽빽한 표였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 정보값을 제공하지 못했지만 짓이겨진 종이의 구김과 홈에서 그 언니의 분노가 느껴졌어. 진짜 죽어라 공부했는데, 어떤 영예도 그 언니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오늘은 정말 공부 못 하겠다. 잘 있어라.”

그날 이후 이유영을 닮은 그 언니를 보지 못했어. 정말 끝의 끝까지 애썼기 때문에 포기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독서실의 터가 안 좋다고 생각해서 옮긴 것뿐이었을까? 어쨌든 내가 힙합에 처음 몰두하던 그때를 더듬어 보면 엄마의 병상, 더블케이의 데뷔앨범, 겨울 편의점 호빵의 맛과, 허름한 독서실 건물의 외관과 파리하던 백열등, 그리고 그 언니의 얼굴이 꼭 같이 떠오르는 거야.

더블케이의 데뷔앨범 9번 트랙은 ‘씨티 헌터(City Hunter)’라는 곡이었어. 바스코와 길성준이 작곡자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지.

돈, 권력, 명예, 영광, 그 모든 게 있는 겉으론 화려한 이 도시 정상, 그거 하나만 보고 여기 왔어. 그때 난 어려 내 눈은 속았어. 실제론 낯선 이곳의 실체를 난 봤어. 실제 실패, 부패, 비리, 무시가 판쳐. 가로등 불빛 밑을 헤엄쳐 난 숨이 막혀. 빌딩들의 숲속 그 속을 걸어…

이걸 계기로 바스코의 음악을 듣게 됐고, 지기펠라즈, 와썹크루 같은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팬이 됐지.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에게 자유를 주었던 국힙의 가사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그 당시에는 솔직하게 말해서 그런 구시대적으로 마초적인 가사마저도 나에게 해방감을 주었어.

이후 나는 이름하여 ‘본토힙합(물론 나의 본토는 미대륙이 아님)’에도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문화를 이해해야 음악을 제대로 듣는 것이라는 소신 아래 A4 사이즈 화일에다가 힙합 용어나 배경지식 같은 것들을 스크랩해서 들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어. 쨍하니 파란 색에 도트무늬가 빼곡한 미키마우스 파일철이었는데. 사우스 코스트와 웨스트 코스트의 특징에서부터 라이벌 관계, 누가 누구에게 총을 쐈는지, 호미(homie)나 인 다 하우스(in da house)는 무슨 뜻인지 달달 외우려 했어. 투팍과 비기를 익혔고, 칸예, 나스, KRS-ONE을 좋아하게 됐어. 공부하다 보니 더 많은 소울 음악도 알게 되었지. 인디아 아리, 맥스웰, 트레이 송즈, 본 석스 앤 하모니를 좋아했고, 왜인지 디안젤로는 싫었어. 그렇지만 가장 많이 들은 것은 단연 DMX였어. 다 부숴버리고 싶었던 어린 나의 니즈에 부합했던 거야. 그렇게 나는 그 꺼끌꺼끌한 언어들을 경전처럼 받들어 나가고 있었지.

다시, 중요한 것은 해방감이야.

지난 회차 ‘풍요의 바다’ 낭독회에서 내가 소리 내 읽어야만 했던, 기요아키가 사토코에게 쓴 쓰레기같은 편지 있잖아. 당시의 내가 사토코였다면 나는 기요아키의 편지를 보면서 어떤 흥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어. 음란하며, 몰가치하며, 정숙하지 못하다고 나를 간주하는 시선에①.

아니요! 결단코 아닙니다. 소생은 그 하룻밤에서 (틀림없이 발전은 발전입니다만)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나아가 아무도 찾지 않는 광야로 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선 게이샤와 귀부인, 여염집 여성과 화류계 여성, 교육받지 않은 여자와 청탑사패들 간의 구별도 전혀 없습니다. 여자란 여자는 모두 거짓말쟁이에다 ‘음란한 육체를 가진 작은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화장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의상입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소생은 지금, 당신까지도 확실히 원 오브 뎀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음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봄눈』에서 발췌)


