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4호 > 영업합니다 >
제니스에게 금붕어를 팝니다
👤유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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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스, 1996년 미국 뉴욕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고민할 것인가,
강을 건너는 순서를 배울 것인가
제니스는 이제 막 두툼한 랩톱 뚜껑을 닫은 참이었다. 랩톱에서 흘러나오던 청색 빛만으로 버티던 방이 금세 어두컴컴해졌다. 제니스는 매력적인 웃음소리를 가졌지만 그 순간만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남편이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텅 빈 마음을 어찌하지 못해 사이버로 소통하는 얼굴 모를 남자친구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낮까지만 해도 제니스는 괜찮았다. 랩톱의 빛 말고도 자연광이 있었으니까. 자연광이 저물고, 사이버 세계의 빛밖에 남지 않은 순간, 제니스는 진실을 밝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함께 hh(holding hands)를 하며, 구겐하임 미술관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버 남자친구에게 답답함의 근원을 토로한다. “남편이 여비서와 놀아나고 있어요.” 1초가 아까운 듯 쉴새없이 대화를 나누던 사이버 남친에게서 답이 없다. 메시지를 열 개 보냈다. 아마 그쪽에도 정확히 열 번, 핑 소리가 울렸을 테다. “무엇이 잘못됐나요?” 초조해진 제니스가 다시 묻는다. 아직 답이 없다. 제니스는 현실을 바꾸고 싶다.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
제니스야, 안녕? 너 스물아홉 살이지? 내가 언니니까 그냥 반말할게? 내가 원래 이렇게 쉽게 말을 놓는 사람은 아닌데, 지난 다섯 개의 글을 정중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쓰고 나니 이골이 나서 말이야.
있잖아, 제니스.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어요” 까지 보냈으면 됐어. 이제 오늘 밤 네가 할 수 있는 로맨스는 다 한 거야. ‘핑’을 열 번이나 보냈는데 아무런 답이 없어서 답답한 네 마음 이해해. 하지만 정말로 네가 할 수 있는 건 죄다 했어.
그거 알고 있어? 금붕어는 어항 크기에 맞춰서 자란대. 작은 어항에서 크는 금붕어는 작게 성장하고, 저수지에 사는 금붕어는 40cm까지도 큰다는 거야.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나도 그냥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은 거거든. 어쨌든 저 말을 들으면 옛날 사람들은 우와, 금붕어란 물고기는 사육하기 참으로 편리하구나,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조금 가여움을 느끼곤 하겠지. 전족을 신고 자란 여자아이들이나, 인간의 욕심으로 개량한 티컵강아지 같은 동물들을 떠올리게 되잖아.
내가 지켜봐 온 너는 조금 시끄럽고 괄괄대고 가끔 이해할 수 없게 굴지만 사실 사람을 진심으로 대할 줄 아는 따뜻한 심성을 지녔지. 금붕어와 반대야. 너는 어항이 작으면 작을수록 도리어 마음을 크게 부풀리는 사람 같아. 채팅창이 작으면 작을수록, 답장이 짧으면 짧을수록, ‘핑’이 적으면 적을수록… 너는 유전자 조작된 옥수수처럼 거대한 마음을 키우지. 너의 마음은 팔뚝만 한 수조 안에서 20센티미터의 크기로 자라난 금붕어야. 물은 넘칠 테고, 밥은 모자랄 테고, 툭하면 수조 모서리에 몸을 부딪쳐 멍들고 상처 나겠지. 내 마음이 아파.
나는 너한테 금붕어 한 마리를 팔고 싶어. 비유로서의 금붕어가 아니라,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몸뚱이로 어항 속을 유유히 휘젓는, 흔하디 흔한 빨간 관상용 금붕어를 말이야. 이름은 ‘아리엘’이라고 지었어. 어항, 산소 공급기, 모래와 해초, 금붕어 밥도 같이 세트로, 20달러 정도면 어떻겠어? 왜 너에게 아리엘을 영업하는지 궁금하겠지.
첫 번째 이유. 너, 지금 ‘핑’을 기다리고 있잖아. 대꾸를 기다리는 일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잔혹한 기다림 가운데 하나야. 기차를 기다리는 관광객에게는 시간표라도 있고, 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는 장마라는 최후의 보루라도 있지. 그러나 ‘핑’을 기다리는 불안형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없어. 답은 오늘 올 수도 있고, 사흘 뒤에 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슈뢰딩거의 답장을 기다리는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수많은 자기 비하와 후회의 파도가 밀려오겠지. 아, 내가 너무 가벼워 보였나? 혹은, 반대로 지나치게 진지했나? 이모티콘을 쓰지 말 걸 그랬어. 구겐하임 미술관에 관해 얘기하지 말 걸 그랬어. 남편이 바람났다는 불필요한 소릴 하지 말 걸 그랬어!! ‘핑’을 기다리는 내내 너는 수조 모서리에 지느러미를 쾅쾅 부딪치며 왕복운동을 지속해.
