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5호 > 에디터스 레터 > 
편집자 제리 룬가드의 이메일
👤유유민

이번 5호를 준비하면서는 여러 가지 변화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실 ‘탈플랫폼’ 호의 기획은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2000년대 초중반의 영화 홈페이지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했습니다. 영화가 개봉하면 그 영화의 성격을 닮은 작은 홈페이지가 생기던 시절이 있었지요. 플래시 버튼을 누르고, 캐릭터 소개 페이지를 넘기고, 배경음악이 재생되기를 기다리던 시절. (저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의 홈페이지를 특별히 무척 좋아했습니다…)

4월 초, 이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2010년대 이후 한국의 인터넷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포도와 함께 곧장 본격적인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혹은 실재하는 인생에도 알고리즘이 존재하는 것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레 <번지점프를 하다> 홈페이지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큰 화제가 되었고, 누리꾼들은 저와 같은 기억을 소생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정말로 희소한 주제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월드와이드웹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듯한, 마치 자각몽을 꾸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거든요.

그럼에도 이 이야기는 여전히 해야 마땅한 이야기였습니다. 비록 애초의 신선함은 좀 잃었을지라도, 여전히 거기에서 시작해 포도와 제가 최근 맹렬히 토론하기 시작했던 ‘탈플랫폼의 필요성’에 대한 주장들로 확장해 가는 권호를 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다면 당시 인터넷 속에서 영화 주인공들의 방과 우편함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영화마다 자기 몸에 맞는 문과 복도와 대기실을 따로 갖고 있던 시절에 관하여 묻고 답하는 자리를 가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 시도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연락은 닿지 않거나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멀어졌고, 누군가는 이제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었으며, 혹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희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도 말이에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찾고 있던 것은 스무 해 전의 홈페이지였고, 홈페이지란 대체로 집보다 빨리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4월 마지막 주까지도 유의미한 컨택포인트를 잡는 데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탈플랫폼의 때가 왔다는 선언은 유효합니다. 00년대 영화 홈페이지에 관한 회고에서 출발한 기획은, 어느새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와 OTT와 알고리즘과 뉴스레터와 개인 홈페이지와 이상한 웹앱과 작업실에 관한 이야기로 번졌습니다.

이번 호의 교환일기에서 신포도와 유유민은 인스타그램을 변기에 넣고서 내리는 상상으로 시작해,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찾아 헤매고, ‘릴스’를 비행기로 접어 날리는 프로세스를 고민하고, 뉴스레터라는 허공의 모양을 따져보고, 바이브 코딩으로 직접 만든 조악한 도구들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특집 코너인「지시문을 찾아서」시리즈에서는 플랫폼 바깥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규격 외의 인터페이스들, 요컨대 안내문과 경고문과 표지판과 금지문을 들여다봅니다. 또한 박귤은 이문동의 이상한 주점 ‘젠바’와 나고야의 선술집을 떠올리며, 낯선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 앱의 매칭이나 알고리즘 추천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젠바’의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한 심준보는 교사를 그만두고 의대생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레일바이크에 빗대어 그려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월간차지』 홈페이지도 대대적인 리뉴얼을 마쳤습니다. 두 달 내내 ‘탈플랫폼’에 대한 대화만을 나누다 보니, 매끈매끈한 웹을 구현하기 위해 들여온 노력이 너무나 사치스럽고 알량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글을 자유롭게 분류하고 또 모아볼 수 있는 ‘얼리 웹(early web)’의 형태로 돌아갑니다.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그것이 매력이라고 여겨 주세요.

