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9호 > 왓츠인마이백 >
깨지고 망가져도 끄떡없는 가방
👤유유민
일시: 9월 25일 오후 2시 20분
장소: 파스쿠찌 @@
@@점 (주소 비공개 요청으로 모자이크 처리한다.)
인터뷰어: 유유민
인터뷰이: 신수낭 (국회 비서관과 스타트업 운영을 거쳐 현재는 SaaS 테크 스타트업의 오퍼레이션 리드로 일하고 있는 커리어 우먼. 눈물이 많고 마음이 약하지만 외모에서 풍기는 엄청난 카리스마 때문에 못돼처먹었을 것이라는 오해를 자주 받곤 한다. 오전에는 엘지트윈스를 사랑하고 오후에는 엘지트윈스를 저주한다. 유민의 오랜 친구다.)
❶ 팬시 클럽 가방과 네로 키링❷ 회사의 물건들❸ 알로 집게핀❹ 일부세토 카드지갑❺ 무인양품 파우치와 소품들❻ 이북 리더기❼ PASTEL 인헤일러, 트레이더조 민트 캔디❽ MLB 모자❾ 논픽션 핸드크림❿ 터치랜드 손소독제⓫ 노트와 펜, 현금 2만 5천 원⓬ 펜디 선글라스와 뿔테안경⓭ 탬버린즈 헤어 퍼퓸⓮ 크래스트 화이트닝 스트립⓯ 이솝 파우치
⓰ 헤일메리 라바볼
⓱ 바티칸 묵주
⓲ 화장품들
⓳ 이소티논
⓴ 헤라 블랙쿠션
자, 시작하겠습니다. 신수낭 씨. 우선 이 가방(❶)은 언제 어디서 구매하셨습니까? 달려있는 키링까지 설명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가방은 제 가방은 아니고, 신유지 씨의 가방이고요.
신유지는 신수낭의 친동생으로,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일하고 있으며 온갖 센스있는 아이템을 수두룩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버블 패턴을 보시면, 작년에 유행했던 제품임을 알 수 있죠. 팬시클럽 제품이고요. 제가 자주 뺏어서 들고 다닙니다. 이렇게 구멍들이 있어서 키링을 주렁주렁 달기에도 좋습니다.
음, 거기에다 키링을 달 수 있군요.
그리고 이건 잔스포츠와 엘지트윈스 콜라보 키링입니다. 이 고양이 이름이 네로예요. 잠실 야구장에 사는 유명한 마스코트 고양이고요. 이 잔스포츠 가방에는 에어팟을 넣을 수 있다고 합니다. 민정이가 생일선물로 줬습니다.
민정은 신수낭의 친동생 신유지의 친구다. 신수낭과도 절친한 사이.
제가 민정이 생일에 삼성 유니폼을 사줬거든요.
아, 네.
이제 안에 있는 걸 하나씩 꺼내면 되나요?
수낭은 지친 표정으로 노트북을 꺼내들었다.
회사의 물건들(❷)부터 소개하겠습니다. 연휴에도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트북을 가지고 왔습니다. 회사 노트북입니다.
하지만 연휴에는 쉬어야겠죠?
아녜요. 일할 거예요. 해야죠.
응원합니다. 이 맥북은 언제 구매하신 제품인가요?
회사에 처음 들어왔던 2년 전에 받았습니다. 나가게 되면 반납해야 합니다.
노트북을 열어보니 빨간 양념 얼룩들이 튀어 있었다. 수낭은 답지 않게 민망해하며 어제 시켜먹은 닭불날개의 흔적이라고 말했다. 인터뷰 전날 수낭은 닭불날개를 함께 먹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부속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유민의 더 강력한 반대때문에 무산되었다. 무산 직후 홧김에 닭불날개를 곧장 주문한 것으로 추측된다.
인터뷰를 끝내고 길에서 자만추한 문제의 닭불날개.
