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8호 > 에디터스 레터 > 
RGB 알갱이와 달 뒷편에 사는 토끼들
👤신포도

초등학생 시절, 제가 가장 좋아하던 곳은 컴퓨터 교실이었습니다. 건물 꼭대기 층에 마련된 컴퓨터 교실은 지루하고 평범한 교실과는 전혀 다른 바이브를 내뿜었습니다. 가시로 초딩들의 양말을 위협하는 마루 바닥 대신 미끈한 비닐로 포장된 대리석 모양의 장판이 깔려 있었고요. 교실 앞에는 청록색 칠판 대신 희고 더러운 롤스크린이 펄럭였습니다. 갈려나가는 분필 대신 평면 위를 떠다니는 마우스 커서를 쫓는 일도 생경한 재미 중 하나였지요.

물론 컴퓨터 교실의 백미라면 모든 아이들 앞에 놓인 컴퓨터 세트일 겁니다. 코끼리 몸통처럼 두꺼웠던 모니터, 거추장스럽게 연결된 마우스, 구멍난 키스킨이 깔린 검정 키보드와 종아리 옆에서 굉음의 진동을 뿜어내던 본체 같은 것들 말이죠. 컴퓨터 교실에 매번 1등으로 도착한 저는 얼굴과 눈알을 모니터에 딱 붙이는 일을 즐겼습니다. 아주 가까이서 모니터를 쳐다보면, 아주 매끈해 보이던 화면도 사실 무수한 RGB 픽셀 알갱이로 이뤄져 있다는 게 보이거든요. 그러나 점점 모니터에서 멀어지면, 그 알갱이들은 일순간 선이 되고 면이 되었습니다. 그뿐인가요? 인터넷이 되고, 한글이나 포토샵, PPT가 되어주었죠. 그 알갱이들이 분필도, 나무도, 교과서도 못하는 일들을 손쉽게 해결해준다는 것이 퍽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물론 컴퓨터 수업에서 가장 좋아하던 시간은 엽기 사진이나 ‘주(zoo) 타이쿤’ 게임 속 흉폭한 동물 세계를 관음하는 일이었지만… 그또한 가능성의 일종 아니겠어요?

초등학생 시절에 배운 포토샵 기술은 중고등학생 때 요긴하게 썼습니다. 물론 불법 크랙 다운로드를 통해서요… 변명을 해보자면, 중고등학생의 제게는 최신 버전 포토샵에만 있는 최첨단 편집 기술 따위가 필요치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술 수행평가 최저점을 받는 주제에 돈을 주고 포토샵을 산다는 건 가당치도 않았습니다. 그건 정정당당함보다는 일종의 사치, 낭비벽처럼 다가왔으니까요. 얼마나 크랙 광인이었는지, 무료 시험판을 깔아 가입하고, 파일과 폴더를 이리저리 옮기며 정품 인증 과정을 거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토렌트와 파일노리, 곰녹음기와 소리바다, 크랙과 정품 인증의 시대는 분명 저물어 가는 듯 보입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였던 것 같아요. 어도비는 클라우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크랙 다운로드를 원천 차단하였고요. 스포티파이와 넷플릭스는 영화와 음악을 ‘소유’가 아닌 ‘대여’의 대상으로 바꿔 두었습니다. 물론 작품을 대여하는 것이 아닌, 기간과 시간을 대여하는 것으로 말이죠. 노래 하나, 영화 하나, 다 늙어 돌아가지 않는 버전의 올드 포토샵 하나를 부여잡던 시절이 참으로 전생 같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 번역 출간된 책 『엔시티피케이션』을 읽었습니다. 플랫폼은 어쩌다 개똥처럼 변했는지. 또한 그 개똥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는지를 하나씩 가늠해가는 책입니다. 탈플랫폼을 외치던 월간차지 편집부를 매혹시킬 수밖에 없는 주제죠. 저자인 코리 닥터로는 플랫폼의 개똥화 과정을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1단계. 일단 플랫폼이 당신(사용자)에게 잘한다.
2단계. 그러다 사업자 고객의 편의를 위해 당신을 괴롭힌다.
3단계. 그러고는 사업자 고객을 괴롭혀 가치를 몽땅 자기들 몫으로 거둬들인다.
4단계. 결국 플랫폼은 거대한 똥 더미가 된다.


정의 자체는 명쾌하지만, 세부로 들어갈수록 머리가 아픕니다. 엔시티화된 플랫폼들이 행사하는 개똥화 전술들이 무궁무진하거든요. 햇반이나 대일밴드처럼 ‘검색’이라는 단어 자체를 대체해 버린 구글은 검색 결과의 품질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린다고 합니다. 대체 왜?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못 찾아서 더 오래 탐색해야 할수록, 광고를 더 많이 노출할 수 있거든요. (정말 똑똑하네요?) 제 크랙 라이프를 크랙낸 어도비의 클라우드 시스템도 교묘한 엔시티피케이션 전술 중 하나입니다. 매끈해 보이는 ‘업데이트’라는 명목으로 사용자에게 불리한 약관, 가격, 기능을 강제할 수 있으니 말이죠. (실제 사례를 읽어보시면 더더욱 기가 찹니다.)

