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5호 > 직업탐구 > 
교사 그만두고 의대 간 사람
부제: 레일바이크를 타본 적 있는가?
👤심준보

당신은 레일바이크를 타본 적이 있는가?

기차가 다니는 철도 같은 것에 자전거가 얹혀 있어서, 힘차게 발을 구르다 보면 레일이 미리 깔린 풍경이 멋진 바닷가를 내달린다. 적어도 작년까지의 나의 삶은 그런 레일바이크 위에서 페달을 밟고 있는 형세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버린 우리는 나이가 들 때마다 새로운 도전 과제를 부여받곤 한다. 학생일 때는 공부, 대학에 와서는 취업, 취업하고는 결혼, 결혼하고는 출산과 육아 같은 통과의례들 말이다.

나는 꽤나 순종적인 사람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할 때 공부를 했고, 꽤 좋은 대학의 사범대에 들어갔다. 졸업전에 임용고사를 쳐서 졸업과 동시에 교사가 되었다. 누구는 순탄하다고 말하겠지만, 마음 한편엔 무언가 ‘될만한 도전만 한다는(?) 기분’을 지울 순 없었다. 주변에 너무 잘난 사람이 많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남자 고등학교로 발령받았다. 이론상 군대를 다녀온 남자 교사는 나보다 어릴 수 없으므로, 막내의 삶이다. 하지만 학교란 곳은 특이하게도, 모두가 한 번씩은 경험해 본 곳이라, 신입임에도 그리 새롭지 않다. 그저 교실에서 위치만 교탁 앞으로 바뀌었을 뿐,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다.

수업은 어렵지 않다. 아마 적당히 공부를 잘하는, 혹은 말주변이 보통 이상 정도 되는 대학생을 가져다 놔도 교사들처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학생들의 의지가 없다면 현우진, 이지영이 와도 똑같다는 점이다. 처음 시험문제를 낼 때는, 정말 근사하고, 학생의 암기력과 사고력을 적절히 평가할 수 있는 문제를 내려 애썼는데, 이상하게 모든 시험의 평균이 비슷했다. 약 33점(당연히 100점 만점이다). 게다가 15.3점처럼 소수점도 같은 동점자가 너무 많아서, OMR을 확인해 보니 한 번호로 찍은 학생들이 한 반에 8명가량 있는 걸 보고 수업의 욕구를 잃은 듯하다. 변명 같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학교가 싫은 건 아니었다. 이만한 워라밸을 보장해 주는 직업은 흔치 않다. 급여는 만족스럽진 않지만, 독신 남성이라면 먹고살 만하다. 퇴근도 무척 빠르고, 물론 방학도 있다. 학교에서 나의 쓸모도 찾아갔다. 군대에서 갈고 닦은 엑셀 실력이 나를 ‘일 잘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고, 남자 고등학교에 있는 수많은 무뢰배를 가둘 울타리 노릇을 큰 어려움 없이 해냈다. 적당한 보람이 느껴진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 시간이 갈수록 매너리즘이 올 것이 자명했다. 급여의 상승은 기울기가 낮은 일차함수를 그릴 테고, 학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 중 하나인 ‘젊음’도 결국 사라질 것이다. 그 예상이 아주 명확해졌을 때, 레일바이크의 페달을 멈추고, 걸어온 레일을 돌아보았다. 어쩌면 그간 걸어온 레일이, 실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은 겁쟁이의 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난 스스로 과감하지 못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대차게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학생들이 수시를 쓸 때, 10년 된 생활기록부를 다시 발급받아 같이 원서를 쓰고, 수능을 쳤다. 수능 감독관에서 제외되어야 했기 때문에, 동료 선생님과 교장, 교감님께도 이야기를 했다. 적잖이 당황은 하셨는데, 응원해 주셨다. 의대 원서를 넣었다. 넣은 뒤에도 얼떨떨했다. 될지 안 될지조차 예상하지 않았다. 되면 갈지 안 갈지조차 정하지 않았다.

대학원에 가던 길에 의대 1차 합격 문자가 왔다. 그 주 토요일에 면접을 보러 오란다. 직장, 대학원, 입시를 병행하려니 현타가 왔다. 새로운 걸 쥐려면 무언가를 내려놔야 하는데, 아무것도 놓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의학 적성 면접’①이라는 것도 처음 들어봤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어차피 준비가 안 될 것 같아서, 생물 선생님에게 수능 특강을 빌려 개념만 훑었다. 챗GPT가 있으니 할만했다.