맥북에는 보통 스티커를 빼곡하게 붙이잖아요. 비교적 심플하게 보이는군요.
저는 빼곡하게 붙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절제미가 느껴지는 수낭의 맥북.
그럼 몇 안되는 스티커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아, 이건 회사 로고 스티커고요. 이건 솔님이 사다 준 샌프란시스코 아티스트의 굿즈.
‘솔’은 수낭의 회사 대표인 Daniel Sol Eun을 일컫는다. 샌프란시스코에 거주 중인 한국계 미국인이며, 작년 연말 파티에서 유민도 솔을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잔잔바리 한국어 유머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이 스티커를 계속 탐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스티커가 지금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지층을 표현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라 지도군요.
네. 지도를 소재로 작업하는 아티스트래요. 여담이지만 샌프란시스코에 포티나이너라는 미식축구팀이 있는데요. 이 스티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샌프란시스코가 지도상 정사각형 모양이에요. 길이가 실제로 가로 7, 세로 7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7 곱하기 7 해서 49라는 거죠. 그리고 이건 솔님이 휴가 때 나사 박물관에서 사다가 팀원들에게 다 나눠준 스티커예요.
나사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습니까?
샌프란시스코에도 기지인가 연구소인가 있다고 하는데, 거기 부설된 박물관에서 이걸 판대요.
다음 아이템도 소개해주시죠.
그리고 이건 고속 충전기. 회사 개발자 분이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법인카드. 그리고 이건 회사 OTP인데요. 지난 수요일에 직원들 급여를 이체해 주어야 하는데, 제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미리 챙겨왔죠.
좋습니다. 회사에 관련된 제품들이었습니다.
이건 알로(alo)의 집게핀(❸)입니다. 미국에서 사왔고요.
수낭은 최근 미국으로 약 두달 간 오프사이트를 다녀왔다. 수낭의 회사는 기업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개선하는 솔루션을 만드는 SaaS 플랫폼인데, 부르는 대로 받아적었을 뿐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수낭의 일에 대해 좀 더 궁금해진 독자분들은 이 글을 참조해 보길 바란다. 어쨌든 미국 세일즈를 하는 팀이기 때문에 매년 미국에 단기 체류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다.
너무 예쁘다.
네. 예쁘고 존나 가벼운데, 내구성이 개쓰레기여서 안 사시는 걸 추천합니다.
점점 거칠어지는 분위기.
절대 사지 않겠습니다.
이거 6만원이거든요? 근데 이렇게 누를 때부터 이미 내구성이 약하다는 게 느껴지죠. 그냥 알로 이름값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건 지갑이군요. 무척 어렵게 구매하신 제품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네. 일부세토라는 이탈리아 브랜드 지갑(❹)인데요. 르메르랑 콜라보한 제품으로 유명합니다. 똑같은 제품을 르메르에서 사면 가격이 거의 4배라서요. 제가 이걸 사기 위해 애썼던 거죠. 그런데 비보가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엘지트윈스 야구 경기를 보러 갔는데요. ‘식세기 존’이라는 게 있거든요. 여름에 특정 구역에만 워터밤처럼 물대포를 쏘는 거예요. 거기 좌석을 잡았는데 지갑까지 다 젖어버린 거예요. 근데 이게 가죽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다 분리가 되어서. 보이시나요?
아이고, 아이고.
제가 지금 본드로 붙여놓긴 했는데 망한 것 같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도대체 야구가 당신의 인생에 주는 좋은 점이 뭐죠?
이건 그냥 숙명같은 겁니다.
수낭은 슬픈 눈으로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유민은 도저히 수낭의 야구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평소에 그녀가 유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분석한다면 틀림없이 엘지트윈스의 선수들은 다음 중 하나다. 부모의 원수,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 수낭의 윗집에 사는 층간소음 유발자.
이 파우치 멋지네요. 칸이 나누어져 있어 실용적이고요.
