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8호 > 엔시티피케이션 특집 > 
문예비피케이션 上
(부제: choc choc choc, mix mix mix)
👤유유민


♣ 일러두기
『문예 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케네스 골드스미스, 워크룸프레스, 2023)에서 발췌한 내용은 문장 앞에 괄호로 페이지수를 달아 표기하고 볼드 처리했다. 『엔시티피케이션』(코리 닥터로, 흐름출판, 2026)에서 발췌한 내용은 별도 인용구로 기재하였다. 또한 쓰다 보니 할 말이 너무 많아진 데다 분기된 주제들을 묶는 일도 마음처럼 되지 않아, 과감하게 본 글을 상하편으로 나누기로 하였다.


◆ 들어가며

나는 도무지 『문예 비창작』에 대한 마음을 가늠하지 못하겠다. 여러분이 믿어 주든 아니든 간에, 이 책은 내가 약 15년만에 처음 제대로 통독한 책이며(그 사유에 대해서는 조만간 『월간차지』의 특집 기획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온갖 매체의 아티클을 참조해 가면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대에 책 읽는 기쁨은 이런 것이구나 탄복하게 만든 책이며, 이상할 정도로 나의 관심사에 밀접했던 것은 물론 나의 탐구심과 호기심을 초등학교 4학년생처럼 요동치게 만든 책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15년 만에 '제대로 책을' 읽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이토록 재미있었는데 나만 모르고 살았던 것인지, 아니면 유독 이 책이 정말 황당할 만큼 재미있었던 것인지 죽도록 궁금하다.

이 글은 서평이 아니고, 『문예 비창작』과 『엔시티피케이션』을 읽고 흘러나온 '타령'①이다. 두 책에서 인용하거나 발췌한 내용은 기겁할만큼 많다. 그래서 여러분은 이 글을 거의 콜라주나 패스티시, 심지어는 (38)일련의 대필 작업에서 뽑은 인용구 덩어리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심지어 여러분은 내가 인용과 발췌의 형식을 빌리지 않고 그들의 말을 내 방식대로 지어내 쓰는 일까지는 차마 캐치하지 못할 것인데, 이러한 작업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내가 비겁하거나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32)혁신과 모험 감수를 통해 훗날 보상받기 위한 (30)전유의 시도임을 밝히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이 글은 (15)졸업 논문이나 박사 논문이 아니므로 그냥 멋대로 써도 물의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27)우리는 기술이 삶의 모든 측면에서 게임의 법칙을 바꾸는 시대에 살고 있고, 지금은 그런 진부한 기법(클리셰)을 캐묻고 무너트려 앞에 내려놓은 다음 창조성에 대해 쌓아 온 미련을 새롭고, 동시대적이며, 무엇보다 결정적으로는 적절한 것으로 재구축할 때다. 인용과 발췌가 많다는 것은 이 글이 두 책의 대필이나 요약본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 글은 그냥 메모의 누더기일 수도 있지만, 여러분이 얼마나 너른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파라텍스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말해두자면, 파라텍스트가 (60)새로운 글 전체가 동요에 버금가게 중요해진 시대다.

생산된 글은 일단 죽는다. 이미 출판된 것에 관해 말하는 일, 이를테면 비평은 심폐 소생이다. 이미 출판된 것에서 촉발된 새로운 말들, 이를테면 담론은 부활의 흑마술이다.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어찌할 수 없다'라는 모두의 격언은 시시각각 덧붙일 말과 개념이 증폭되는 동시대에 더욱 강도 높게 유효하니, 우려하지 말고 이 글을 읽어도 시간 낭비는 아닐 것이다.

▨ (21)보아하니 대부분의 글쓰기가 인터넷이 생긴 적이 없던 것처럼 계속된다.
스팸 메일, 위키백과의 토론 역사, 인스타그램 캡션, 먼 옛날 옛적의 ‘안경척’들이 쓰던 '페이스북 소신글'이나 트위터(미안해요. 일론 머스크)의 인용 게시물이나 블로그 포스팅, 카카오톡 메시지, 자바스크립트의 오류를 알리는 안내문은 글로서 인정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크린에서 그래픽, 소리, 움직임이라고 부르는 것 아래에도 (36)끝도 없이 이어지는 언어가 존재한다. 소스 코드이든 UX 카피라이팅이든 조각 글이든 간에 그것들은 뭐랄까... 웹을 떠돌아다니는 찌꺼기 텍스트로 취급당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53)다운로드가 완료되면 데이터는 영화나 음악 파일로서 "빙하, 빙산, 부빙(浮氷)의 고체성"을 찾는다. 편의상, 이 글에서만큼은 앞으로 웹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텍스트들을 웹글이라고 명명하겠다. 저자인 케네스 골드스미스는 자신의 또 다른 글 “마음껏 인터넷에서 시간을 낭비하세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짧은 대화와 빠른 이모티콘으로 이루어진 대화도 엄연한 대화입니다. 누군가가 빠르게 문자를 주고받는 동안의 얼굴 표정을 보세요. 기대감, 웃음, 감정 등 온갖 감정이 가득합니다.

