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전쟁의 한복판에서
신포도
25년 12월 28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봤습니다. 영화가 좋았어요.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좋았습니다. 심지어는 그 감정을 글로 써서 남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좋았어요. 글로 쓰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써야 하지? 이 영화는 본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해도, 얼마나 많은 이가 봤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월간차지』의 창간 에디터스 레터를 빌려오자면) 많은 사람에게 읽힐 글을 쓰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는 영화를 비평하는 방법에 관해 고민했어요. 보지 않은 영화에 관한 글을 '읽히게 쓰는' 방법을... 찾고 실험하는 중입니다.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죠.
사람들이 보지 않았을 이미지 설명을 건너뛰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죠. 혹은 보지 않은 영화를 만든 감독의 (당연히 보지 못했을) 전작들로 씨줄 날줄 엮어 맥락을 구성해 낼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저도 라두 주데 감독 영화 이거 하나밖에 안 봤어요. 거짓말을 해야 해서 실패. 아니면 온갖 철학자의 이름과 문장을 영화의 몇몇 요소에 덧붙이며 제 교양을 뽐낼 수 있겠죠. 근데 멋있지 않아서 실패.
그래서 구구절절을 택했습니다. 친구에게 말하듯 차근차근 설명을 해보려고요. 일종의 대화록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영화를 본 자와 영화를 보지 않은 자의 대화. 영화를 보지 않은 제가(단포도) 영화를 본 제게(신포도) 질문을 던질 겁니다.
이 형식이 가능한 이유는 이 영화가 좋은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영화는 보기 전과 후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습니다. 어쩌면 저는 <콘티넨탈'25>를 보고 새로 태어난 겁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 영화는 전생과 현생의 제가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입니다. 너무 거창한가요?
단포도(이하 '단'): 근데 왜 라두 주데 영화를 보러 갔어? 원래 아는 감독이었나?
신포도(이하 '신'): 무비 노트북에서 기사를 읽었거든. 라두 주데 감독이 신작 <드라큘라>에 관해서 나눈 이야기가 기록된 글이었는데. 엄청 자세히 읽은 건 아니고, 슥 훑어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감독 같더라고. <드라큘라>에서는 AI로 만든 조악한 이미지들을 썼대. 최근작 시사회에서 엇갈린 평가를 받은 영화감독이 AI한테 더 상업적으로 성공 가능성이 높은 대안을 제시해달라고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
그래서 조금 찾아봤는데 <콘티넨탈'25>도 아이폰으로 찍은 영화래. 동시대에 영화를 찍는다는 것. 그 주제를 가지고 기계든, 주제든, 이미지든 다양하게 시도해 보는 사람 같더라고.
단: 아이폰으로 영화 찍어서 동시대 감독인 거야? 참내, 그럼 나도 동시대 감독이다.
신: 웃기고 있네. 그냥 아이폰을 썼다는 것만으로 동시대 감독이 되는 건 아니지. 그보다는 동시대적 이미지를 어쩌면 강박적으로 쓰더라고. 지금 진행 중인 소셜 미디어에 퍼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스냅 영상이나 바이럴 언론, 더 나아가서는 스마트폰에서 애니메이션 형태로 제시되는 UI의 이동성도 암시하고.
사실 이 영화의 서사나 주제 자체가 그런 동시대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거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이미지이기도 해. 특히 소셜 미디어에 퍼지는 러우 전쟁에서 자살하는 병사 영상은 더더욱.
단: 대체 뭔 이야기인데?
신: 대략의 스토리는 이래. 주인공은 행정 명령을 집행하는 중년 여성 집행관이야. 되게 착하거든? 독실한 가톨릭이라서 변호사를 할 만한 능력도 됐는데, 범죄자를 옹호할 수 있으니까 변호사는 하지 않겠다고 결정해. 건물 철거 명령 떨어졌을 때 거기 살고 있는 노숙인들한테 쉼터 연결해 주고, 그런 일을 하거든. 어쨌든 갈 곳 없는 사람들한테 갈 곳 마련해 주는 일이니까, 나쁜 일은 아니잖아.
단: 근데 뭔가 저 사람이 나빠지는 사건이 등장하는구나. 어쨌든 집과 관련한 문제니까 젠트리피케이션이나 홈리스 문제랑 무관하지 않을 것 같고.