일본 무인양품에서 사온 파우치(❺)인데, 품절템이라고 합니다. 8천 원인가에 샀던 것 같아요. 구성이 아주 좋습니다. 여기에 립밤과 립스틱을 넣어 다녀요. 이건 유민이 탐냈던 에스쁘아 말린 장미색 립스틱, 그리고 유리아쥬 립밤, 그리고 엘카 패밀리 세일할 때 구매한 맥 립스틱입니다. 유튜버가 추천하는 걸 보고 샀는데요. 그 사람이 이걸 어떻게 표현했냐면, 키스하고 나서 번졌을 때의 색감이 나온다는 거예요.
우욱.
그런데 솔직히 그런 생각은 잘 안 들더군요. 어쨌든 세일할 때 사서 2만 원 정도에 저렴하게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성휘가 생일선물로 준 탬버린즈의 고체 향수 ‘블루 히노키’인데요.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유민 씨와 야구장에 갔을 때 사춘기 소년들의 냄새 공격에서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던 바로 그 제품이죠.
아! 기억납니다!
당시 유민은 수낭의 등쌀에 못이겨 잠실에서 야구 경기를 직관하게 되었는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중학생들에게서 너무 과격한 호르몬 냄새가 진동을 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유민이 고통을 호소하자 수낭이 급하게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인중에다 발라주었고 유민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데, 그 아이템이 바로 이 제품이었던 것이다. 고마워요, 탬버린즈.
그리고 짠, 이건 손수건인데요. 늘 들고 다니는 거예요. 로망이 있었어요.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그런데 맨날 사야지, 사야지 하고 사지 않았어요.
왜죠?
사실은 사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
진실은 무엇일까?
근데 제가 지금 대학원을 다니고 있잖아요. 휴학 중이긴 하지만요.
아직 제적당하지 않았나요?
아직은요. 정말 다행이죠.
빨리 힘내서 논문 써야죠.
그럼요. 어쨌든 저희 과 창립 기념으로 마침 닥스 손수건을 보내줬지 뭡니까. 유용하게 쓰고 있고요. 이걸 어떻게 쓰냐면… 그냥 땀 닦을 때 씁니다.
하지만 우아하게 닦을 수 있겠군요.
좀 흉한 얘기지만, 여름에 돌아다니면 땀 엄청 나잖아요. 그럼 사무실에서 가슴이랑 이런 곳을 이렇게 착착.
이거 인터뷰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어차피 파티션 뒤에서 몰래 닦는 건데요 뭐.
얘기 나온 김에 대학원에 대해서도 좀 여쭤보고 싶은데, 카이스트를 다니고 계시잖아요? 카이스트에서 어떤 걸 배우고 계세요?
저는 미래전략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카이스트와는 조금 다른 영역에 대해 배우죠. 이 안에 지식재산권, 과학 저널리즘, 미래전략 등으로 전공이 나뉘어 있고요. 저는 미래전략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수낭 씨가 국회에 있었을 때 그런 쪽이었죠. 그렇죠?
맞아요.
미래 기술 요런 쪽, 그러니까, 그게 뭐였죠?
그게, 그러니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실에 있었던 거죠.
그렇죠. 그래서 그런 의제를 정리하고, 이런 걸 제가 많이 봤었잖아요. 전공도 그와 관련해서 선택하셨던 거고요. 그런데 그 사이에 업이 바뀌어서 약간 난항을 겪고 계신 것 같아요. 이걸로 정말 논문을 써야 하는가. 하지만 써야 졸업을 하잖아요. 카이스트 이름값, 어떻게 포기합니까? 무조건 졸업해야 합니다.
아, 그러니까요. 언제 쓰냐, 이거. 미래전략이니까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서 미래를 예측하는 논문을 써야 하거든요. 근데 이게 되게 어려워요. 있는 주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인 논거를 가져 와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너무 머리가 아픈 거지. 저는 이과생이 아니고 문과생이잖아요. 그래도 사실 지금 바뀐 업이 기술과 더 가까워지긴 했어요.
