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제4호
영업합니다

기요아키에게 황색 아기 고양이를 팝니다
신포도




안녕하세요, 귀여운 기요 님. 당신의 고민을 어느 우직한 청년으로부터 전해 들었습니다. 그 청년은 기요 님처럼 말을 잘하는 성격은 아닌가 보더군요. 본인이 모시고 있는 심약한 남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이 돌이키기 힘든 실수를 했다고요.

        당신의 어리숙함을 고자질하는 어투는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은 기요 님을 꽤나 아끼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든 당신의 고민, 그 어리석은 과거를 돌이키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떨어진 벚꽃잎과 진흙이 엉겨 붙은, 모서리가 오그라든 채 너덜거리는 제 명함을 찾아내 굳이 연락한 것은 그 이유겠지요. 누군가를 아끼지 않는다면 하기 힘든 일입니다. 떨어진 명함을 주워 흙을 털어낸다는 것은요.

        그 우직한 청년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측은지심, 불인지심, 그리고 우직함에서 자연스레 스며 나오는 타인을 아끼는 마음 정도가 비쳐 보였습니다. 그 청년은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당신을 이리도 아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리도 어리숙한 문장들을 써서 보냈습니까? ‘귀엽다’는 수식어가 그리도 치욕적이었나요? 당신은 사실 귀엽기 때문에 어리숙한 문장들, 어리숙한 행동들, 미숙하고 어리석은 나르시시즘을 마음껏 드러내고 살 수 있는 것인데요.

        당신은 귀엽기 때문에 멋대로 살고, 멋대로 살기 때문에 귀여운 것입니다. 그 당연한 생리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아니 그 생리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는 억만금이 있어도 사토코와 온전한 사랑을 이룰 수 없어요. 그럴 마음이 있으신지조차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그런 마음이 있는지를 당신조차 모른다는 것, 그것이 또한 당신의 귀여움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귀여움을 ‘취약함’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취약하지 않고서 대체 어떻게 사랑을 하려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저는 당신이 귀여움과 취약함의 생리에 녹아드는 데, 아주 간접적인 도움을 줄 만한 상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당신은 무의미한 나르시시즘에 녹아든 사람이니, 당신의 세계에는 타인이 필요해요. 당신 자신의 무게감을 약간 흐릿하게 만들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 관계에서 당신이 중심에 놓여 있으면 안 돼요. 그 관계는 오로지 당신을 지우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려오길 제안하는 겁니다. 2개월령의 작은 황색 아기 고양이를요.

        아기 고양이라니, 그런 것이 당신의 곁에 머문다는 것을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편지가 배달부의 품에 안긴 채, 덜컹거리며 이동 중인 이리도 급박한 시점에 아기 고양이를 키우라니? 허무맹랑한 제안처럼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 우직한 청년은 명함을 털던 그 순간을 후회할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잠시 의심을 거두고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단 지금 당신은 사토코 양의 집으로 향하고 있는 편지를 멈출 방법이 없을 겁니다. 제국에 알맞을 속도감을 고민하는 근래의 일본에서 느긋한 배달이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 배달할 양을 모두 배달하지 못한다면, 아마 배달부는 야근을 해서라도 할당량을 모두 우편함에 꽂아야만 할 거예요. 배달부는 퇴근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기어를 최대치에 맞추고 모래주머니를 단 듯한 페달을 밟아나가고 있을 거예요.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심으로 관계하는 가족들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고작 당신의 어리숙함을 구원하고자 페달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 배달부를 설득하고자 한 달 치 봉급을 제안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편지를 다시 손에 넣는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당신은 아마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예요. 사토코 양은 당신의 취약함을 애정하기 때문에 당신의 ‘귀여운 기요 님’ 순간을 계속해 발굴하려 애쓸 것입니다. 당신이 저의 제안서를 계속 읽어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 사토코 양이 저지를 만한 도발들을 나열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에겐 아직 아기 고양이가 없잖아요?

        사토코 양의 도발이 당신의 나르시시즘을 넘어서는 순간이 도래하면, 당신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지도 몰라요. “게이샤와 귀부인, 여염집 여성과 화류계 여성, 교육받지 않은 여자”가 가득한 “하룻밤의 광야”에 가는 일을 실현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죠? 하지만 나르시시즘이란, 취약함을 인정하지 못한 채 곧추선 자아란 그리도 추악한 것입니다! 진짜 꼿꼿이 선 자아란 취약함, 어느 정도의 귀여움을 기반에 둬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이 편지 배달을 멈추는 것이 무용하다는 이야기를 길게 드렸습니다만, 아직 그렇다고 선뜻 2개월령의 아기 고양이를 들이겠다 결심하지는 못하셨을 테지요. 이제부터는 당신에게 아기 고양이가 필요한 이유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아주 넓은 저택에 살고 있으니, 주변에서 떠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마주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당신이 살고 계신 시대에서 중성화 수술이란 것이 일반적이었을 리 없으므로, 아기 고양이를 구하기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죠. 수급의 용이함도 제안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기 고양이는 아주 제멋대로인 생명체란 말입니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아기 고양이를 볼 때는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아주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잘 지어진 저택에 사는 인간과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마 아주 정교한 다다미방에 살겠지요? 끝이 있는 건지도 실감 나지 않는 음식들을 차려둘 수 있도록, 튼튼하고 반딱이는 나무 상이 거나하게 놓여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기 고양이가 사는 세계는 반딱이거나 정교하거나 튼튼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들은 매일 이름 모를 날벌레들과 함께 잠에서 깹니다. 매일 어미의 젖꼭지를 두고 형제들과 혈투를 벌일 겁니다. 그 혈투의 순간에도 이따금씩 이마에 비치는 햇빛의 따스함을 즐길 것이고, 이끼 섞인 물을 까슬한 혓바닥으로 짓누르며 씹어 삼킬 것이란 말입니다.