신: 맞아. 사실 영화 첫 시퀀스에서는 이 사람이 등장하지도 않아. 주인공한테 퇴거 명령을 받는 노숙인을 뒤좇는 게 첫 시퀀스거든. 일종의 맥거핀이지. 노숙인이 이곳저곳 돌아다녀. 루마니아에 있는 어떤 곳이겠지? 공룡 크리처가 쿠앙쿠앙 우는 공원도 돌아다니고. 야외 레스토랑에 앉아서 한가로이 점심을 먹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구걸도 하고. 하루 종일 쓰레기 같은 걸 주우러 돌아다니다가 무슨 갑자기 로봇 개도 나와. 로봇 개가 막 뒤에서 짖으니까 노숙인이 “저리로 가 저리로 가”하면서 내쫓거든.
그리고 집에 가는데… 홈리스잖아? 그 집이 진짜 집이 아닌 거야. 곧 철거될 건물의 보일러실에 숨어서 살고 있는데 집행관이 찾아와. 거기가 보일러실이니까 빛이 안 들잖아. 그래서 밤인 줄 알았는데 집행관이 문을 열면 확 하고 빛이 들어오거든.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되게 시대착오적인 사람이랄까? 아니면 막 여러 시대를 떠돌아다니는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고….
단: 그러네. 공룡시대부터 동시대 레스토랑, 로봇 개와 근미래, 집 속은 항상 밤인 사람…. 그럼 그 집행관이 문을 열고, 그때 주인공이 처음 등장하는 거야? 관객 입장에서는 그때 주인공을 처음 보니까 집행관이 나쁜 사람 같겠네. 이미 그 노숙인이 주인공처럼 느껴지니까.
신: 그렇지. 근데 막상 들어와서 하는 이야기 보면 그리 나쁘지는 않아. 헌병들이랑 같이 들어와서 막 설득하거든. 이제 겨울이라 진짜 가야 한다고, 한 달이나 시간 더 주지 않았냐고. 좋은 쉼터를 소개해 주겠다고. 근데 노숙인이 자기는 쉼터 가기 싫다고 해. 뭐 이유를 더 자세히 설명하는 건 아니고. 그러다가 결국 노숙인이 짐 싸겠다고 하거든. 그래서 헌병들이랑 집행관이 잠깐 자리를 비우고 분수대 앞 벤치에서 커피 타임 갖고….
그동안 교차편집으로 노숙인이 뭘 막 찾거든? 얇은 철삿줄 둘둘 말린 걸 찾아가지고 보일러에 걸어. 그리고 목을 매.
단: 보일러에 목을 맨다고?
신: 죽음이 너무 간절한데 높은 곳이 없을 때는 그런 곳에서 죽기도 한대. 나도 들은 건데 문고리에 매달아서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 사실 높은 천장도 일종의 특권이잖아. 보일러실에는 그만한 공간도 없고, 딛고 올라갈 만한 가구도 없었을 거고.
커피 타임 끝낸 헌병이랑 집행관이 집에 돌아오는데, 노숙인이 죽은 걸 발견한 거지. 심폐소생술도 해보는데 이미 죽어서 살릴 수도 없고. 그래서 집행관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아. 혼란스러운 거지.
내가 하는 게 착한 일이 맞나? 법적으로 잘못된 건 없어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를 모두가 하는데, 그렇다고… 그렇다고 이게 다행인 게 맞나? 나는 뭘 해야 했지? 노숙인을 지금부터라도 도와야 하나? 집행관을 그만둬야 하나? 언어화하기도 쉽지 않은, 혼란스러운 질문들에 답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게 이 영화의 줄거리야.
단: 답을 찾으러 뭘 하는데?
신: 일단 여행을 취소해. 그리스인가? 어디로 가족 여행을 가려고 계획해 뒀거든. 근데 이런 질문들을 다 껴안고 여행을 갈 수는 없다는 거지. 남편이 엄청 삐치거든? 아 삐치는 거 보니까 내가 다 빡치더라고. 근데 사랑의 모양(하하)은 다 다르니까.
여행 포기하고 사람들을 만나러 다녀. 사람들한테 본인이 겪은 것,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이 본 것. 직시한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트라우마를 해소하려고 하는 거지. 일단 남편에게 먼저 이야기를 하고, 가족들이 휴가 간 첫날에는 친구를 만나. 그다음에는 어머니 만나고… 자기가 예전에 법대에서 가르쳤던 학생, 그런데 지금은 배달부가 된 남자애를 만나서 술도 진탕 마시고….