금요일 퇴근 후 기차를 탔다. 서대전역에 내려, 허름한 여관에서 잠을 잤다. 지원동기를 고민하다 보니 도무지 자신이 없어져서 담배도 태웠다. 면접은 전공, 발전 가능성, 인성 분야로 나누어 세 개의 방에서 진행한다. 이제는 기억도 흐릿하지만, 제시문에서는 혈관 생성을 막는 성분이 포함된 신약이 항암제로써 쓰일 수 있겠냐는 질문이 나왔다. 신기하게도 예전에 유튜브에서 본 ‘대왕고래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는 내용의 영상②이 떠올라, 혈관 생성을 막는 것이 항암을 도울 수 있다는 식의 대답이 술술 나왔다.

앞으로는 무슨 연구를 하고 싶냐는 말에는 ’헬스를 좋아해서 불법 약물 소식을 많이 들었는데, 호르몬이 참 신기하다고 생각해서 내분비내과 연구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말이었는데 그냥 나왔다. 교사로 일하면서 ‘아는 척하는 데 도가 텄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인성 면접은 더 기묘했다. 사실 두 번째 방에서 진행된 면접에서 “고등학생 때 무슨 활동을 했냐”는 질문에 “없습니다”라고 답해버려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비우고 세 번째 면접에 들어갔는데, 인성이 훌륭해 보이는 남자, 여자 한 분이 앉아계셨다. “자녀의 결핵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을 설득해보라”는 질문에, “설득이란건 연기를 해보란 말씀이신가요?”라고 답했다. 교사 임용고사가 가상의 청중을 두고 “누가 대답해 볼까?”를 묻는 연극 같은 시험이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나왔던 말이었다. 여자 교수님은 박장대소하며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셨고, 나는 그 여교수님을 쳐다보며 “어머님~ 요즘은 백신이 잘 나와서 흉도 안 져요~”로 시작하는 연기를 했다. 한 편의 스탠딩 코디미쇼 같았던 면접은 그렇게 끝났다. 아무튼 취향이 이상하셨는지 나를 합격시키셨고(그 여자 교수님이 “이 새끼 재밌는데 뽑죠”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고민 끝에 사직서를 냈다. 다시 대학생이 됐다.

나이 많은 대학생이 되는 일은 무척 신기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신입생 중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고, 내 또래도 꽤 된다. 교사 출신도 무척이나 많다. 그나마 문제가 되는 것은 나는 문과라는 것인데, 1학년이라 별로 어려운 건 없다.

나는 늘 사회 분야를 공부하면서 ‘쓸모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특히나 교육 분야는 더욱 그렇다. 사람이 중요하지, 떠드는 내용이나 방식이 중요한 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과학은 뭔가 쓸모가 더 있어 보인다. 공부도 즐겁다. 사회에서는 아무리 멋들어진 이론도 ‘의견’이지만 과학은 ‘사실‘이니깐. 사회의 모든 이론이 끊임없이 정반합의 굴레를 수백 년 굴리는 동안, 과학은 하나의 진보 사슬을 이어 나간다. 과거에도 사실이었던 것이 뒤늦게 밝혀지는 것뿐이다. 호기심이 또 다른 발견을 낳고, 그것이 또 다른 호기심으로 이어지고… 나는 이 사슬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굳이 꼽자면 선배가 나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이 조금 불편하긴 하지만, 사회에는 그보다 더 불편한 일 천지다.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뿐이다. 다만 몇 년간 ‘연애하긴 힘들겠구나’ 정도의 푸념은 있다. 뭐,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려놔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가 엄청나게 빠른 교사에서 꽤 많이 늦은 의대생이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다. ‘이럴 거였으면 진즉에…’ 하는 생각을 버리긴 힘들다. 그저,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정신 승리 하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분명히 후회하는 순간은 올 테다. 그때도 변태같이 정교한 정신 승리로 극복해버리면 되는 일이다.

① 의사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가치관, 인성, 논리적 의사소통 능력을 평가하는 과정.
② 준보의 보충 설명: 암 자체는 나쁜 게 아니라 그냥 무한 증식 세포인 거예요. 암 세포가 무한 증식하면서 혈관을 생성하고, 그게 장기의 영양분을 빼앗아서 장기 기능을 마비시키기 때문에 암이 병인 건데요. 대왕고래는 몸이 엄청나게 크니까 암이 장기 기능을 마비시키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요. 결국 암세포가 자라다가 암세포의 암세포 때문에 암이 죽게 돼요. 뭐… 그런… 가설이에요. (참고 링크)


Tags: 심준보 5호 직업탐구 교육


Updated 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