아, 그러네. 그럼 회사에서 하는 분야랑 연관지어서 써 보시면 어때요?
근데 전 이제 완전 기술적인 분야로 왔잖아요. 근데 어줍잖게 기술 얘기를 하게 되면 교수님들은 기술 박사니까 오히려 디펜스가 더 안 될 수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어쨌든 써야 됩니다.
수낭 씨의 논문 쓰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바로.
네. 설탕처럼 깨져버린 저의 이북 리더기(❻)입니다. 오닉스 GO7 제품이고요. 정가는 40만 원대인데 제가 세일 많이 할 때 사서 32만 원인가 주고 샀어요. 그런데 이 액정을 고치려면 20만 원이 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북 리더기 사실 때 이렇게 평평한 것 사지 마세요. 살짝 액정 바깥으로 라인이 올라와 있는 그런 제품들이 있어요. 그런 것 사시길 추천드립니다. 액정이 보호가 되니까요.
수낭이 추천하는 형태의 이북리더기를 논플랫 스타일이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이북리더기 구매 예정이 있으신 독자들은 참고하시라.
이건 뭔가요? 포장을 안 뜯은 새 제품이군요.
네. 파스텔이라는 곳의 인헤일러(❼)입니다. 저희 회사 디자이너 분께서 최근에 치앙마이로 가족여행을 가서 기념품으로 사다주셨습니다. 코 시원해지는 그건데요. 아직 안 써봤습니다. 제가 비염이 있으니까 써볼까 해서 갖고 다녀요. 그리고 이건 미국 오프사이트 갔을 때 트레이드조에서 사온 민트 캔디. 엄청 쌌던 것으로 기억하고요. 그냥 완전 정석 민트입니다.
다 먹고 나면 재떨이가 되겠군요.
그렇진 않습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모자입니다. MLB 모자(❽)이고요. 이것도 유지 건데 예뻐서 제가 가져와 버렸습니다. 별 건 아니고요.
핸드크림도 소개해 주세요.
논픽션 세일할 때 샀던 더 베이지 핸드크림(❾)인데요. 유민 씨가 이 향수를 샀는데 좋더라고요. 하지만 이건 가을 겨울용 향이지 않습니까. 따뜻해지고 있던 시기라 향수 대신 이 핸드크림을 샀어요.
이건 저한테 선물로 주셨던 것과 같은 제품이군요.
미국에서 사온 터치랜드 새니타이저(❿)입니다. 올데이프로젝트 애니가 쓴다고 해서 세포라에서 존나 쟁여왔어요. 여름에 어울리는 코코넛 향이에요. 비치 코코 센티드라고 적혀 있네요. 그리고 이건 다이소에서 산 노트(⓫)인데요. 모닝 페이저를 쓰려고 장만했어요.
보여주세요.
안 돼요.
제 욕을 썼나요?
아니에요. 모닝 페이저는 원래 남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
모닝 페이저의 개념을 좀 설명해 주시죠.
그냥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거나 그냥 생각난 것들을 막 써요. 사람마다 뭘 쓰느냐는 다른 것 같아요. 감정에 대해 쓰는 사람도 있고, 감사한 일들을 쓰는 사람도 있고, 오늘 해야 하는 일을 쓸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걸 제가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아침에만 써야 한다고 때를 정해버리니까 오히려 잘 안 쓰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때를 놓쳐도 하루 중 언제든 쓸 수 있도록.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이 펜은 제가 좋아해서 유민 씨께도 선물로 준 적이 있죠. 고시생들이 많이 쓴다고 하고, 정확한 제품명은 모르겠지만 제트스트림 거고요. 평범한 펜 그립과 다르게 엄청 말랑말랑, 말랑이처럼 말랑말랑해서 오래 쓸 수 있어요.
펜촉이 적당히 두꺼워서 메모할 때 참 좋더라고요.
그렇죠. 정말 좋아요.