그 사람들을 만나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거든.
“노숙인이 집을 비운다고 해서 나는 헌병들이랑 같이 분수대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돌아왔어. 근데 오니까 그 사람이 보일러에 목을 맨 거야. 보일러에 목을 매다니. 조금 이상하지? 아무튼 철사 같은 걸로 목을 맸는데 너무 끔찍했어. 오줌 냄새에 눈이 튀어나와 있고. 이미 죽어서 심폐소생도 안 되더라고.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그게 잊히지가 않아. 너무 힘들어.”
이런 이야기를.
단: 친구는 어떻게 반응해?
신: 뭐… 힘들었겠다. 너무 놀랐겠다. 법적으로 문제없어서 다행이다. 네가 잘못한 건 없잖아…. 이런 상투적인 말을 하지. 결론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자기 집 근처 주차장에 살던 노숙인이 있었는데, 막 바깥에 똥 싸놓고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해줘. 그러니까 너무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막을 수 없는 불운의 사고였다는 거지.
근데 뒤에 이상한 말을 덧붙여. 자기가 요즘 로마(roma)인한테 기부를 하고 있는데 기부해 보는 건 어떠냐고 추천하는 거야.
단: 이탈리아 로마?
신: 아니. 유럽 전역에 사는 소수민족이래. 흔히 ‘집시’라고 불렸던 사람들. 인도 북부에서 살다가 유럽으로 이주한 유랑 민족인데, 동유럽에 많이 산다고 하더라고. 특히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로마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라고도 하고. 빈곤이나 주거 불안, 실업에 특히 시달려서 대부분의 공동체가 슬럼가에 거주한대.
단: 와 전혀 몰랐어.
신: 나도. 주인공이 그 이야기 듣자마자 친구한테 “네가 보내줘”라며 500유로 바로 보내 버리거든? 친구도 ‘어우 너무 많아’라고 하는데, 자기는 휴가 안 가서 괜찮다고 돈 보내줘. 뒤에 말하는 거 들어보니까 기부를 엄청 하더라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도 기부하고… 기부하는 데만 몇백 유로 쓴다는 걸로 기억해.
친구한테 심지어 물어본다? 로마인한테 자동 문자로 기부할 수는 없냐고. 그거 없으면 까먹어서 못 한다고.
단: 책임감이 엄청나네. 까먹는 것까지 걱정하다니.
신: 그치. 자동 기부를 바란다는 건 까먹어도 기부하고 싶다는 거잖아? 근데 이걸 분해해서 살펴보면 사실 까먹겠다는 말이거든? 의지가 깃들어있지는 않지만, 매 순간 로마인들에게 기부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면서까지 기부하고 싶지는 않다는 거지. 그렇다면 자동 기부는 일종의 회피일 수도 있어. 의식적인 직면이나 기억 없이도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감각은 느낄 수 있으니까.
단: 어떻게 보면 무책임이네. 돈을 내는 것 이상의 번거로움이나 심리적 충격은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거니까.
신: 그러니까. 이건 직면의 문제인 거야. 그러고 보면 노숙인이 죽은 걸 직시한 게 이 영화의 시작이었잖아. 노숙인의 죽음은 누군가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내재된 비윤리성–젠트리피케이션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손을 보태고, 노숙인의 더 나은 삶을 자의적으로 속단하는 것–을 직면하게 한 사건이니까. 그리고 영화도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시작하지.
단: 첫 시퀀스는 노숙인이 떠돌아다니는 거라며.
신: 거기에는 어떤 충돌이나 결합이 없잖아. 관객들은 그 노숙인 이름도 모르고, 저게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 사람한테는 사건을 만들 만한 힘이 없거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쓰레기를 줍고, 이미 세계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공룡 크리처 사이를 걷고, 사람들 사이에서 구걸해도 그냥 배경 요소 같아.
거의 NPC야. 근데 너무 평범해서 클릭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 디자인의 NPC. 공룡 시대부터 로봇 개가 떠돌아다니는 근미래까지를 유령처럼 움직이는 존재감 없는 사람. 영화에는 무엇이든 사건이 필요해. 인물의 행위가 공간이나 시간 사이를 통과만 하고 있으면 안 되고, 어딘가에 닿아서 화학적이든, 물리적이든 무언가의 결합/충돌 작용을 일으켜야 하지.