지금의 나라면 당연히 기요아키를 고소하고 접근금지 신청을 했겠지? 고위층 자제가 저딴 짓을 하고 다닌다고 인터넷에도 올릴 거야. 다시 읽어도 기요아키는 진짜 병신새끼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저런 모멸감이 싫지만은 않았어. 착한 딸, 착한 어린이, 착한 학생이어야만 한다는 강박, 고상하고 예의발라야 한다는 그 숨막히는 껍데기를 찢어발겨 주는 것 같았으니까. 이러니 어린이들에게,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세상의 몰지각을 재생산하지 않을 의무란 얼마나 중요하니. 하지만 그 객기를 사랑하는 데 조건이 있었다면, 그들이 진짜 바닥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당시에는 국힙이라는 말조차 없었어. 있었다 해도 그렇게 자주 사용되는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해. 오늘날의 ‘국힙’이라는 기표에는 미미한 조롱과 자조의 기의가 젖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이미 힙합이 부르조아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야. 00년대의 힙합은 처절한 언더그라운드의 세상이었잖아. ‘Gravity’②의 가사에서 스윙스가 부르짖듯이,

그럼 왜 만드냐고? 하고 싶으니까, 음원차트에 올리고 싶으니까, 힙합을…

힙합 차트 1위를 찍어봤자 멜론 종합 탑 100에도 들지 못하던 험지였으니까. 무엇을 부르고 무엇을 주장하든 그것은 장르의 투사로서 ‘어그로라도 끌어보자’라는 심정으로 내지르는 발악 같은 맛이 있었지.

국힙의 가사에는 본디 날것의 분노, 비주류가 주류에게 뱉는 쿰쿰한 침이 묻어 있었어. 비열한 사회와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문화 일체를 욕하고, “네가 쓰레기처럼 놀고 먹고 더러운 유흥 거리나 좇는 동안, 나는 땀범벅이 된 채 마이크로폰 앞에 서 있어” 빈정댈 수 있는 정신적 우월감이 앞섰다고나 할까? 열심히 살고, 뭔가 다른 걸 추구하는 나와 그들을 동일시해 볼 수 있었어. 혹은, 그들처럼 고매해지리라 다짐해 볼 수 있었어. 그런데 메이저가 된 힙합은 상대의 나태나 썩어빠진 정신을 조롱하는 대신에 이런 소리나 하잖아.

너는 돈이 없지. 너의 한달 월급은 내 하루 벌이지. 내 시계는 AP, 너는 카시오나 차지. 나는 마세라티, 너는 라세티나 몰지. 혹은 뚜벅이지. 우리 집에는 지폐랑 금 엄청나지. 이 거지 새끼들아. 나는 여자들을 노예처럼 부리네. 니 여친도 나한테 DM 보냈네. 우리 레이블은 완전 대기업. 너는 월 200에 빌빌대다 뒤져버려 Hol’up.
(유민이 급조해낸, 실제로 세상에 없는 노래이며,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음…)


가난과 비주류적 패배감을 땔감 삼아 타오르던 작지만 시뻘겋던 불꽃에 성공과 음원차트 1위와 플렉스라는 기름을 철철 붓자 거대하고 느끼한 캠프파이어가 된 게 아니겠어? 그 와중에 다들 연기하듯 형형한 눈빛과 투사의 자세만 유지하니 우스울 따름이었지.

‘본토’의 래퍼들은 진짜로 80년대에 게토에서 시작해서 억만장자가 되었고, 롤리와 AP, 금덩이와 지폐 다발을 휘두르면서 승전고를 울리고 있다는 어떤, 신화적인 실화를 기반으로 가사를 썼잖아. 초창기 한국 힙합 시장에서 ‘부’만은 수입해 올 수 없는 어떤 것이었어. 왜냐하면, 부유하지 않았으니까. 비주류 중의 비주류였으니까. 그래서 본토 힙합의 구성요소 가운데 ‘돈’ 얘기만큼은 차마 따라 할 수 없었고, 그 빈자리를 결국 곤조로 채운 거거든. 돈은 없지만 내 정신은 고고해, 방송국 놈들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타협하지 않아, 같은. 물질적인 결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지점을 공작새 꼬리처럼 악착같이 펼쳐야 했던 그 시절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국힙만의 독자적인 멋을 만들어냈던 게 아닐까 싶어. 돈 없고 인정받지 못해도 내 음악과 태도에 대한 확신이 펄펄 끓어오르던 활화산 같은 동세를.

그러나 결국 힙합은 돈을 벌기 시작했지. 수년 전, 자신을 투사로 정체화하던 누군가에게, 어떤 방식으로 루트를 만들어 나갔냐고 경외하며 물었더니 “부모님이 교수였거든” 따위 답이 되돌아왔을 때의 기분 같은 것… 그런 배꼽 냄새를 힙합에서 느낀 이후로 나는 빠르게 국힙에서 멀어졌어.

