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탐구
패션 마케터 유리 씨는 구직 중!
김유리
브랜드는 늘 생겼다가 사라진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브랜드가 갑자기 뜨기도 하고, 한때 잘 나가던 브랜드가 말없이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퇴사를 하던 날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모든 조건을 비교하고 최적의 조건인 회사로 이직하겠다고. 그런데 막상 쉬다 보니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노는 건 정말 좋지만 상상 이상으로 심심할 때도 있고 내가 지금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만 빼고 다들 열심히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고, 그 사이에 나는 도태되고 있다는 기분도 가끔 든다.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거라고 되뇌며 애써 휴식의 삶을 이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누군가는 내가 휴식하는 법을 모른다고 한다.
매일 출퇴근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 새로운 곳에 많이 가보려고 한다. 핫한 카페에 여유롭게 앉아 커피도 마셔 보고, 피아노 레슨도 받고, 필라테스도 배워보고 있다. 평일 약속도 부담 없이 잡고, 국내며 해외며 연차 걱정 없이 여행을 가고. 하지만 마케터에게 업무에서 완전히 오프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카페에서도, 여행지에서도 공간의 꾸밈새나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다음 시즌의 룩북을 상상하곤 하니까.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이런 생활이 물론 너무 좋지만, 모아둔 돈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니 마음 편히 돈을 쓰기 위해서라도 재취업이 필요하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퇴사한 지 한 달 반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해 본다.
가장 먼저 고려해 본 건, 안정적인 중견기업, 혹은 대기업에 속한 브랜드이다. 브랜드의 취향이 나와 맞지 않을 수는 있지만,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역할이 잘 정리되어 있고, 왠지 연봉도 잘 맞춰줄 수 있을 것 같고, 복지도 좋을 것 같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가장 안전한 선택인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재미없을 것이라 넘겼을 테지만 이제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다음은 요즘 눈에 띄는 라이징 중소 브랜드. 성장 곡선도 보이고 다양한 기회도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 성장 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지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업무 범위는 무한하고, 의사 결정은 빠르게 바뀌고 야근도 책임도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성장의 기회는 있겠지만 그 힘들었던 과정을 또 겪어낼 수 있을까 조금은 망설여진다.
최고 인기 절정의 브랜드도 있다. 겉으로는 가장 화려하게 보일 수 있는 선택지이자, 그곳에서 일하는 나도 잘 나가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뽕’을 맞을 수 있는 곳. 하지만 괜히 보이지 않는 텃세가 있는 건 아닐지, 브랜드의 인기를 감당해 내며 더 성장할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진 회사일지, 아니, 그 인기를 유지라도 할 수 있는 수준의 회사일지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인기 브랜드와 라이징 브랜드의 경계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다. 라이징의 단계를 넘어간 이들 브랜드는 대개 확장과 유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팬덤은 생겼지만 대중성은 부족하다든지, 투자는 받았지만 수익 구조는 불안정하다든지. 마케터인 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도전 과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아마도 빠르게 소모될 것이다. 브랜드만의 무드는 지켜내면서, 동시에 매출이라는 성적표도 증명해 내야 하는 상황. 결국 내 감각과 체력을 동시에 갈아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덜컥 드는 것이다.
그리고 신생 브랜드는 고민도 없이 제외한다. 이제는 재미와 기대만으로 다음을 선택할 상황이 못 된다. 차라리 내가 브랜드를 만들겠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내가 우려하는 것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요인일 확률이 더 높다. 어딜 가도 결국 모든 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 회사 바이 회사니까. 또한 회사 선택은 브랜드의 이미지나 규모만으로 결정되진 않는다. 연봉, 복지, 계약 조건, 팀 구성 등등 실제로 일하면서 밀접하게 체감하는 요소들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 말고도 직무적으로 고려해야 할 부분들도 많다. 패션마케터가 다루는 범위는 생각보다 넓고 모호한 요소가 많은데, 브랜딩, 퍼포먼스①, CRM②, 콘텐츠 등… 회사마다 요구하는 역할도 중요도도 다를뿐더러 직무의 이름이 같다고 해도 회사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역량을 키우고 싶은지에 따라서 가고 싶은 곳을 정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하우스 패션마케터로 일하면서 스페셜리스트로 성장하기란 매우 어려운 구조인 것 같다. 회사마다 업무 범위가 너무 다르기도 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도 다르다. 이전 회사에서 쌓은 경험이 다음 회사에 무조건 통하는 것도 아니다. 다행인지 성향상 나는 한 가지 일을 깊게 파기보다는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일하는 쪽이 훨씬 즐겁다. 첫 직장부터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이쯤 쓰다 보니, 위에서 언급한 조건들을 하나하나 맞추다 보면 갈 수 있는 회사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브랜드의 정체성이 확실한 곳이거나 그렇게 만들어 갈 의지가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브랜드의 콘셉트와 지향점이 명확하고, 디렉팅에 있어 어느 정도의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결국 패션 마케팅의 정수는 ‘팔리는 브랜드’를 만드는 데 있다. 디자이너의 고집과 철학을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포장하고, 자칫 짜치게 느껴질 수 있는 할인 프로모션조차 브랜드의 감각 안에서 자연스럽게 소화되도록 기획하는 것. 감도와 숫자를 동일 선상에서 보아야 하며,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가져가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 최적값을 찾아내는 감각적인 균형이야말로 내가 다음 회사에서 어필하고 싶은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리고 그 균형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들과 일할 수 있는 환경도 중요하다.
일을 쉬고 있는 지금의 일상에서도, 습관적으로 플랫폼 랭킹을 보고 업계 기사를 주시한다.
언제 어떻게 쓸 지 모르지만 내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에는 레퍼런스 콘텐츠가 넘쳐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여전히 남의 브랜드를 관찰하며 다음 장면을 상상하는 나를 마주하곤 한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나는 이 일을 꽤나 좋아하고 있는 것 같다. 과연 나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가 될지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이 공백기가 끝날 즈음엔 내가 뭘 원하고 뭘 잘하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다음 장면이 대기업의 번듯한 사옥이든, 성수동의 공유 오피스든 상관없다. 내 고집이 어느 정도는 통하는 곳에서 즐겁게 일할 수만 있다면.
기회가 된다면 「패션마케터 유리씨는 업무 중」으로 다시 돌아오겠다.
②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고객 관계 관리'의 약자로, 기존 고객의 구매 이력이나 성향을 분석하여 맞춤형 혜택을 제공하거나 재구매를 유도하는 마케팅 활동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