그게 없다면… 라두 주데가 아이폰으로 영화 찍고, 인공지능으로 영화 이미지 만드는 게 딱히 의미 없을걸? 모두의 핸드폰에 얼마나 의미 없는 떠돌이 영상들이 많은데. 의밋값 없는 인공지능 이미지는 셀 수조차 없는 수준이고.
모두가 아이폰을 갖고 있고, 모두가 인공지능을 쓸 수 있는 시대에 진정 ‘영화’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무언가를 하려면 떠돌아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야. 사건이 있어야 하지. 충격과 직면.
근데 그 노숙인의 위치가 관객의 위치와 되게 닮아있어. 관객은 영화 속 시간이나 공간 위를 다른 평면 위에서 떠돌아다니는 유령 정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단: 관객한테는 직면이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인가?
신: 비슷해. 관객이 하는 건 결국 영화 감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영화라는 틀에 모든 시선이 갇혀 버려. 어떻게 보면 자동 문자로 하는 기부랑 비슷하달까?
관객은 이 영화의 진짜 비극을 직면하기가 어려워. 우리가 아무리 전쟁 참상을 스마트폰에서 100개, 200개 본다고 해도 그게 진짜 비극이라고 느껴지겠어? 그게 정말 비극이라면 고어 영상 사이트의 수많은 전쟁 영상은 뭐야.
고어 사이트는 물론 극단적인 예시이긴 한데…. 결국 영화는 남의 이야기야. 나의 경우에는 남의 나라 이야기고, 시네마테크에서 보는 하나의 관람 사건이고. 혹은 영화제라는 페스티벌에서 접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이 모든 경험은 실제로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사건, 혹은 비극이라기보다는 영상으로 열화된 복제에 가깝잖아.
단: 시뮬라시옹, 시뮬라크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신: 재현의 차원이 아니야. 모럴의 문제에 가깝지. 얼마 전에 리처드 링클레이터 <누벨바그> 봤거든. 거기서 로셀리니가 막 그러더라고. 영화는 모럴의 문제다. “찍지 않으면 안 될 때만 찍어야 한다.” 그래서 조금 찾아봤거든?
유운성 평론가는 로셀리니의 모럴을 이렇게 해석해. 감독이 취하는 사회적 스탠스나 의무 같은 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전망. “보다 정확하게는 세계의 위기 앞에 놓인 인간의 행위와 앎─그것이 과학적, 철학적 지식이건, 종교적 신념이건, 설명할 길 없는 불가해한 체험을 통한 인식이건 간에─사이의 관련을 역동적으로 드러내는 것.”①
내가 이해한 바대로… 납작하게 말하자면 모럴은 영화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태도, 혹은 자세라고 할 수 있겠지? 무언가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렇게 주어진 세계를 어떠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있느냐… 납작 엎드리고 있느냐, 무작정 분노하고 있느냐, 플라톤을 인용하냐, 니체적, 칸트적이냐. 불자 같냐, 예수 같냐. 그 앎을 어떤 행위로 재현하는가. 눈을 뜨고 있냐, 감고 있냐.
단: 그럼 이 영화의 모럴은 뭘까? 라두 주데가 동시대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뭔데.
신: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인데. 노숙인이 죽는 장면이거든? 죽음을 준비하는 장면, 교차편집으로 주인공이랑 헌병의 커피타임 같은 건 감춤 없이 보여줘. 근데 정작 노숙인이 죽을 때는 노숙인의 모습을 안 보여주거든. 소리만 뒤에서 들리고, 창문으로 옅게 들어오는 빛을 받는 행정 명령 쪽지를 비추지. 의도적으로 죽음의 순간을 이미지화하지 않은 거야.
나는 이게 어떤 정직함 같아. 만약에 관객이 이미지로 노숙인이 죽는 장면을 봤다고 쳐보자고. 그렇다고 해도 그게 과연 직면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크린-프로젝션-카메라 렌즈-아이폰15-국적-배우의 연기-가짜 죽음-'이것은 영화'라는 관객의 자의식 등을 통과하는데? 그런데도 관객은 일견 그것을 직면했다고 착각할 수 있지. 이미지라는 게 힘이 세잖아. 그냥 찍는다고 그게 현실을 담거나,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다고.
나는 모럴의 차원에서 그 착시효과를 의도적으로 피하려 노력하는 영화들이 좋아. 조금 구린 영화여도, 그런 영화가 좋아.