더불어 『월간차지』 바깥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4호의 에디터스 레터에서도 예고했듯, ‘공간차지’가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계정 이름이나 농담이나 언젠가 할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방이 생겼습니다. 바닥이 있고, 책상이 있고, 싱크대가 있고, 언제나 근사한 음악이 흐르며, 영화 보고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고양이를 데려올 수도 있는 공간이지요. 벽돌과 자작나무로 세상에서 가장 멋진 책상과 책장을 뚝딱뚝딱 만들어 준 성준과 로안, 시기적절하게 아름다운 가구들을 나눔해 준 당근 이웃들, 개업 축하 선물로 바나나 한 송이를 사다 주신 자이부동산 성복 아저씨와 선뜻 케이크를 내어 환대해 주신 우따필스 사장님,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으로 예쁜 커튼을 보내 준 수낭에게, 낙뢰에도 끄떡없는 특급 멀티탭으로 작업실의 안전을 보장해 준 성아와, 가로등처럼 근사한 장스탠드를 선물해 준 유리와 자랑에게, 액막이 명태로 우리의 액운을 원천 차단해준 유림에게, 마지막으로 시처럼 아름답게 걸음마다 꽃 피어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뱅갈고무나무 화분을 들여주신 포도의 부모님께 저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사랑과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모든 편집을 마친 뒤에는 영원히 미루고만 싶었던 퇴사자들의 컴퓨터 파일 정리하기를 마쳤습니다. 칼의 ‘업무 외’ 폴더에서 「개인 혹은 문예 칼럼에서 ‘칼럼니스트라는 인물상’이 수사 전략으로 기능하는 방식(The columnist-character as a rhetoric strategy of the personal or literary columns)」을 스캔한 pdf 파일이 다섯 개나 중복으로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그러다 제리의 임시저장함에서 레지나 펠렌지에게 보내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 이메일 초안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실제로 이 메일이 발송되었는지나, 레지나가 답장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초안에는 지난 한 달 동안 편집부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월간차지』가 왜 이제 저 유유민과 신포도, 두 사람의 체제로 재정비되었는지가 제법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에디터스 레터에서는 긴 설명 대신, 제리의 허락을 구해 이 메일 초안을 수록합니다. 사적인 서신이며, 전체 열람용 공개를 염두에 두지 않고 쓴 글이므로 사실과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만, 대체로 사실임을 말씀드립니다. 『월간차지』는 계속 발간됩니다.

제리가 직접 보내준 보낸메일함 스크린샷. 이를 통해 레지나에게 실제로 메일이 전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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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제리 룬더가드Jerry Lundegaard
수신: Regina Pelenghi
제목: 퇴사 인사 및 마지막 원고 송부 요청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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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나 펠렌지 선생님께.
이 이메일을 마지막으로 저는 『월간차지』의 편집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배관 기술을 배우기 위해 직업학교에 입학합니다. 갑작스럽게 들리실 수 있겠지만, 저는 오래전부터 파이프와 밸브, 수압과 누수, 배수구의 우직하고 견고하며 말수 적은 성정에 매혹을 느껴왔습니다. 또한 원고의 마감보다 막힌 세면대를 더 확실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잡지를 만드는 일도 배관 수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요. 물 새는 문장을 찾고 머리카락 걸려 막힌 배수로를 뚫어, 독자의 화면까지 무사히 글을 흘려보낸다는 점에서요. 저는 마지가 ‘이번 달 권호에서는 모든 페이지를 대각선으로 읽히게 하자’고 주장했을 때나, 칼이 회의 중 불안한 표정으로 신발을 벗고 복사뼈 부근에 난 종기를 긁었을 때, 허지람 디자이너가 표지 시안을 38개나 만들었지만 결국 우리가 실물 잡지가 아닌 웹진을 내기로 결정되었을 때 짓던 찰나의 표정 같은 것들을 떠올립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도 곧 알게 되시겠지만, 『월간차지』 편집부는 재정비를 거의 마쳤습니다. 저는 배관공이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나고, 마지는 사무실의 뱅갈고무나무 화분에 너무 많은 물을 준 책임을 지고 퇴사했으며[편집자 主: 물론 농담이며, 사실은 유망한 패션지의 피쳐 에디터 자리로 적을 옮겼습니다], 칼은 우연히 회식 자리에서 ‘제갈스 불바비큐’에 들른 뒤 여생을 브라질식 바비큐인 슈하스쿠에 바치고 싶다며 사표를 제출했습니다[편집자 主: 아직 수리되지는 않은 상태이나, 이미 떠난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디자이너 허지람은 “그리드는 감옥이다” 비명 지르고는 노트북 충전기만을 챙겨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편집자 主: 이것은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대표 편집자였던 유유민 씨가 ‘위험할 정도로 생산적인 필자(The dangerously productive contributor)’로 오랜 시간 활동해 온 신포도 씨와 의기투합하여 『월간차지』를 공동 발행하게 될 예정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원고는 인공지능 따위가 빼앗을 수 없는 기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고를 AI로 번역하고 있자면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되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부디 계속 사람들에게 일러주세요. 이번 달에는 어떤 맛의 사탕을 먹어야 하는지, 어떤 향수를 뿌려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먹고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지를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리 드림

추신. 저는 물병자리입니다. 배관 쪽으로 가도 승산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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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유유민 5호 탈플랫폼 편집실


Updated 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