그리고 현금 2만 5천 원이 있군요. 왜 지갑에 넣지 않았나요?
지갑이 너무 작아요. 그래서 많은 걸 넣을 수 없어요. 제가 얼마 전에 당근을 하러 갔는데, 미친 놈이 현금을 주는 거야. 요즘 누가 당근할 때 현금을 주냐고. 그래서 그냥 이걸 들고 다니다가 로또 파는 곳이 있으면 이걸로 사야겠다 싶어서 가방에 넣어 놨습니다.
내일이 발표일이니까 오늘 하나 사세요.
네.
이 수첩도 설명해 주세요.
양지사 위클리 플래너인데요. 거의 안 쓰긴 합니다.
양지사는 뭐랄까, 이 절단면이 옛날 성경책처럼 이렇게, 금박 처리 되어 있는 점이 최고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리고 되게 가벼워서 휴대성이 좋아요. 7월 이후로는 잘 쓰지 않았지만 다시 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여기에 끼울 수 있는, 펜을 꽂을 수 있는 고무밴드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무밴드에는 펜이 꽂혀있지 않았다. 펜은 모닝페이저와 함께 가방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펜 여기 꽂으세요.
제 물건들의 특징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철학적으로 들렸지만, 깊이 물어보지 않았다.
안경들(⓬)도 안경 케이스에 들어있지 않네요.
우하하. 이 안경은 얼마전에 자다가 눌려서 이렇게 안경테가 비뚤어졌어요. 그래서 이걸 쓰면 미치광이 과학자처럼 보입니다. 그래도 영화를 보거나 할 때 대충 얹어서 보고 있어요. 렌즈는 불편해서 안 쓰거든요. 그리고 이 선글라스는 서울숲에 있는 올드포레스트에서 샀습니다. 몇년 전에 유민 씨 졸업식날 부모님과 같이 진작다이닝에서 밥 먹고 같이 갔던 거 기억나요? 주차 존나 힘들었잖아요. 그날 샀던 겁니다. 펜디 제품이에요. 5만 원에 샀나?
예쁘네요. 제니 같아요.
이것도 한동안 안 썼는데, 미국에서 야구장에 갔다가 원래 쓰던 선글라스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요즘은 이걸 쓰고 다닙니다.
그만 좀 잃어버리세요.
아마 수낭은 사돈 남말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유민이 올해 생일선물로 사준 탬버린즈 썸머테일즈 헤어퍼퓸(⓭)인데요. 파우치에 막 들고 다니다 보니 다 찌그러졌습니다. 하지만 쓰는 덴 문제 없어요. 이 냄새는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제가 일본 여행 갔을 때 규카츠를 먹고 냄새가 너무 나서, 근처에 탬버린즈 매장이 있길래 거기서 테스터를 뿌렸다가 알게 된 향이죠. 너무 좋아해요.
유민의 왓츠인마이백에서도 썸머테일즈 퍼퓸드 핸드크림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건 미국에서 사온 치아 미백 스트립(⓮). 옛날에도 써본 적이 있는데요. 비싸지만 좋아요. 좀 자극적일 수는 있어서 조심히 붙여야 해요. 한 번 써 볼래?
어, 감사합니다. 빛 쐬는 것 없이 그냥 붙이고만 있으면 되나요?
네. 이거 한국에는 정식 수입이 안 돼서 직구해야 해요. 식약처 기준에 안 맞아서 그렇다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국 코스트코에서 대용량으로 잔뜩 사왔습니다. 안에 스트랩이 두 개가 들어 있는데, 원래는 각각 아랫니랑 윗니에 붙이는 거예요. 근데 이게 사이즈가 큽니다. 그래서 저는 가위로 반씩 잘라서 두 번 사용해요. 그렇게 쓰는 걸 추천드릴게요.
마지막 파우치군요. 모두가 이 파우치를 가지고 있죠.