이 영화는 직면 불가능한 그것을 그냥 포기해 버려. 눈을 감아버리지. ‘당신은 이 사람의 죽음을 직면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주인공과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만나는 친구, 가족, 신부님의 위치에 가깝죠.’ 그걸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딱 저 한 장면으로 축약하는 것 같아.
단: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방식이네. 무언가를 포착하지 않음으로써 말하고 있으니까.
신: 그치 이 주인공 집행관이 과연 나쁜 사람인가? 아무도 그렇게는 말 못 할 걸. “저는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습니다” 누구나 받아들이는 명징한 명제에 의문을 가지니까. 의미적으로 어떤 충돌도 없는 그 명제에서 무언가가 기이하고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걸 감지해 내기는 하니까.
근데 세계가 기이한 명징함의 정체를 찾을 수 없도록 설계돼 있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문제가 없는 게 세계의 규칙이니까! 주인공도 그 이상함의 원인을 무엇이라고 짚어낼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직면의 상황을 계속 언어로써 되풀이하는 것 정도…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과정에서 직면의 순간을 흐리게 만드는 것뿐이지. 주인공이 트라우마를 해결하겠다고, 혹은 자신이 직면한 것에 관해 명확한 설명이나 답을 찾으려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할수록 직면의 충격은 점점 추상화되고 잊히니까. 그 열화의 과정 자체가 이 영화가 바라보는 동시대의 정체 같아. 열화되는 건지도 모르게 열화되는 것을 보는 일.
단: 생각해 보면 지금은 직면하는 것 자체가 어렵네. 법이라는 것도 결국 사건을 직면하는 게 아니라 그 위 차원의 추상화된 언어고. 세계를 풀어놓는 번역이고.
신: 그래서 이 영화는 결단을 내린 거야. 이 관객에게 진짜 직면을 줄 수 없다고. 대충 유사 직면을 주지 말고, 그냥 직면하지 않도록 하자. 공허한 말이 쓰인, 추상화된 법 명령이 적힌 행정 쪽지 따위나 보게 하자. 나는 거기서 확 무력감이 느껴지더라고.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되게 시혜적으로 감정을 이입할 뿐이지.
단: 내가 루마니아 사람이면, 더 나아가 헝가리 출신의 루마니아 사람, 헝가리 출신의 루마니아 사람이면서 종교적 이유로 변호사를 포기하고 약자를 위한 법을 집행한다 믿었던 집행관이라면 직면과 가장 닮은, 직면에 수렴하는 상태에 놓일 수 있었을까?
신: 영화가 관객을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상태를 사고실험으로 가정하는 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지.
단: 근데 유사 직면이 나쁜가? 직면이 어려워진 시대니까 그런 직면을 불완전하게라도 재현하고 알리는 게 좋은 것일 수도 있잖아.
신: 그치. 근데 그게 영화의 몫인지는 모르겠어. 영화는 세계의 파편, 여러 인물을 프레임에 가두면서 세계의 틀을 만들고, 그 틀로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또 누군가의 특정한 면을 보여주면서 세계를 건설해 나간 거잖아.
영화는 애초부터 거짓일 수밖에 없는 거지. 근데 지금은 너무 거짓말을 잘해서 거짓말하는 사람도 자기 거짓말을 믿게 되는 상황 같아. 나는 계속 그런 이미지가 떠올라. 뱀이 자기 꼬리를 먹는 것처럼, 자기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그러면 막 엄청 교육적인 영화들이 나와. 좋은 의미에서, 어떤 문화로서, 세르주 다네가 말하는 방향성이 없이 무한히 펼쳐진 교육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인 목적성을 가진 교육들. 사람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된다. 누군가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한다 등등. 가르치려 든다고. 남자들뿐만 아니라 영화감독들도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거지.
근데 이 영화는 꼭 나 같아. 나를 높이 평가하는 게 아니라, 나처럼 무력해 보여.
나는 라두 주데가 나와서 GV 하기 전까지 그냥 멍했어. 이게 진짜 세계 아닌가? 누가 세계를 정말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겠어? 특히 이렇게 세계가 쪼개진 판에. 누구는 트위터로, 누구는 고어 사이트에서, 누구는 해피빈, 누구는 뉴욕타임즈와 폭스뉴스, 누구는 시네마테크에서 세계를 보는데.
우리가 정말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과 이란의 전쟁을 직면하고 있기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