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1호 > 좌담 >
조커는 크고 록조는 작다: 빅 딕 에너지의 문제
👤월간차지 편집부
놀랍게도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는 아닙니다. 저희는 술을 마시지 않고도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조커 얘기를 하다가 록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록조 얘기하다가 조커 얘기가 나온 것이었을까? 경위는 중요치 않습니다. 요지는 조커와 록조 모두에게서 감각되는 비슷한 ‘기운’이 있다는 것이었고, 이를 한 번 본격적으로 규명해 보자며 제리, 마지, 칼 세 사람이 모월 모일 모처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조커는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를 비롯한 배트맨 세계관의 작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모두가 알고 있는 그 광대입니다. 록조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One Battle After Another)에서 숀 펜이 연기한 늙고 가여운 경찰 특수기동대장입니다. 현대판 KKK처럼 굴면서 정작 흑인 여자 앞에서는 엉덩이를 쉽게 놀리는 모순덩어리 영감! 이 두 캐릭터를 대당으로 두고 떠든다는 게 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뭐 어떤가요?
창간호를 장식하는 첫 대담이 이런 주제라는 것은 사실 저희로서도 조금 유감입니다. 창간호에서는 아무래도 그럴싸한 것을 다루는 게 좋잖아요. 남한 커뮤니티의 미래, OTT 시대의 콘텐츠 전략, 남방큰돌고래가 제주 연안에서 출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같은 것들… 하지만 저희는 장고 끝에 조커와 록조의 BDE를 논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논한다는 표현도 조금 넘칩니다. 뭐… 어차피 대단히 진지한 걸 하려고 시작한 잡지도 아니니까요.
BDE는 빅 딕 에너지(Big Dick Energy). 직역하면 조금 민망하니 일단은 그냥 ‘뭔가 크고 묵직한 기운’ 정도로 눙치기로 하지요.
저희가 결집한 중앙동의 한 카페 일각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동아리 회장의 횡령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파스텔톤 숄에 기가 막힌 빈티지 귀걸이를 매치한 중년 여성이 홀로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곳의 가지 스튜와 뿔소라 샐러드는 정말이지 일품입니다. 저희의 대화는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조커의 연필 트릭 장면에서부터 록조가 퍼피디아에 굴복하던 BDSM적 순간까지. 카리스마란 무엇인가. 자신감과 허세는 어떻게 구분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왜 이런 캐릭터들에 매혹되거나 매혹되지 못하는가. 왜인지 카페 안의 모두가 저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인상을 찌푸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피해의식이 분명합니다...
〖제리〗 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지〗 비장하네.
〖제리〗 제일 중요한 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봤는지 돌아가면서 고백하자.
〖칼〗 그거 숙제였어요?
〖마지〗 보고 오라고 했잖아.
〖칼〗 좌담의 주제가 그거였어요?
〖제리〗 나는 세 번 봤거든?
〖마지〗 세 번을 왜 봐.
〖칼〗 재밌어요?
〖제리〗 ‘록조’라는 캐릭터가 나오거든. 좀 희한해. 미합중국 특수기동대장직에 있는 권력자인데, 늙은 백인 남성이고, 약간 로봇 같은데…
〖마지〗 이제는 로봇이라는 표현도 되게 과거의 유물이다.
〖제리〗 그럼 로봇이 아니라 ‘로보트’라고 해야지.
〖마지〗 확실히 근자의 AI 같지는 않아.
〖제리〗 근데 얘가 디카프리오의 애인을 체포하거든? 이름이 퍼피디아인데, 혁명단체 멤버야. 겁나 섹시한 흑인 여자인데, 퍼피디아가 맨 처음에 록조한테 반달을 할 때 성적으로 능욕을 하거든. 근데 록조가 여기서 인생 최대치 흥분을 해 버린 거지. 풀려난 다음에도 막 혁명군 따라다니면서 멀리서 망원경으로 퍼피디아 엉덩이 훔쳐보면서 좋아하고.
〖칼〗 혁명군이 반달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퍼피디아가 록조를 능욕했고, 그 이후로는 록조가 퍼피디아를 몰래 따라다니다가 체포를 해버렸다는 거죠?
〖마지〗 맞아.
