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말잇기 –  기성세대 –  대련 –  연기수업 – 업무일지 – 지뢰찾기 – 기립박수 – 수요일 – 일등석 – 석관동 – 동거 – 거수 –  수다쟁이 이민  민원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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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립박수 인플레이션
유유민
2026년 3월 14일




“어제 부흐빈더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콘서트에 갔습니다. 베토벤 전문가라는 명성을 감안하면 기대가 컸는데, 솔직히 제가 본 독주 연주 중 가장 실망스러운 연주였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힘을 주어 연주했고, 다이내믹 변화도 거의 없었으며, 1악장에서는 여러 번 빠른 음형을 놓쳤습니다. 그런데도 기립 박수를 세 번이나 받았습니다. 같은 오케스트라와 같은 곡을 연주한 트리피노프의 연주와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불만일 수도 있지만, 모든 연주에 기립박수와 찬사를 보내는 문화가 진정으로 훌륭한 연주에 대한 찬사를 덜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배달 음식 고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식사라는 것은 맛, 가격, 접시의 모양, 테이블의 색깔, 담음새, 자리마다 비치된 양념 및 조미료의 구성, 가게의 위치, 후식을 먹을 카페와의 거리, 동행하는 이의 선호, 주인장의 성정이나 홀 서버의 센스, 이러한 업장에 달려있는 문제들 외에도 그날 그곳에서 나눈 대화의 즐거움이나 이후의 일과 계획 같은 것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조건들 가운데 몇 가지만 완벽해도 괜찮은 경험이라 치고 넘어갈 수 있는 고맥락의 이벤트다. 그러나 식사를 배달시켜 먹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이 즐비한 조건들 가운데 오로지 맛과 가격만을 고려할 수 있는 외롭고 허탈한 기분에 빠지는 것이다. 이 선택에서 의지할 수 있는 참조점이라곤 리뷰뿐인데, 오늘날 배달 앱의 리뷰라는 것이 과연 리뷰의 기능을 하고 있기는 한 것인지? 

        사장님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얻어먹고 만 서비스 쿠키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별점 5점을 매기며, ‘하… 맛없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구나…’ 자포자기하곤 하는 것이 나만의 고충은 아닐 것이다. 혹여나 음식에 큰 문제가 있었다면 응당한 평가를 남기기보다는 차라리 리뷰하지 않기를 택하면서, 그냥 다시는 여기서 시켜 먹지 말아야지 정도의 다짐을 하는 것이. 모름지기 배달 앱에 등록되었다면 평균 별점이 최소 4.7점 이상은 되어야 유저들의 클릭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 존 호튼 교수가 그의 동료 몇과 함께 평판 인플레이션에 관한 논문씩이나 쓴 것도 결코 과한 행동은 아니다. 그들은 우버 기사나 배달부,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에서 평점이 후해지는 결정적 이유를 “평가자가 피평가자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는 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배달 앱에서의 별 다섯 개라는 기표는 다음의 기의를 갖는다.

음식이 안 쏟아지고 제시간에 왔어요~! (엄지척)

서비스 완수에 대한 확인 도장으로서의 별 장식. 만약 정말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세상에 공론화시켜야 할 만큼의 거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면 별 한 개를 주며 혹평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사실상 배달 앱의 평점은 1점에서 5점까지의 스케일이 아니라, 문제없음(★★★★★)과 폐업해야할정도로엄청나게큰문제가있음(★)의 이분법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채울 수 있는 별의 개수가 다섯 개나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때로는 평가라는 제도 혹은 문화 자체의 본질이 무색해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의 경험이 일천하여 지금까지와 같이 확신에 찬 어조를 유지할 수는 없지만, 클래식 공연에서의 박수 문화 역시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일으키는 현상의 하나다. 못해도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갈 일이 생기는데, 공기를 휘젓는 선율에 기쁨을 느끼다가도, 모든 악장이 끝난 직후부터 잔뜩 차려입은 관객들이 조금 작위적으로 환희에 찬 표정을 한 채, 삶이 종결될 때까지 영원토록 끝나지 않을 기세로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할 때, 브라보! 소리와 함께 동서남북에서 휘파람을 불 때, 그리고 죽음처럼 기나긴 박수에 보답하듯 연주자가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다가 마침내 못 말린다는 듯 후후, 웃음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아 매우 즉흥적인 서비스인 것마냥 앙코르를 시작할 때까지의 시간은 정말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고 고역스럽다. 물론 때때로 정말 벅차도록 아름다운 공연 끝에만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외려 감동을 배가시키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내가 참석했던 모든 공연에서 똑같은 일이 발생했다. 그중 절반 정도는 기립박수의 행렬이 일어났다. 객관적으로(물론 객관적일 수 없겠지) 그저 그렇거나 심지어는 엉망이었던 공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딱 한 번 조성진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밖의 모든 연주에서도 조성진이 받은 것과 같은 박수 세례가 쏟아졌다. 왜 그런 역할극 같은 퍼포먼스가 의례로 정착된 것일까? 기나긴 클래식의 역사 가운데 당최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너무 짧은 박수에 섭섭함을 토로한 연주자들이 많았던 것일까? 이 사실이 궁금해져 해외 웹을 뒤지다가 2023년 가디언 지에서 이 기립박수 인플레이션에 대해 빈정댄 전적을 발견했다.