그러다 바스코가 쇼미더머니에서 준우승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저스트뮤직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말 달리자’③의 뮤직비디오를 봤어. 가슴팍에 안중근의 손바닥을 새기고, 늘상 야구 유니폼에 볼캡을 뒤집어쓴 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자신을 출연시켜 준 ‘하늘이 형’에게 고마워서 눈물을 보이던 바스코가 갑자기 아래위로 화려한 퍼코트에 금목걸이를 두르고 나타난 것도 그 바닥의 생리가 도출한 필연적 결과였겠지. 그 자신뿐 아니라 동생들에게마저 ‘부’를 누리게 만들어준 이 바닥 OB로서의 자긍과 기쁨을 차마 감추지도 못하고.



그럼에도 ‘말 달리자’의 가사에서, 바스코는 자신의 가난하고 형형하던 과거와 현재의 ‘달라진 돈벌이’ 사이를 잇는 다리를 성실하게 놓고 있어.

Show Money 나간 뒤에 달라진 돈벌이, 부정하고 싶진 않아. Biggie가 한 말이 맞더군. (...) 나보다는 내 아들 섭일 위해 뭐든 사고픈 걸 사는 것. 내가 돈맛 보고 변하길 바라지? 돈만 보고 달려온 삶은 아니기에 (...) 꿈을 팔고 번 돈을 다시 더 큰 꿈에 집중 투자해. 그리고 거기서 번 돈으로 잘 봐, 내 주위 모든 사람 (...)

난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어. 나는 바스코가 분명히 그 과도기에서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정당화하고 합리화해 내야 한다는 일종의 켕기는 감정에 사로잡혀있다고 느꼈어. 왜냐하면 2절을 담당한 씨잼의 가사에서는 한국 힙합을 보릿고개부터 이끌어온 큰형님의 고뇌에는 관심도 없이 그냥 벌스 내내 돈자랑만 해대는 철딱서니밖에 보이지 않았거든. 바스코가 이 앨범을 발매하고 얼마 되지 않아 ‘빌스택스’④로 랩네임을 바꾸겠다고 선언한 것도 나는 그 켕김의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을 했어. 과거의 바스코에서 현재의 빌스택스의 모습 사이를 잇는 급격한 커브, 그것을 억지로 윤색하는 대신 솔직한 타락을 택하겠다는, 위선을 떠느니 위악을 부리겠다는 모종의 결심.

진짜로 집에 지폐를 쌓아둘 만큼 부유해지지 않았다 해도, 빈지노나 도끼만큼의 돈을 모으지 못했다 해도, 그래도 더 이상 ‘바스코’일 수는 없으니까…

퍼코트를 입고 레이밴을 걸친 뮤비 속 바스코의 제스처에서 공허한 허우적댐을 읽었다고 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내가 동경했던 ‘시티 헌터’가 사냥을 끝내고, 전리품을 철철 두른 채 박제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다면… 하지만 그 결단이야말로 어쩌면 이 거대하고 느끼한, 사향 냄새 나는 캠프파이어 판에 꼿꼿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양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그런 생각을 하며 ‘말 달리자’를 자꾸만 들었던 거야. 그리고 2016년, 서울에서 너를 만났어. 

해피헤비드링커에서, 유민

① 포도의 제안으로 올해부터 유민과 포도 두 사람이 주 1~2회 진행하고 있는 낭독회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시리즈 통독을 목표로 한다. 처음에는 점잖은 목소리로, 길고 긴 문장의 호흡을 해치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것에 만족했던 두 사람은 최근 부쩍 연기 욕심이 들어 거의 라디오 연속극을 진행하는 심정으로 낭독하고 있다.
② 유민과 포도는 노래방 가기를 무척 즐겨 하며, 마지막 곡은 반드시 ‘Gravity’로 장식하는 전통을 십여 년째 고수하고 있다. 주로 유민이 스윙스 파트를, 포도가 매드클라운 파트를 맡는다.
③ 바스코가 빌스택스로 랩네임을 변경한 것은 2016년이다. ‘말 달리자’는 2015년 발매된 앨범 ‘Code Name: 211’에 수록되어 있다.
④ 지폐 뭉치, 돈 무더기라는 뜻.

Tags: 유유민 2호 교환일기 음악


Updated 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