수십억 인구가 매일 자신의 생각, 과업, 식사 약속과 광고와 험담을 웹글로 생산한다. (281)이 짧게 터져 나오는 언어는 중국 상형문자, 하이쿠, 전보, 신문 머리기사, 타임스퀘어의 뉴스 전광판, 광고 문구, 구체시, 바탕화면 아이콘 등으로 유구하게 이어져 온 언어 축약의 최근 사례다. 여기에는 압축이 가져오는 긴박감이 있다. 누가 아침 식사로 뭘 먹고 있는지처럼 가장 일상적인 트윗조차 속보 같은 느낌을 준다. 웹 이전에 이런 것들이 글의 형태로 생산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낙서, 일기, 전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쉽게 구겨지고 찢어지고 휘발되었다. 이토록 대규모로 기록되고 공개되고 복제와 검색이 가능한 글의 형태로 축적된 적은 없었다. (88)하루 동안 사람들이 입 밖으로 낸 모든 말이 어떻게든 눈으로 물질화된다면, 매일 심한 눈보라가 칠 것이다. (50)우리가 이토록 많은 물질성, 즉 유동성, 유연성, 가소성을 지니고 작가에게 적극적으로 다뤄 주기를 요청하는 언어를 소유한 적이 있었던가? 디지털 언어가 나오기 전에 글은 거의 언제나 지면에 구속된 채로 존재했다. 모두가 쉽게 간과하고 있지만, 이는 분명히 새로운 형태의 문예처럼 보인다.

(33)오늘날 글쓰기는 이런 시기에 놓였다. 웹이 부상하며 문예는 자신의 사진을 만났다. 현실을 복제하는 데는 사진이 훨씬 더 나은 기술이었기에 살아남기 위해 회화는 노선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했다. 사진이 선명한 초점을 얻고자 분투했다면 회화는 흐릿한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인상주의가 등장했다.

더 이상 글이 부족하지 않은 때에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인상주의 같은 기깔나는 사조를 문예의 대지에 피워낼 수 있을까? 『문예 비창작』은 불경한 자세로 중얼거린다.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126)choc choc choc. 이미 있는 것을 복사하라, 옮겨라, 지워라, 변환하라, 배열하라, 심지어는 마음대로 누락하거나 왜곡하라. (133)그들은 계속합니다. 결국 해야 할 일은 출판물뿐만 아니라 제록스로 복사할 필요성까지 없애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언제든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게 작업을 전화기와 연결해야 하고요. 지울 수도 있어야 하는데, 호메로스 책이 셰익스피어 책이 될 수 있게 말이지요. 으음? 빠르게 지우고 빠르게 인쇄하면요, 으음? [...] 왜냐하면 그것이, 전자적 즉각성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 choc choc choc, mix mix mix
글은 이제 세상의 속도만큼 기민해야 현재를 말할 수 있다. 현실의 장면을 복제하는 역할을 사진이 빼앗아 온 경위는 그것이 기민하고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왜 웹글은 문예를 위협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웹글들은 기민한 기술들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다룰 줄만 알면 우리는 초 빠른 속도로 뭔가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생각하는 속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만큼 빠르게 글을 쓸 수 있다. 이조차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생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50)디지털화한 언어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용기에 쏟아부을 수 있다. 이미 있는 글을 옮기고 복사하고 지우고 변환하고 재배열하면 손쉽게, 그리고 순식간에 다른 타깃에게 그 내용을(혹은 형식까지도) 공급할 수 있다.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대단한 문장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하는가? 나는 화면을 캡처한 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문장에 마크업을 하거나 그 문장만 보이도록 크롭하여 친구에게 전송한다. 나는 내가 원본을 공유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컨대, (62)이런 생태계에는 최종본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크 오몽은 무슨 생각으로 영화라는 신세대 문물에 '원본'을 운운하였단 말인가? 그렇지, 내가 비정했다. 오몽은 1942년생이었지. 동생들이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어야만 한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탈고가 최종본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편집자의 교열조차도 원론적으로는 리믹스라는 사실을 말이다.

리믹스의 스펙트럼은 이토록 넓다. 저자는 타자로 필사하기, 손으로 베껴 쓰기의 과정에서도 글의 원본이 변화한다고 보았다. 버네사 플레이스Vanessa Place라는 작가는 본디 변호사를 본업 삼고 있는데,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주요한 업무는 (160)난잡한 삶과 더러운 행위를 법정에 제출할 ‘중립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퇴근 후 귀가한 플레이스는 낮에 다루었던 불미스럽고 냄새나는 사건들을 문학으로 재구성한다. 이를 위해 플레이스가 (164)가장 먼저 하는 일은, 법조계가 요구하는 (그가 ‘권위를 나타내는 작은 견장’이라 부르는) 세리프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그 문서에 법정에 속한 문서와는 다른 역할을 부여한다. 그렇다. 폰트를 바꾸는 것조차도 리믹스다. 그렇다면 당연히 원본과 다르게 줄바꿈 하는 것도 리믹스다. 또는 (243)단순히 필요를 느끼는 부분에다가 낱말을 슬쩍 집어넣음으로써 새로운 텍스트를 쓸 수 있다.

