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4호 > 이달의 빈지와칭 > 
빈지와칭을 가장한 야구 이모저모
부제: 사랑과 증오 사이 어디쯤
👤신수낭

바야흐로 2026년 KBO리그가 개막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야구에 대한 열정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로 나는 경솔한 말을 내뱉었다. 『월간차지』 4호에 야구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이다. 유유민 씨는 ‘이달의 빈지와칭’이라는 이름의 코너를 배정해 줬다. 야구는 본디 몰아볼 수 없는 콘텐츠지만, 작년 비시즌만 하더라도 나를 뻐렁차게 했던 경기들(25년 한국시리즈 2차전 2회 말이나 4차전 9회 초 같은)을 부러 찾아 돌려본 날들이 꽤 있는 것 같아 흔쾌히 좋아요! 를 외쳤다. 한 가지 불미스러운 일은 마감일을 이틀 앞둔 18일, LG트윈스의 계속되는 폐급 경기력 탓에 글을 쓰고자 하는 동력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야빠’란 ‘일희일비하는 자들’과 동의어나 마찬가지인 만큼, 결국은 글을 쓰기로 작심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이후 LG트윈스는 십 년간의 지독한 암흑기로 접어든다. 궁금하신 분들은 ‘LG트윈스 비밀번호(6668587667)’를 검색해 보시라. KBO리그에는 총 여덟 개 팀이 있었으며, 저 숫자들은 엘지가 십 년간 기록한 최종 순위를 늘어놓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만 가면 시즌권을 끊어 학교 대신 잠실야구장으로 출석 체크를 하고야 말겠다던 나는 그 결심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꽤 자주 야구 경기를 직관했다. 승리보다 패배가 익숙하던 시절을, 그래도 끝까지 버텨냈다. 감독이 밥 먹듯이 바뀌고, 선수들이 삭발 퍼포먼스를 펼치고, 경기 후에는 어김없이 팬들이 중앙출입구에 진을 치고 선수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던 야만과 고통의 시대였다.

야구팬이 ‘야구 다시는 안 본다’라는 말을 하면 믿지 않는 것이 좋다. 그건 ‘나 진짜 퇴사한다,’ ‘오늘은 일찍 잔다’ 같은 소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매일 습관처럼 “다시는 야구 안 봐!” 선언하며 야만과 고통의 시대를 무사히(?) 견뎌냈다. 그 지독한 암흑기를 거쳐 엘지는 29년 만에 우승도 하고, 이후 2년 만에 또다시 우승을 거머쥐며 왕조를 세우는 강팀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경기들을 보니 그건 설레발이었음을 인정해야겠다. 기나긴 암흑기, 우승을 코앞에 두고 놓쳤던 날들을 이야기하자면 지금도 울화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지만, 그럼에도 왜 나는 야구를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게 맞겠지?)

‘엘튜브’에 등장한 나와 민정

야빠들은 ‘왜 나는 야구를 보는 걸까’를 수시로 자문한다. 여기에 답을 주자면, 이것은 저주이자 DNA에 새겨진 인자 같은 것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것. 우리 아빠는 왜, 나를 야구장에 데려갔을까, 왜 매일 저녁 시간에 TV 중계를 틀어놨을까, 하는 원망에도 힘이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전적 인자나 어린 시절 환경이라는 이유를 제외하고,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다른 이유는 또 없는 걸까?

야구에 지독한 애증을 느끼는 나를 보며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불확실성을 즐기는 사람이래.”

이어서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더 했던 것 같은데, 그걸 듣고 있던 내 머릿속에는 전구가 켜졌다. ‘어머, 이거 완전 나잖아?’

야구는 통계의 스포츠라고 불리지만, 그 통계를 뛰어넘는 순간들이 있다. 어제도 졌고, 오늘도 졌지만 내일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스포츠. 주자가 쌓이면 홈런 한 방에도 경기가 뒤집히는 스포츠.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는 도파민과 절망의 스포츠. 요기 베라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라는 명언처럼, 야구는 마지막 아웃 카운트가 사라질 때까지 언제든 역전의 기회가 남아 있는 스포츠다. 경기 시간이 정해진 다른 스포츠와 달리 선수들이 어떻게 플레이를 하느냐에 따라서 공격 기회가 무한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야구에는 지금 이 순간 누가 얼마나 유리한지를 보여주는 승리 확률(Win Expectancy)과 방금의 한 타석이 경기 전체를 얼마나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황 중요도 지수(Leverage Index)라는 지표가 있다. 즉 야구는 한 타석, 하나의 장타, 하나의 실책, 하나의 볼넷이 승률을 급격하게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 스포츠다. 매 타석, 매 투구마다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고 사라진다. 내가 ‘야구 다시는 안 봐’ 말하고는 결국 내일도 중계를 틀게 될 것은 이쯤 되면 당연한 이치처럼 느껴진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144경기를 소화한다. 즉, 시즌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도파민의 스포츠라는 말씀. 1년에 5개월이나 이런 기분으로 산다고 생각하니 나 스스로를 학대하는 셈인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한다.

나는 지금껏 안정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중요한 기로에 설 때마다 했던 선택은 남들이 일반적으로 가지 않던 길이기도 했고, 몸담은 곳마다 예측을 뒤엎는 긴장과 서사가 필연적으로 많았다. 대학 졸업 후 일반 기업이 아닌 국회의원실에서 보좌진으로 첫 커리어를 시작했고, 돌연 서른에 창업씬에 뛰어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안정감을 싫어하고 불확실성만을 쫓는 미친 사람은 아니다. 다만, 예측 가능성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확률과 변수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즐거운 사람일 뿐. 너무 뻔한 것보다는 끝까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게 더 재밌잖아?

25년 한국시리즈 4차전 9회 초, 4:1로 뒤지고 있던 LG트윈스는 대거 6득점을 하며 승리를 가져갔다. 9회 초 LG트윈스의 승리 확률은 7%였지만 이닝을 마무리할 때는 94.6%까지 치솟았다. 반면 8회 말 승리 확률이 95.7%였던 한화이글스는 9회 말 2.1%의 승리 확률로 이닝을 시작했다. 야구는 이렇게 숫자로 정밀하게 기록되는 동시에, 그 숫자를 가장 극적으로 배반하는 스포츠다. 어쩌면 나는 그 배반의 순간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7%라는 극악의 확률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이 여전히 열려 있다는 사실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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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