자, 이 ‘진짜 금붕어’는 그 모서리에서 너를 잠시 떼어 놓는 데 유용할 거야. 어항 속 금붕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훌쩍 가거든. 15분, 30분, 어쩌면 몇 시간을 그렇게 보낼 수 있을지 몰라. 아리엘은 제니스, 너에게 답장 같은 건 하지 않아. 핑을 보내지도 않아. 그냥 어항 속에서, 너를 보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얼굴로 입을 뻐끔, 뻐어끔, 거리면서, 그저 무심하게 자신의 세상을 탐방할 뿐이야. 너는 잠시 세간의 괴로움에서 너를 분리하고 비로소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거야.
두 번째 이유. 금붕어의 사육 적정 온도는 24도에서 26도. 이왕 키우는 거,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워야겠지. 아리엘 녀석을 위해 너의 아파트 실내 온도를 그 정도로 유지할 수 있다면 좋을 거야. 네 마음도 안정될 거야. 적당히 훈훈하고 습윤한 공기 속에서.
세 번째 이유, 나도 동물행동학자나 애니멀 커뮤니케이터 같은 게 아니니까 그냥 잘 모르면서 하는 소린데, 아리엘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야. 금붕어가 정말로 강아지나 고양이, 혹은 까치처럼 인간을 식별할 수 있는지, 먹이 주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지 나는 확실히 공언하지 못해. 다만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사람이 어항 앞으로 다가와 의자에 앉으면 이 귀여운 자식이 그쪽을 향해 헤엄쳐 온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처럼 보여. 그 작고 나풀대는 지느러미를 하찮게 펄럭이면서 말이지. 이게 무슨 말이냐면, 너의 침대맡 협탁에, 하루 두 번씩 매일 너를 애타게 기다리는 작고 귀여운 생물이 생긴다는 것이지. 이 아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는 공연히 밖을 나돌아다니며 우울함에 빠져드는 자기 파괴적 습관에서 벗어나 매일 적당한 시간에 귀가할 수 있을 거야. 아리엘을 배불리 먹이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기 위해서.
이제 마지막 이유를 알려줄게.
너는 매일 그 어항 앞에 앉게 될 거야. 처음엔 ‘핑’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그 다음엔 아리엘이 너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결국은 그냥 습관처럼 앉게 되겠지. 그러다 한 계절이 통째로 지나갈 즈음에 너는 네 눈으로 확인하게 될 거야. 금붕어가 어항의 크기에 맞춰 자란다는 내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처음엔 고작 손가락 한 마디만큼 작았던 아리엘이, 어느 날 두 마디 크기로 자라 있어. 넉넉했던 어항 속에서 방향을 틀어 헤엄칠 때마다 꼬리가 모서리에 닿는 것이 보여. 불편하고 답답해 보여.
그럼 너는 아마 새 어항을 사 오겠지.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비싼 것으로. 협탁 위에 두었던 플리츠 램프를 치우고, 자기 전에 보려고 쌓아놓은 잡지 몇 권을 바닥으로 내려놓고, 산소 공급기 줄을 다시 설치하고, 모래 갈이를 하고, 수온을 맞추고. 그 어항마저 또 작아지면, 너는 좀 더 큰 수조를 사 올 거야. 아리엘이 몸집을 키울수록 네 방의 배치나 구조가 조금씩 달라질 테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런 일이니까. 내가 가진 자리의 일부를 기꺼이 내어주는 일이니까. 나중에는 매트리스만큼 큰 어항이 필요해질지도 몰라.
그리고 그걸 몇 번쯤 반복하고 나면, 너는 어느 깜깜한 밤에 문득 너 자신에게 묻게 될 거야. 나는 왜 이걸 나에게는 해주지 않았지? 라고.
나는 왜 내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도 더 큰 어항에 나를 풀어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 왜 매번 좁아터진 어항에서 살아남으려고 관 속의 미라처럼 버텼지. 왜 내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마음을 주고, 멍들고 상처 입는 나를 방치했지. 이 어항의 주인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나를 이 좁아터진 어항 속에 내버려둔 줄도 모르고, 나는 왜 거기서 꼬리를 접고, 몸을 구겨 접고, 숨쉬기 힘들 때까지 머무르려고 했던 거지?
알아. 오늘 밤 당장 이런 생각을 할 수는 없을 거야. 그건… 뭐랄까, 너무 극적이지. 하지만 어느 날 새벽, 너는 ‘핑’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 채 아리엘의 밥을 챙기는 네 모습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때 너는 비로소 알게 될지도 모르지. 네 마음이 뭉게뭉게 커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를 손바닥만 한 어항 속에 넣어두고 사랑이라는 말로 너를 구슬리는 이들이 나빴다는 것을 말야… 어때, 제니스? 너에게 ‘아리엘’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아?
고마워. 좋은 거래였어. 이 20달러를 가지고 ‘센트럴 퍼크’에서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 운이 좋으면 레이첼, 모니카, 피비랑 조이, 로스, 그리고 챈들러에게도 한 잔씩 돌릴 수 있을 거야. 걔네는 늘상 거기 죽치고 앉아 있잖니. 카우치를 지들이 전세낸 마냥.
그리고 사실 제니스, 지금 ‘핑’하지 않는 그 남자는 약간 회피형일 수는 있지만, 사실 꽤 재미있거나 심지어는 괜찮은 녀석일지도 몰라. 일단 만나 봐. 행운을 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