네. 이솝에서 주는 파우치(⓯)죠. 여기에는 짠! 라바볼(⓰)이 있습니다. 민정이가 뜨개로 직접 떠 줬어요. <프로젝트 헤일메리>에 나오는 걸 보고 똑같이 만들어 준 거예요. 그리고 이건 유지가 바티칸에서 사다준 묵주(⓱)입니다. 제가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예쁜 묵주가 하나 갖고 싶었어요. 지금은 냉담자지만 들고 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정말 신을 믿나요?
글쎄요. 성경에서 말하는 신은 없더라도, 어떤 형태든 창조주의 개념이 있지 않을까요? 우주를 만들었다든지 하는. 근데 그게 사람같은 형태가 아니라 어떤 에너지일 수도 있고, 유물론적인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쨌든 성인이 된 이후에 카톨릭을 선택했고 교리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례를 받은 거니까, 카톨릭에 대한 어떤 신념이 있을 거잖아요. 단순히 커뮤니티를 위해서만 입교를 한 건 아닐 테니까.
음. 그런 게 더 크긴 한데, 그렇다고 말하면 신이 노할 일이겠죠.
그녀의 사후 행복을 위해 이 얘기는 이쯤에서 넘어가야겠다.
그리고 화장품들(⓲)이 있는데요. 이건 아이라이너고요. 클리오 것 같아요. 그리고 이것도 투크 아이라이너인데, 유명하다고 해서 샀는데 잘 못 그리겠더라고요. 워터프루프 슬림 아이라이너 오크 샌드 컬러. 그리고 이건 한 번씩 여름에 세수하고 나서 바르려고 들고 다니는 프리메라 오가니언스 베리어 리페어 카밍 에센스 토너 샘플입니다. 그리고 이건 웨스틴 호텔에서 가져온 라벤더 오일 밤인데요. 솔님이 메리어트 멤버십이 있어서 출장갈 때 웬만하면 메리어트 계열에 묵어요. 웨스틴 호텔에 가면 침대맡에 항상 이게 어매니티로 놓여 있어요. 바르고 자면 좋습니다.
나머지 아이템도 소개해 주세요.
이건 이소티논(⓳)이라는 피지조절 약인데요. 트러블 날 때 하나씩 먹습니다. 그리고 이건 딘토에서 뭘 사고 받은 사은품인데 한번씩 코에 발라요. 근데 존나 내구성 이렇게 쓰레기라 다 부서졌습니다. 그치만 색깔이 예뻐요. 그리고 이 헤라 블랙쿠션(⓴)이 있습니다. 제가 요새는 파데프리 선크림 같은 걸 바르고 다녀서 풀메이크업은 잘 하지 않아요. 그치만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면세에서 뭘 살까 고민하다가, 마르지엘라 향수를 하나 사고, 그리고 이걸 샀어요. 이게 면세에서 사면 완전 득템이거든요. 리필 두 개인가 같이 주는데 엄청 싸요. 그치만… 아까 얘기한 것처럼 요즘은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아서 사실상 거울로 쓰고 있습니다. 네, 이제 끝입니다.
여기서 가장 오랫동안 가방에 들어 있었던 물건 하나를 골라서 설명해 주세요.
묵주이지 않을까요? 10년 넘게 가지고 다녔어요.
그러면 이 중에서 가장 비싼 것은요?
맥북이요.
맥북 빼고요.
아, 그러면 이북리더기입니다.
당신은 이 가방을 들고 가다가 무시무시한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다 털어가겠다고 하네요. 목숨을 걸고라도 반드시 지킬 단 하나의 물건은요?
음. 맥북이요. 왜냐면 회사 거니까.
야, 니가 죽을 위기인데 회사는 무슨 회사.
내 건 그냥 다시 사면 되는데 회사 걸 잃어버리면 남한테 피해를 주는 거잖아.
이게 바로 리드의 책임감일까?
이번에는 허약 체질의 강도를 만났습니다. 하나만 주면 먹고 떨어질 겁니다. 뭘 주겠습니까?