저자는 밀레니엄의 어느 날 『뉴욕 타임스』를 타자 필사하기 시작했고,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186)누가 봐도 분명하게 '타임스 뉴 로먼'을 쓰는 게 좋을까? 그런데 그러면 원본 출판물에 나의 바람보다 더 많은 신빙성을 부여해 이 책을 해당 신문의 시뮬라크럼이 아니라 복제물처럼 보이게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버다나 같은 산세리프체를 써서 이 문제를 회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버다나를 적용하면 책을 종이와 화면의 격전지 쪽으로 과도하게 밀어 넣는 게 아닐까? 버다나는 화면용으로 디자인된 서체인 데다가 그 지식재산권은 마이크로소프트에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구태여 지금보다 더 마이크로소프트를 후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박수를 쳤다. 『월간차지』 5호에서 편집부 역시 같은 혼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플랫폼 바깥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온갖 물리적 지시문을 찾아 한 달간 전 세계를 헤맸고, 엄선된 지시문을 웹글로 베껴 쓰는 작업을 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홈페이지를 구축하며 우리가 제한해 둔 서식 내에서 어떤 변주와 띄어쓰기, 행갈이, 미세 조정을 거쳐야 실제 지시문과 가장 유사한 임프레션을 줄 수 있는지를 나름대로 연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또한 웹글로는 애초에 구현할 수 없는 것(이를테면, 글자를 고칠 때 가위 표시를 덧칠한다든가 하는)은 어떤 방식으로 갈음해야 원본과 가장 흡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자칫 서식을 잘못 선택하면 의미 자체가 흔들렸다. (112)불안정성의 형식적 문제 너머에는 의미의 미끄러짐이 존재한다. [...] 이미지는 항상 움직이며 자신의 형태와 속성을 바꾼다. 오리-토끼 착시 현상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미지를 정지한 채 머무르게 할 수 없을 듯하다. 크기 또한 내 생각에는 우주적으로 거대한 것(화성)에서 미시적인 것(적혈구)까지 가변적이다.

이러한 방식의 리믹스가 창작일 수 없다는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175)콜라주한 요소를 손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식으로도 구성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 힘을 강화한다고 말이다. (245) 이것은 새로운 것인가? 언제나 글로 쓴 것이든 말로 한 것이든, 크고 작은 사건에 관한 풍자와 리믹스가 있지 않았나? (174)모두 전에 하지 않았던가? (246)그러나 이렇게 빠르고, 민주적이며, 기술적으로 관여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의 원전이 처음 출간된(2011년) 이후에도 세상이 한참 변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빠른 것, 민주적인 것, 기술적인 것 모두가 극단적으로 부상한 시대에 이는 진정한 ‘다시 짜기(reframing)’도, 능동적 창조도 아닐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함이란 무엇인지를 개념화하기 전에는 나의 주장 역시 입증할 수 없다.

▣ 나가며
정 없이 끝내는 대신, 하편의 내용에 관하여 살짝 운을 떼고 넘어가겠다. 수천억 개의 웹글 가운데 일부를 우리는 ‘글’로 인정한다. 어떤 웹글이 글로 부상하는가?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두께? 길이? 단어 선택의 신선함이나 배경지식의 풍부함? 아니다. 놀랍게도 그 구분자는 글쓴이의 권위다. (이 대목에서 분명 여러분 중 몇몇은 스스로에게 정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차라리 좀 낫다. 그리고 사실 새롭지 않다. 저자의 권위가 그저 그런 글과 대단한 글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 건 고릿적이다. 글쓴이의 권위가 곧 글의 권위가 되는 것은 솔직히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은 바로 그 당연한 권위조차 흔들어놓을 수 있는 혁명적인 매체였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쏟아지는 웹의 잡다한 텍스트들은 왜 새로운 문예 형식으로 폭발하지 못했을까? 분명 인터넷이 저자의 권위를 약화시켰음에도, 어째서 상황은 여전한가? 저자라는 문지기가 약해진 대신 다른 문지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더 끔찍한 구분자는 중개상이 있었는지의 여부다. 중개자라는 문지기는 앨리스의 카드 병정처럼 창을 들고 서 있다.

그리고 이것이 증거다. 무엇의 증거냐고? 플랫폼에서 하루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탈권위의 미래는, 새로운 문예 형식의 발명은, 디지털 혁명을 아득히 넘어선 지금 인간의 글쓰기가 생존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은 불가능해진다는 증거다.

[... 다음 호에 계속]


① 신포도는 이 글의 제목에도 '타령'을 꼭 넣어달라고 말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Tags: 유유민 8호 탈플랫폼


Updated 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