〖칼〗 퍼피디아는 디카프리오 애인이고요? 디카프리오도 혁명군이에요? 디카프리오는 배역 이름이에요? 아니면 디카프리오가 연기를 했다는 거예요?
〖제리〗 얘 포스터도 안 봤나봐.
〖마지〗 나가.
〖제리〗 대충 맞아. 디카프리오는 이름이 밥이야. 그리고 록조는 숀 펜이야.
〖칼〗 대당끼리 같은 위치에 놔야지. 디카프리오는 밥이고 숀 펜은 록조인거지.
〖마지〗 맘에 드네. 다시 들어와.
〖제리〗 근데 진짜 록조가 퍼피디아한테 쩔쩔맨단 말이야. 사실 그럴 필요가 없잖아. 근데 혁명군 동료 정보 불고 자기랑 몇 번 자주는 대가로 번듯한 집도 주고 신변도 보호해 주고. 특진하고 나서 꽃다발 들고 찾아가고.
〖칼〗 빌런치고는 낭만적인 스타일 아닌가?
〖마지〗 보면 그런 말 안 나와. 드러워.
포스터만 봐도 등장인물 파악에는 무리가 없다.
〖제리〗 섹스 신이 있거든. 근데 그게 어떻게 보면 록조가 당하는 것처럼 보여. 권력관계에서는 록조가 훨씬 위에 있는데 사적인 관계에서는 퍼피디아가 완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퍼피디아가 록조를 버리고 떠나기도 하고.
〖마지〗 그땐 록조가 거의 복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심지어 그 잠자리를 퍼피디아가 원한 것도 아닌데.
〖제리〗 나중에 록조가 백인우월주의자 단체에 심문당하는 장면이 있어. 이름이 뭐더라?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인가? (편집자 주: 맞다.) 상부에서 흑인 여자랑 관계를 했냐, 이렇게 추궁하니까 록조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저는 역강간을 당한 겁니다.” (좌중 폭소)
〖제리〗 근데 그게, 그냥 면피용이 아니라 어떤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것 같더라고. 그게 록조 캐릭터의 핵심 같애. 권력은 분명히 있는데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서 다 망친다고 해야 되나? 백인 우월주의자면서 자신의 블랙피버를 이기지 못해서 몰래몰래 무릎 꿇고 복종 당하는 그 모순이…
〖마지〗 현실적이긴 해. 저런 남자들 되게 많잖아. 한두 명 봤어?
〖칼〗 숀 펜 연기 궁금하다.
〖제리〗 완전 미쳤어. 드러운 거랑 별개로. 근데 사실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냐면 있잖아. 록조는 되게 작을 거란 말이지.
〖칼〗 네?
〖마지〗 (한껏 발음을 굴리며) 타이니 딕 에널쥐~?
〖제리〗 아니 실제 크기를 말한다기보다, 남성성이 발현되는 방식으로서의 딕 에너지?
〖칼〗 그게 뭔데요.
〖마지〗 음… 어떻게 설명하지.
숀 펜은 록조고 디카프리오는 밥이다.
〖제리〗 실제 사이즈랑은 상관이 없는 거거든. 여유가 있는 것? 모든 것에 너그럽고, 부드럽고, 열등감이 없고…
〖마지〗 크리스 에반스, 키아누 리브스, 오바마…
〖칼〗 이거 성희롱 아니에요? 창간하자마자 폐간당할 것 같아요.
〖마지〗 실제 사이즈 얘기가 아니라니까. 그건 진짜 고소감이고. 실제로 어떤지를 누가 알아?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그냥 존재 자체에 여유로움이 묻어난다는 거야. 모든 발화와 동작과 리액션에. 만약에 니가 남자고, 빅 딕이 실제로 있다고 생각해 봐. 보이지 않더라도 나에게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로 내 여유의 원천이 되지 않겠어? 증명할 필요도 없지. 있다고 우길 필요도 없고. 그냥 나한테 원래 있는 거니까.
〖칼〗 아 대충 알겠다.
〖제리〗 그 반대의 에너지가 뭔가 과시하는 거, 증명하려고 애쓰고, 차에 소음기 떼고... 남들이 나에게 빅 딕에 상응하는 것이 있다는 걸 알아주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거야. 왜냐면 실제로는 없기 때문에.