       당신이 그런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면 하루는 생존할 수 있을까요? 몇 시간도 힘들 겁니다. 그런데 아기 고양이들은 그런 세계를 아주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자기 자신에 대한 불필요한 연민을 갖지 않지요. 그들은 태연하게 그 세계에서 살아요. 인간적인 태연함이 아닌, 고양이적 태연함으로 일관하며 말이죠.

        이때의 고양이적 태연함이란 뒤끝을 생각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끼를 씹어 삼켰다가 배탈이 나면 어쩌지, 걱정하기보단 그저 마셔버리죠. 구름이 하늘에 가득 찰 날을 두려워하며 지금의 햇빛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날벌레들이 자신의 털 사이에 알을 깔 것이란 걱정 때문에 산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어미의 젖을 차지하지 못했다고 버림받았다는 건방진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돌을 절벽 끝으로 밀어버리고, 그것을 바라보길 즐길 뿐이죠. 옆에서 쌔근쌔근 형제들이 자고 있다면, 그들의 꼬리를 베개 삼아 그저 눈을 감을 뿐입니다. 졸리지 않을 때를 기다리며 잠에 들죠. 이렇게만 보면 아기 고양이란 생물은, 당신과 달리 아주 강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양이들은 한편으로 취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다른 존재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죠. 그들은 무엇이 쾌락인지를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립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해서, 호기심을 가질 만한 대상인지 아닌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죠. 그렇기에 자신이 떨어트린 돌멩이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절벽 밖으로 뛰어내리기도 하고, 날벌레를 좇아 우다다 달려 나가다가 나무 밑동에 작은 몸을 박기도 하는 것입니다. 비가 오지 않는 가뭄 동안에는 그저 물을 마시지 못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런 취약함을 감추지 않는 것에서 아기 고양이의 귀여움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 귀여움이 온전한 사랑을 가능케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고요.

       저는 기요 님을 본 적 없지만 그 편지의 내용만으로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훤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부디 자존심 상해하지는 마세요. 저는 이런 눈치만으로 매일의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당신은 아기 고양이를 닮았어요. 그러나 당신에게서 그 어떤 강인함도 보이지 않는 까닭, 당신의 취약함과 귀여움이 단단한 자아로까지 변모하지 못하는 까닭은 당신이 놓인 세계의 정교함 때문입니다. 그 어떤 날벌레도, 나무의 밑동도, 예기치 못한 가뭄도, 생을 걸어야만 하는 절벽도 당신의 다다미방에는 자리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당신더러 아기 고양이의 세계로 이주하라 명령할 힘은 제게 없으니, 당신의 단단한 다다미방에 그 날 것의 세계성을 응축한 아기 고양이를 들이라 제안하는 것입니다.


아마 당신의 방에 들어선 아기 고양이는 당신이 애써 전시해 둔 모든 사물의 배치를 어그러뜨릴 거예요. 당신은 끔찍이도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선반에 전시해 두지 못할 겁니다. 고양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곳을 바꿀 수 있어요. 어제는 1샤쿠①를 뛰었겠지만, 그다음 날은 3샤쿠를 뛸지 몰라요. 매번 고양이의 뒷다리 근육을 촉진하며 불안에 떨기보다 당신은 다다미방의 예술성을 포기하기를 택할 겁니다.

        ‘아기 고양이를 그저 존재하도록 내버려둬서 어떠한 것도 배우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세요. 당신은 정원에 핀 강아지풀을 꺾어올 겁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그 풀을 고양이의 시야에서 흔들면서, 아기 고양이의 지치지 않는 체력을 소모하려 애쓸 거예요. 그래야만 고양이가 당신의 밤잠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요. 맨손으로는 만지기 싫을 모래들을 퍼와야 할 겁니다. 한 달마다 고양이가 긁어둔 다다미를 교체해야 할 거예요. 아마 제게 접촉해 온 우직한 청년은 기쁘게 다다미를 갈 겁니다. 당신이 희생이라고 불리는 강인함을 배워나가는 것에 얼마간 뿌듯함을 느끼면서요.

        이 편지를 당신과 나, 그 외의 누군가가 읽게 된다면 약간은 비극적인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습니다. 기요 님이 아기 고양이에게 너무도 질려버려 그를 다시 야생에 내놓는다거나, 혹은 지나치게 화가 난 나머지 고양이를 해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진 못할 거예요. 당신은 아기 고양이를 닮았으니까요. 당신이 결코 고양이를 버릴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당신은 관계의 본질도 아주 천천히 배워나갈 겁니다. 왜 사토코 양이 당신처럼 어리숙한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물들 듯 느껴 가겠죠.

       어찌 이리도 확신에 찼을지 궁금하시죠? 말씀드렸듯, 저는 이런 눈치만으로 매일 입에 풀칠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 주시길 바라요. 아기 고양이를 들이고, 그 고양이가 3샤쿠 정도를 뛸 수 있을 만큼 크고 나면 사토코 양에게 다시 한번 편지를 쓰세요. 집의 배치를 바꾸었다고요. 벚꽃이 지기 전에 한 번 꽃놀이를 나가자고요. 


  ① 약 30.3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