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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포도
2026년 3월 11일
1. 고전 게임
게임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더더욱 고전 게임은. 테트리스, 팩맨, 버블버블, 스트리트 파이터, 메탈슬러그 같은 오락실의 고전 게임들은 더욱 그렇다. 유년기의 나는 문방구 바깥의 캐노피 영역보다 주인아줌마의 사랑방과 붙어 있는 코디 스티커, 다이어리가 진열된 곳을 더 사랑했다. 캐릭캐릭 체인지, 슈가슈가룬, 꼬마마법사 레미의 옷을 고민하던 어린 날의 나…피시방은 오락실의 캐노피 영역보다 더 먼 곳이었다. 그곳은 오히려 내게 아편굴과 더 가까운 장소였지. 머리끝까지 오는 검정 가죽 의자에 앉아 빛이 나오는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는 장성들. (그때의 내게는 장성처럼 보였지만, 아마 대부분 12~18살 사이의 남성들이었을 테다.) 칸막이 하나 없는 어느 섹션에 마련된 재떨이-프리 공간…. 초록 피부에 뿔이 달린 괴물이 그려진 게임을 하며 마우스 왼쪽 키를 연타하는 사람들과, 얼굴만 한 헤드폰을 쓰고 어떻게 가능한지도 모를 방법으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남들에게 쌍욕을 날리는 남성들.
어릴 적의 나는 평택에 사는 사촌오빠와 함께 피시방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마치 사진처럼 기록된 이 충격적인 장면에 압도되어, 엉엉 눈물을 흘리며 고모네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피시방에서 도망친 일이 있은 후로부터 약 1년 후, 나는 초등 4학년의 겨울방학을 중국에서 보내게 된다. 한창 친구들을 만나고 싶은 시기에, 반자발적, 반강제적으로 마주한 고독한 방학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엠넷을 닮은 채널에서 틀어주던 한국 노래의 뮤직비디오들. 이루의 검은 안경, 성시경의 거리에서. 사촌오빠의 방에 들어가 켰던 컴퓨터. 그제야 나는 인터넷 브라우저의 시작 페이지가 ‘네이버’가 아닌 세계를 처음 마주했다. 기존의 세계에 입국하기 위해서 나는 www.naver.com을 주소창에 한 자씩 입력해야 했다. 버디버디 아이디를 만들 줄 몰라서 나는 엄마에게 연락했다. 어떤 알파벳을 써서 아이디를 만들어야 하느냐고…
엄마가 꼭 풀어야 한다며 들려보낸 ‘왕수학’ 문제집은 2달이 지나도 펼친 적 없었다. 대신 윈도우 컴퓨터와 브라우저, 엠넷의 세계를 탐험하며 한국에서는 익숙했던 루트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윈도우 - 익스플로러 - 네이버 메인 화면 - 쥬니어 네이버의 루틴에서 벗어나, 야후와 구글에는 어떤 정보들이 올라오는지, 버디버디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 찾아봤다. 이 윈도우라는 시스템에 갇힌 채로는 어떤 유희까지 즐길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 했다. 무작정 커서를 찔러대고 다니다가 발견한 것이 솔리테어와 핀볼, 지뢰찾기 같은 윈도우 기본 탑재 고전 게임들이었다.
핀볼의 그래픽은 낯설었다. 어린 내 눈에도 핀볼은 어딘가 느리게, 끊어지며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프레임의 가시화는 몰입을 계속해 방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몰입이 안 될 뿐 아니라 어딘가 무서울 정도였다. 움직임의 측면에서 불쾌한 골짜기를 느꼈다고나 할까.
가장 많이 즐긴 것은 솔리테어였다. 빨간색과 까만색의 카드를 K - Q - J - 10 - ... - A의 순서로 배열해 정리하는 게임. 솔리테어는 이해하기 쉬웠고, 잔잔한 재미를 주기도 했지만 확실히 질리는 맛이었다. 그 질림의 원인 중 하나로는 허무감이 있을 텐데, 어찌저찌 카드를 다 정리하고 나면 카드가 사르르 녹아버리며 꽃가루로 변해버리는 그 순간, 나는 무언가를 완성했다는 감각이나 뿌듯함보다는 내가 쌓아온 시간과 공적이 일순간 휘발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다음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시 정리할 카드 더미를 받아 드는 일뿐이었지.
기어코 손이 가질 않던 핀볼, 뿌듯함을 음미할 틈을 주지 않는 솔리테어. 그 둘에 지칠 때마다 나는 지뢰찾기의 품에 가서 기대 누웠다.
2. 지뢰 찾는 방법
지뢰찾기 하는 방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1이 뜨면 주변에 지뢰가 한 개 있다, 2가 뜨면 지뢰가 주변에 2개 있다, 아무것도 뜨지 않으면 그 주변에는 지뢰가 없는 것이다. 이 3개 조합의 교집합을 만들어 지뢰를 피해 모든 땅을 클릭하면 된다는 이모의 설명을 듣고도, 그 게임을 어떻게 깨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탐구할 만한 수학적 능력이나 지구력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아직도 지뢰찾기를 하지 못한다. 그저 클릭하고, 지뢰가 뜨고, 텔레토비의 아기 해처럼 웃고 있던 스마일리 이모지가 두 눈을 X 모양으로 바꾸는 걸 구경하는 게 전부다.그러니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지뢰찾기를 제대로 플레이해 본 적도, 이해한 적도, 그러니 게임을 게임으로서 즐긴 적도 없으면서, 왜 그 단순한 게임에 그토록 매혹된 것일까? 당최 플레이어를 이해시키고자 노력하지도 않는 게임. 더 예쁘게,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도 하지 않고, 뭔가를 누르다 보면 끝이 찾아오는 로직. 사실 나는 지뢰찾기를 플레이하는 방법만 몰랐던 건 아니었어. 진짜 지뢰가 무엇인지도 몰랐었지. 클릭을 이어 나가다가 끝이 찾아오는 그때, 까만 모양의 폭탄이 펑하고 터져버릴 때. 피시방을 무서워하고, 쥬니어네이버와 왕수학의 세계에 갇혀 살던 초등학생 시절의 나는, 폭탄에 대해서는 넌지시 알았어도 지뢰라는 종류의 것은 알지도 못했다.