〖칼〗 여자한테도 있을 수 있는 거네, 그러면?
〖제리〗 있지. 음… 리한나?
〖마지〗 오 완전 인정.
〖제리〗 케이트 블란쳇?
〖마지〗 도자 캣도 있다.
〖칼〗 원래 다들 이 말을 쓴다는 거죠?
〖마지〗 원래는 인터넷 밈에서 나온 건데. 2018년인가? 아리아나 그란데가 피트 데이비슨에 대해서…
〖마지〗 근데 실제로 피트 데이비슨이 크대.
〖칼〗 어떻게 알아요?
〖마지〗 아리아나 그란데가 트위터에서…
〖칼〗 아 오키.
[편집부 주석]
BDE(Big Dick Energy)는 2018년 6월, 팝스타 아리아나 그란데가 당시 약혼자였던 피트 데이비슨과 결별 후 트위터에서 매우 짧고 결정적인 언급을 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리아나도 좀 오버했다 싶었던 모양인지 빛의 속도로 이를 삭제했으며, 피트 데이비슨은 이 루머(?)를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누리꾼들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몇 시간 만에 ‘빅 딕 에너지’라는 밈이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밈이 정의하는 바에 의하면 에너지는 실제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그러나 모두가 그 이야기를 조금씩은 합니다), 그것을 증명하려 들지 않아도 되는 어떤 태도에 있습니다. 이는 인물의 성별·인종·정치적 정체성과 무관하게 취득 가능합니다.
〖제리〗 아무튼 딕 에너지는 이제 하나의 분석 틀로 써도 무방할 것 같아.
〖칼〗 근데 왜 록조는 스몰이 아니라 타이니예요?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제리〗 스몰은 좀… 아까 말한 것처럼 부정적인 느낌이잖아. 열등감 있고 그래서 과시하고 그런 류의. 근데 타이니라고 하면 스케일의 문제가 되는 것 같아서. 록조는 열등감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작동하는 범위가 좁은 거거든.
〖마지〗 권력은 있는데 그게 넓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건가?
〖제리〗 맞아. 권력자인데 그 권력을 퍼피디아 한 사람한테 다 쏟아붓는 거야. 도시를 장악하거나 세상을 바꾸거나 그런 게 아니라.
〖마지〗 집착인가?
〖제리〗 그보다는 욕망의 스케일이 작다? 근데 그게 오히려 더 무섭기도 한 것 같고.
〖칼〗 왜요?
〖제리〗 우리가 실제로 만날 수 있으니까. 빅 딕 에너지를 가진 사람은 뭔가 멀리 있잖아. 아까도 봐봐. 크리스 에반스나 오바마 얘기했잖아. 근데 타이니 딕 에너지를 가진 사람들은 길거리에 나와서 막 돌아다녀.
〖마지〗 조커는 어때?
〖제리〗 조커는 정반대지. 빅 딕이지. 도시 전체를 주무르잖아. 스케일이 아예 달라. 조커가 길거리에 등장했다? 개인의 안위를 따질 계제가 아니야. 행정 체계부터 끝장나고 그 다음엔 단체로 학살당할걸?
〖칼〗 히스 레저 버전으로 가는 거죠?
〖제리〗 당연하지. 나머지는 우선 논외야.
〖칼〗 호아킨 피닉스는요?
〖마지〗 호아킨 피닉스 조커는 스몰을 넘어서 딕리스에 가깝지.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서 미쳤잖아. 히스 레저 조커는 아무 것도 증명을 안 해.
〖제리〗 맞아. 그게 핵심이야. 조커는 자기가 뭔지 설명 안 해.
〖칼〗 와이 쏘 시리어스~ (샤이니의 노래를 부른다)
〖제리〗 잘 부른다~
맞춰봐~ 어느 쪽이게~! 얼굴만 보면 몰라~
〖마지〗 배트맨이 막 심문하잖아. 누구냐, 목적이 뭐냐 물어보는데, 조커는 도통 대답을 안 해. 대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앞뒤를 고의적으로 안 맞추니까.