책을 읽을 때는 지킬 앤 하이드마냥 다양한 인격들을 통과했습니다. 분노로 이를 바득바득 갈기도 했고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치기도 했고요. 가끔은 컴퓨터 교실의 소음과 열기를 떠올리며 그 감각에 잠겨 있기도 했지요. 하지만 결국에는 침울하고, 또 무력해졌습니다. API의 개념조차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개인이자 독자로서, 엔시티피케이션을 막겠다 결심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보였지요. 플랫폼의 개똥화에 우리는 너무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똥 더미와 함께 사는 데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그를 감각하는 동시에 ‘똥 없는 세계에 살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무력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심지어는 똥 없는 세계로 돌아갈 묘수를 떠올릴 때조차 똥 싸는 놈들의 눈치를 살펴야 해요. 책을 집필하던 중 트럼프 재선이라는 ‘사건’을 마주한 코리 닥터로도 상당수의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해야 했을 겁니다. 재선 이전에 떠올렸던 대안들이 무력해졌으니 말이죠. 어떡하겠습니까? 또 새로운 대안을 찾을 수밖에요. (그나저나 똥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 한 번 더 해버렸네요. 한 번 더 사과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뭔가요? 이 모든 무기력이 신포도의 베갯머리 푸념일 뿐이라는 겁니다. 희망을 갖는 게 사치라고? 월간차지는 이딴 질 낮은 푸념을 받아들일 용의가 없습니다. 진짜 희망, 진짜 대안이라면 온전하게 완성된 상태로 주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4종위키’를 통해 기적적으로 생환한 폴 풀먼도 말했지 않습니까? 확실하고 가시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것들 대부분은 신기루이고, 허위 매물이라고요. 사실 대안과 희망은 숨어 있을 겁니다. 형태조차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할 겁니다. 도저히 다른 선택지, 다른 결말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척박한 땅에서 옅은 숨을 쉬고 있을 겁니다. 그를 되살릴 방법은 결국, 부정확한 표현과 오류를 무릅쓰고 자신이 상상해낸 선택지를 꺼내두는 것뿐입니다. 용기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겠죠.

놀라운 것은, 이러한 상상을 외치고 알리다 보면, 어느 샌가 비슷한 감각에 짓눌려온 이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무력한 개인을 구해주러 오는 게 아니라, 같이 잡히러 모입니다. 같이 잡힌 채로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죠. 잡담을 하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시기와 운때가 맞아 무언가를 함께 도모해 보기도 합니다. 뭐, 종국에는 별스러운 것을 만들어내지 못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뒷면을 함께 상상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즐겁겠어요? 달의 뒷면에는 그깟 크레이터와 어둠 뿐이라는 이야기보다, 떡방아를 찧는 토끼가 산다고 믿는 게 훨씬 가치있지 않나요?


올해 8월, 월간차지 편집부는 많은 이들을 만났습니다. 대구 이미지북 점거 행사를 무사히 치렀고요, 알라딘 북펀드를 뜨겁게 데운 책 『호프 끝장』의 필자로 참여하여 마음껏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차지의 유튜브 채널을 총괄해줄 PD 춘자도 합류했습니다. 구독과 알림설정을 눌러주신다면 월간차지의 유튜브 잠입에 함께하실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공간차지에는 유민의 친구인 하은과 희정이 놀러왔습니다. 기이하고 복잡한 새로운 MBTI 테스트도 했고, 사주도 보았고, 각종 불평불만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자리가 마무리될 때쯤, 희정은 공간차지 사무실에서 기다리던 면접 합격 소식을 받아들었습니다. 오후 6시 즈음, 두 친구가 돌아갈 때쯤에는 거센 비가 그쳤습니다. 맨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위치에 큰 무지개가 뜬 것을 발견했지요. 우리 넷은 공간차지 이웃 건물 유리창에 비친 무지개를 오랫동안 웃으며 관찰했습니다.

사실 저희는 8호가 텅텅 비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당초 세워두었던 계획과 특집 주제들이 이런 저런 이유들로 무력해졌거든요. 7월까지만 해도 『엔시티피케이션』을 쓴 코리 닥터로를 인터뷰해보자, 거창한 계획을 세웠지만 마음 같지 않았고요. 이미지북 점령 행사에서 밝힌 8호의 주제와 기획들도 결국에는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월간차지 8호, 형형색색의 RGB 픽셀 알갱이들처럼 빛나는 콘텐츠로 채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모든 것은… 왓 윌 비 윌 비입니다.

유민은 『문예 비창작: 디지털 환경에서 언어 다루기』와 『엔시티피케이션』을 읽고 흘러나온 '타령'을 거대한 인용구 덩어리로 구현했습니다. 글은 8월 31일 업로드 예정입니다. 신포도는 서평이라 보기 어려운, 푸모 씨의 경이로운 생애에 관한 연재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요. 지난 호 뜨거운 반응을 얻었던 [AI+영화 소용돌이 세미나 대화록 #2]도 절찬리 연재 중입니다. 8월 8일, 이미지북 점령 행사에 함께 하지 못한 독자분들을 위한 게임도 준비했습니다. 모든 엔딩을 보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으니 도전해 보시지요. 독자차지와 샌드위치맨도 다채롭게 채웠습니다. 차지 독자를 위한 연극 <체온> 초대권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으니 놓치지 마세요.

차지의 소중한 독자 여러분… 이미 저희는 달 뒷편에 사는 토끼들과 친구가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Tags: 신포도 8호 탈플랫폼 편집실


Updated 26.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