"기립박수가 엄청난 것을 의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공연이 기립박수를 받으면서 그 매력은 사라졌죠. (...) 모든 것이 기립박수를 받는다면, 도대체 이 공연이 진짜 좋았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길이'입니다. 모든 것에 기립박수가 주어지는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척도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박수 시간'뿐입니다."

내가 제기한 것이 그토록 길고 긴 박수 시간에 대한 의문 수준이라면 위의 아티클은 정말 조롱에 가까울 정도인데, 심지어 5분 이상 기립박수를 칠 생각이 없다면 <판의 미로> 시사회에는 초대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기까지 한다. 근래의 문제만은 아니었는지, 가디언 지는 2007년에도 이 문제를 다루며 프랭크 J. 오테리의 발언을 인용한다. 

“만일 기립박수와 우렁찬 브라보가 이제 기본값이 되어버렸다면, 진정으로 압도적인 명연주와 그저 그런 평범한 연주를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야 한단 말입니까?”

내가 그랬잖아! 진정으로 압도적인 김치찌개와 그저 그런 평범한 김치찌개를 도대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구별해야 하느냐고…

        그러나 재미있게도, 같은 예술 내에서의 분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에 있어서는 모두가 엄격하게 굴어야만 씬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나타나 로저 이버트가 아닌 일반 대중들에게 비어 있는 별 다섯 개씩을 나눠 주면서 영화를 직접 평가해 보라고 제안하자마자, 모두가 평론가로 변신해 매우 까다로운 각자의 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튼토마토든 왓챠피디아든, 이 동네에서는 별이 다섯 개라는 사실이 여전히 무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평범한 영화는 2.5점을 받고, 걸작은 4.5점을 받고, <클레멘타인>은 0.5점을 받는다.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다. 영화라는 것은 창작자와 관객을 막론하고 영화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다 함께 지지고 볶으며 발전시켜 나가야 할 현재 진행형의 산업인 반면, 클래식은 이미 오래전에 완성된 마스터피스의 제단이며 이를 연주자들이 얼마나 정교하게, 혹은 근사하게 표현해내는지를 오롯이 향유하는 세계이므로. 그러니 영화에 날카로운 별점을 매기면서 우리는 생태계를 정화하고 씬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어떤 주인의식을 느낄 수 있지만, 어제 부흐빈더가 ‘엘리제를 위하여’ 연주를 망쳤다고 해서 베토벤이 반성하고 다음 곡을 더 잘 써올 리도 없거니와, 베토벤의 위대한 유산이 훼손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첫머리에 유추한 것처럼 ‘사장님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달리 말해 ‘연주자분들 섭섭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치는 박수’에 혐의를 지고 있다면 또 다른 유추들이 가능해진다. 우선 내가 평가하는 대상이 이 평가 시스템 내에서 강자인지 약자인지에 따라 다르다는 가설을 세워 보겠다. 내가 과도한 정의감, 혹은 객관성을 기하겠다는 깐깐한 마음 때문에 형편없는 별점을 주었을 때, 그것이 배달원, 우버 기사님, 식당 사장님들의 생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상업영화에 전작과 달리 실망스럽다는 이유로 “초심을 찾으세요” 일침을 놓으며 별점 1점을 준다고 해서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마블 스튜디오가 당장 내일 해고당하거나 배를 곯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흠, 말이 되는군! 그러나 클래식 연주자들은 그다지 약자일 것 같지 않은데… 