〖제리〗 흉터 얘기할 때도 매번 다르게 진술하고.
〖칼〗 아버지한테 당했댔다가 아내 때문이랬다가.
〖마지〗 그게 거짓말이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조커는 자기 이야기에 일관성을 부여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거지. 왜냐면 애초에 자기를 설명하려는 욕망이 없으니까.
[편집부 주석]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자신의 입에 있는 흉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때마다 다른 이유를 댑니다. 그가 과거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철저한 설계에 따른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진위를 청자 혹은 관객에게 확인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 진위 여부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셈이죠. 원작 코믹스에서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수첩에도 그의 과거는 정확하게 쓰여있지 않다고 하네요. 요컨대,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과거에 대한 플래시백은 완전히 생략되어 있습니다.
〖제리〗 록조는 계속 자기를 정당화하잖아. 나는 법을 지킨다, 나는 세상을 정화하는 데 기여했다, 나는 역강간 당했다…
〖마지〗 (웃음)
〖제리〗 근데 조커는 정당화 자체를 안 해.
〖칼〗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록조는 왜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권력은 오히려 조커보다 더 큰 거 아니에요? 이게 왜 타이니 딕의 근거로 작동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냥 거짓말쟁이 아니에요?
〖제리〗 거짓말을 해야 하는 순간 이미 타이니 딕으로 확정되는 거거든. 빅 딕 에너지가 있는 인간들은 거짓말할 필요가 없어. 왜냐하면 타인의 승인이 필요 없으니까.
〖칼〗 조커는 배트맨한테 승인받고 싶어 하지 않아요?
〖제리〗 오.
〖마지〗 집착은 맞는데 욕망은 아닌 것 같아.
〖칼〗 차이가 뭔데요?
〖마지〗 승인은 수직적이잖아. 위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인정해 주는 거. 근데 놀이는 수평적이지.
〖칼〗 아, 놀이 상대다?
〖마지〗 그렇지. 조커한테 배트맨은 자기를 완성시켜 주는 존재일 수는 있어. 대사를 그렇게 치니까. 근데 그게 집착이라기보다는…
〖제리〗 필요조건?
〖마지〗 그보다는…
〖칼〗 ……
〖제리〗 (코 고는 시늉을 한다)
〖마지〗 그보다는 그냥 선택인 것 같아. 배트맨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배트맨이 있으면 더 재밌으니까 같이 노는 거지. 자발적 관계라는 거지.
〖제리〗 중요한 얘기인 것 같아. 이를테면 록조는 퍼피디아를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당한 거니까.
〖마지〗 그렇지. 록조는 퍼피디아랑 처음 만나서 성적으로 굴욕당했을 때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뭔가 깨어나 버린 거야.
〖칼〗 욕망의 각성이네요.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제리〗 그래서 타이니하다는 거야. 욕망이 자기를 지배하는 순간 스케일이 오히려 작아져.
〖칼〗 왜요?
〖제리〗 세상이 그 욕망을 중심으로 재편되니까. 록조한테는 이제 퍼피디아밖에 안 보이는 거야.
록조에게 퍼피디아란…〖칼〗 근데 제가 오늘 들은 바에 따르면, 록조와 퍼피디아의 관계는 사랑은 아닌 거잖아요.
〖마지〗 원래 사랑과 집착의 다른 점이 뭐야. 말해봐.
〖칼〗싫어요. 오빠가 해요.
〖마지〗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거고, 집착은 상대한테 자기 판타지를 투사하는 법이잖아.
〖칼〗 퍼피디아는 생존을 위해서 록조를 이용하는 건데, 록조는 진짜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거죠?
〖마지〗 자기기만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딕 에너지는 작아지는 것 같아.
(잠시 휴식. 제리와 칼이 흡연 후 들어와서 주제를 전환한다.)
〖마지〗 이 구시대적 인물들. 비흡연자를 너무 방치하는 거 아니야?
〖제리〗 칼이 이 앞에서 강아지 사진 찍고 있었어.
〖칼〗 너무 귀여워. 이름 콩콩이래요.
〖제리〗 밖에서 얘기한 건데, 조커가 엄청 많잖아.
〖마지〗 버전이?
〖제리〗 응. 히스 레저만 조커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