이소티논이요. 피지 조절이나 좀 하라고.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약을 골랐어요. 착한 마음이죠.
먹고 떨어져라. 그김에 건강해져라, 이런 느낌인가? 아, 아니면 이 하이라이터를 주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반짝반짝해져라.
다음 질문입니다. 당신은 가방을 잃어버렸습니다. 주운 사람은 당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냥 직장인? 이런 노트 같은 것 펼쳐 보면 다 일 얘기 적혀 있고 하니까요.
아, 좀 재미가 없는데.
ADHD?
그렇다기엔 정리가 잘 되어있는 편인데.
아니죠. 파우치에만 들어있을 뿐이지 안경집도 없고, 돈도 지갑에 안 들어있고. 정리를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저는 가방을 보면 그 사람의 직업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이번 특집을 진행하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누군가 ‘이 직업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추구미가 있다면 그렇게 하고 다닐 텐데, 실제로 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 상관 없는 것만 들고 다니더라고요.
그럴 것 같아요. 제가 옛날에 국회 다녔을 때, 국회 뽕이 좀 차 있었을 때였다면 막 로고 찍혀 있는 서류봉투 같은 것 들고다니고 했을 수 있겠죠.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음도 없고요.
맥북에 붙은 스티커를 보고 나사 직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아, 그러고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 저랑 디자이너분이 미국에서 둘 다 같은 스티커를 붙이고 카페에서 나란히 앉아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근데 미국은 스몰토크를 되게 많이 하는 문화잖아요.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너희 둘 다 나사에서 일하는 거야?” 라고 농담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하하, 아니. 라고 대답했어요.
그 스몰토크를 이어갔어야죠.
굳이? 일하고 있는데.
재밌잖아요.
뭐라고 하실 건데요.
뭐, 거짓말하는 거죠. “맞습니다. 우리는...” 아, 나사에 무슨 직업이 있는지를 모르겠네.
엔지니어일 수도 있고 에스트로넛일 수도 있고.
그럼 로켓 엔지니어로 하시죠. 멋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당신은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탈출하기 전까지 단 한 곡의 음악만 들을 수 있습니다. 배낭에 어떤 노래를 챙겨가시겠습니까?
아, 어렵네. Kristian Zimerman과 Boston Symphony Orchestra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1&2번 하겠습니다.
크리스티앙 짐머만…
죄송하지만 지메르만이라고 써 주세요.
그것이 보다 원어에 가까운 발음이라는 그녀의 뚝심이다.
왜 이 곡을 골랐나요?
가장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연주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콘체르토를 좋아해요. 볼륨감이 있잖아요. 그리고 클래식이라 길고 여러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덜 질릴 것 같고요.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도 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릴 때 자주 듣던 클래식 곡이라 마음에 안정이 오지 않을까요.
수낭과 아주 오래 알고 지냈지만 그의 가방을 뒤집어 털고 두 시간 내내 물건 하나하나를 물어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그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없었다. 너무나 그다운 가방이었으므로… 지갑 밖을 굴러다니는 현금이나 펜꽂이에 꽂혀 있지 않은 펜처럼 수낭 역시 제멋대로 쏘다니며 용감하게 살아왔다. 제 것에는 놀랄 만큼 무심하면서도 남의 몫이 걸린 일에는 유난스레 책임감 넘치고 다정해지는 앞뒤 안 맞는 구석조차 사실 꽤나 그답다는 것을 가까운 이들은 알 것이다.
수낭은 깨지고 망가진 물건들을 도로 가방에 넣었다. 이북 리더기는 수리비가 문제지만 안경은 대충 얹어 쓰면 되고, 찌그러진 헤어퍼퓸에서는 여전히 좋은 향이 난다. 무인도에서도 라흐마니노프를 들으며 어떻게든 지낼 것 같다. 게다가 그곳에는 엘지트윈스가 없으니, 평소보다 심신이 안정될 가능성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