땅 밑에 가만히 숨어서, 누군가가 밟기를 기다리는 폭탄이 존재한다니. 게다가 남한과 북한을 가르는 경계 지역에는 그러한 폭탄들이 수없이 자리한단다. 금속이 거의 없어 탐지하기 어려운 지뢰, 발이 아닌 발가락만 날려버리는 지뢰, PNM 지뢰는 냉전 시기 소련이 만든 대인지뢰로 현재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퍼져 있는 종류의 지뢰라고 한다. 앞쪽으로 700개의 쇠구슬을 쏘는 가장 최신의 지뢰는 원격으로 조종 가능하다.
이제는 지뢰를 밟지 않아도 된다. 지뢰를 클릭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까, 지뢰찾기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3. <노 어더 랜드>
얼마 전에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점령한 서안 지구의 마사페르 야타를 다룬 영화 <노 어더 랜드>를 봤다. 끔찍하다, 흥미롭다, 재미있다, 지루하다, 잘 찍었다 수준의 평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낯빛 같은 것들이 찍혀 있었고, 나는 가끔 울었고, 또 입으로 손을 막으며 경악하기도 했으며, 계속해 꼬았던 다리를 바꾸며 앉은 자세를 바꿔야 했다. 끔찍한 낯빛, 무너지는 건물들, 가치중립적으로 굳어가는 시멘트 같은 것들이 스크린을 범람해서 내 몸을 좀먹었다.형용하기 어려운 영화가 끝난 뒤에는 두 명의 평론가가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들은 네 명의 공동 감독이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동굴에서 영화를 완성한 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다.
이 영화가 상영되기 며칠 전,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인해 이란의 한 여자초등학교가 무너진 상태였고, 2023년까지를 찍었던 <노 어더 랜드>에도 비슷한 장면의, 비슷한 상황이 찍혔다.
이 영화 속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대신 끔찍하도록 반복되는 트랙을 매 순간, 끝없이 달리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바깥의 시간도 마찬가지다. 2022년 즈음 서안지구에서 폭발됐던 초등학교는 2026년 이란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역사의 반복이라는 고고한 수식보다는 숨 막히는 무시간성, 어떠한 것도 시작되거나 마무리되지 못하는 철저한 공백의 시간이라 표현해야 마땅할 것이다.
평론가들은 <노 어더 랜드> 이전, 한국에 소개되었던 팔레스타인 영화들을 몇 편 언급했다. 예전의 팔레스타인 영화에서는 픽션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영화들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스라엘의 행정망과 폭압 위에서도 결혼하기 위해 고민하는 에피소드①를 꾸릴 수 있었고, 이스라엘에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두 팔레스타인 청년②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끔찍한 무시간성이 켜켜이 쌓인 뒤에는 픽션조차 불가능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픽션을 이야기하는 행위 자체가 시대착오적 망상이 되곤 한다.
4. 지뢰를 몰랐기에 행복했던 날들
그러니까, 사실 어린 시절의 내가 방법조차 모르던 게임인 지뢰찾기에 매혹되었던 것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뢰가 터지는 것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이 게임 위에서 지뢰가 터진다 해도, 누구 하나 괴로워하지 않았으니까. 게임 방법을 모르는 자에게 패배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 것이니까.드론의 초정밀 공격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국경 지역에 설치된 AI 안면 인식 기계. 무엇으로도 탐지할 수 없는 지뢰와 밟거나 클릭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해할 수 있는 지뢰의 시대. 이런 시대에서 지뢰찾기라는 게임을 발명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까?
1989년, 지뢰찾기라는 게임이 발명되기 이전의 전쟁들에서는 굉음이 났다. 절대적인 시간이 쓰였고, 시끄러웠고, 사람들은 주목해야 했고, 누군가는 시위했고, 또 그에 따라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지금은 조용한 전쟁들이 상시 진행 중이다. 언제 어디서 전쟁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숨겨진 지뢰를 찾는 게임은 과연 유희로서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안전한 격자와 컴퓨터 스크린, 클릭과 이모지 안에 갇힌 지뢰라는 것이 즐거울 수 있을까?
지뢰찾기에는 규칙이 있었다. 친절함이 있었고, 그럼에도 느슨함과 무심함의 미덕이 있었는데. 지금의 지뢰는 정반대로 향하는 것 같다. 규칙도 없고, 친절함은 찾아볼 수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심함보다는 소름 끼칠 정도의 세심함이 깃든다.
마우스를 옮길 플레이어조차 사라진 시대의 지뢰찾기… 누가 폭탄에 괴로워하는 노란 이모지의 얼굴을 위로할 수 있을까?
② 하니 아부 아사드, <천국을 향하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