        그렇다면 아마도 영화에 있어서만 이런 엄정한 평가가 가능한 것은 실재하는 느낌에서 오는 차이 때문은 아닐까? 클래식 공연장이나 연극 무대에는 폭우를 뚫고 우리 집 앞으로 찾아온 배달 기사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땀 흘리며 연주하는 실연자가 있기 때문에, 그들을 기쁘게 해줌으로써 우리를 위한 그 노고에 보답하려는 것이 아닐까? 맞는 것 같은데. 영화라 할지라도 감독이 참여하는 시사회에서 기립박수는 흔한 일이니 말이다. 앗, 하지만, 요즘 배달은 웬만하면 비대면으로 받지 않나… 

        혹은, 영화가 마스터파일로 유통되기 때문에 제작진과 관객 사이의 시공간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미키 17>이 싫다고 동네방네 소문낸다고 해서 내가 봉준호와 눈을 마주치게 될 일도 없고, 왓챠피디아에 별점 2점을 매긴다고 해서 상영관의 분위기를 깨거나 함께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기분을 망치게 되는 것도 아니니까… 즉 부채감도, 동조해야 할 고상한 무드도 없는, 현장의 인간적인 압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니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같은 영화일지라도 관객은 감독의 노고가 표면적으로 지나치게 드러날 때에는 영화의 만듦새와 관계없이 우선 이 영화를 지지하고, 사랑하고, 응원하기로 마음먹기도 하니까. 내가 오래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인용해 오자면, 노고가 드러나는 방식은 다음의 몇 가지를 포함한다.

너무 많은 시퀀스가 포함되었을 때, 질감이나 결이 고르지 않은 서로 다른 푸티지들이 남용되었을 때, 카메라의 무빙이 전반적으로 다급할 때, 혹은 영겁과도 같은 롱테이크와 자기성찰적 내레이션이 동시에 등장할 때, 숨거나, 쫓기거나, 카메라맨 스스로가 전율 또는 비통함에 빠질 때, 지나치게 동요하는 카메라. 즉 현장에서 카메라맨의 찡그린 표정과 땀방울을 떠올리게 하고, 그가 든 카메라의 불안한 동세와 운동감을 상상하게끔 하는…

뭐가 됐든 간에 그것이 옳거나 그르지는 않은 것 같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지독한 기립박수나 별점 인플레를 불평하고, 조금은 비웃기도 하고, 그럼에도 영화에는 아직 형형한 평가의 잣대가 남아 있어 희망차다! 라는 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쓰다 보니, 그 알량한 기준을 관철하거나 평가 시스템을 지키겠답시고 비 내리는 밤 오토바이를 몰고 온 배달 기사에게 3점을 주거나, 두 시간 가까이 무대에서 현을 켜고 녹초가 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를 향해 혼자 팔짱 끼고 앉아 있는 다정치 못한 삶을 사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 서로에게 5점 만점을 퍼주고 적당히 기립박수를 쳐주는 훈훈한 기만의 무드 속에서 연주자도 흡족하고, 관객석에 앉은 이들도 교양 있는 자신의 모습에 취하며 다 같이 위로받고 있다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느 날 정말로 영혼을 뒤흔드는 완벽한 김치찌개나 내 지난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릴 일생일대의 명연주를 만났을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줄 수 있는 별은 이미 다 써버렸고, 이미 모든 이들의 연주마다 기립박수를 치고 말았는데. 남은 방법이라곤 테이블 위로, 무대 위로 올라가 공중제비를 도는 것밖엔 없는 걸까…? 





① 오스트리아의 클래식 피아니스트 루돌프 부흐빈더(Rudolf Buchbinder)를 말하는 것 같다. 

②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다닐 트리포노프(Daniil Trifonov)를 말하는 것 같다. 

③ 레딧의 한 ‘누리꾼’으로부터… 

④ 더 가디언, ‘The applause clause: why are standing ovations suddenly obligatory?’ (https://www.theguardian.com/stage/2023/oct/17/the-applause-clause-why-are-standing-ovations-suddenly-obligatory)

⑤ 더 가디언, ‘Applause for thought’에서 재인용 (https://www.theguardian.com/music/musicblog/2007/jun/13/applauseblogforclare)

⑥ 유유민, ’아, 감은사 감은사 감은사 탑이여 – 때로는 조심하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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