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2호 > 좌담 >
인류세의 중심에서 방공호 시네마를 외치다
👤월간차지 편집부
물비린내가 진동하는 밤이었습니다. 을지로의 골목골목을 뒤덮은 습기가 마치 곧 도래할 대홍수의 전조처럼 느껴지더군요. 『월간차지』 편집부는 눅눅한 노가리를 껌처럼 씹으며 인류세(Anthropocene)의 풍경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날 우리의 화두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왜 근자의 재난 영화들은 이토록 비겁하고, 이토록 못생긴 것인지.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쏟아부어 만든 이 매끈한 블록버스터들에는 기묘한 불쾌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일종의 엘리트주의적 징후이자 영화적 퇴행으로 파악했고, 이 새로운 전형성을 '방공호 시네마'로 명명하자고 제안합니다. 과거의 재난 영화들이 재난의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탐사보도극이었다면, 지금의 재난 영화들은 엄청나게 무겁고 커다랗고 두꺼운 벙커 안에서 안전하게 재난을 브리핑하는 엘리트들의 촌극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이행이 단순한 트렌드의 변화에 따른 것일까요? 아닙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즉 시네마의 본령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시간을 몇 배로 가속한 COVID-19는 단순히 극장 문을 닫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바이러스는 인류가 영화 속 재난을 감각하는 방식 자체를 영구적으로 손상시키고 말았습니다. 빙하가 모두 녹고 해수면이 상승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말이 왜인지 공포정치처럼 허망하게 느껴지던 시절이 박살났으니까요. 정말로 인류는 환경 때문에, 바이러스와 아메바와 곤충과 비둘기에 허무하게 멸종될 수 있는 유약한 족속임이 드러나고 말았으니까요. 물론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이 재수 없는 벙커의 벽을 뚫고 나오는 걸작들도 있으니 말이죠.
〖제리〗 자, 핵심부터 짚어 보자고.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인류세 재난 영화들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는 뭘까?
〖마지〗 확실히 차이가 있어.
〖칼〗 완전 있어요.
〖제리〗 그러니까 그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묻잖아.
〖마지〗 나는 주인공의 위치라고 봐.
〖칼〗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거예요?
〖마지〗 아니야. 시스템 내에서의 계급적인 위치를 말하는 거야. 그리고 그 계급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나뉘는 거지.
〖칼〗 정보가 없으면 계급이 낮고, 정보가 많으면 계급이 높고?
〖마지〗 응. 그렇지. 단순히 부나 권력의 문제는 아니야. 근데 사실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결국 돈이 많고 권력이 크겠지.
〖제리〗 코로나 이후의 주인공들이 이전의 주인공들보다 높은 계급이라는 거지?
〖마지〗 보통은 그래.
〖제리〗 계속 말해봐.
〖마지〗 방공호 시네마는 단순히 방공호가 등장하는 걸 말하는 게 아냐. 생각해 봐. 환경이 파괴되고 오존층에 구멍이 나고 빙하가 녹기 시작한 이래로 재난 영화에서 방공호가 나오지 않은 적은 없었어. 그렇지?
〖칼〗 아무거나 대봐요.
〖제리〗 <2012>①?
〖칼〗 오, 최첨단 방주가 나오죠.
〖마지〗 방주에는 누가 있었지?
〖칼〗 초 부자들이랑 상류층 전용이었죠.
〖마지〗 그치만 주인공인 존 쿠삭이 10억 유로를 낸 엘리트였어?
〖칼〗 부자들 짐이나 들어주는 리무진 운전수였죠.
〖제리〗 퀴즈쇼 하냐?
〖마지〗 <2012>보다 좀 더 예전으로 가 봐.
〖제리〗 <딥 임팩트>②?
〖마지〗 쟤는 모를걸? 쟤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영화라서.
〖제리〗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넌 그럼 채플린 영화 안 봤어?
영화 <딥 임팩트>(1998)와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2023)의 스틸컷.
〖칼〗 (나무위키를 읽는다) 1990년대의 어느 날 미확인 혜성이 지구와의 직선 충돌 궤도에 들어선다. 한편 미합중국 대통령은 전 세계 언론에 혜성 충돌 시를 대비한 지하 요새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제리〗 모르네.
〖마지〗 그 요새에는 누가 탔지?
〖칼〗 (계속 읽는) 어... 지하 요새에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들의 샘플과 20만 명의 각계 전문가들, 컴퓨터가 추첨한 50세 미만의 80만 명의 미국 시민들이 2년간 수용된다. 생각보다 공정한데요? 아시안이랑 라티노들도 태워줬을까?
〖마지〗 그렇지. 생각보다 공정한 게 포인트야. 그 영화는 90년대 영화거든.
〖칼〗 이 영화 주인공은 누군데요?
〖마지〗 일반인들이지. 방공호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 근데 애초에, 이 영화에서 방공호는 주인공들이 안락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누구는 헬기 타고 안전한 방공호로 갈 수 있는 티켓을 포기해. 대신에 바닷가에서 아버지랑 껴안고 쓰나미를 받아들이지. 일라이저 우드도 여자친구 구하려고 오토바이 타고 방공호 탈출하고 그래. 고루한 말일 수도 있는데 되게 정스러워.
〖칼〗 고루하지는 않은데 옛날 사람 같아요. 왜일까.
〖제리〗 인류세 가시화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방공호는 기득권을 위해서만 열린다는 거구나?
〖마지〗 맞아!
〖제리〗 주인공은 점점 특권층에 가까워지고?
〖마지〗 맞았어! (손으로 딱 소리를 낸다)
〖칼〗 저 사람 지금 자신의 통찰력에 감탄한다.
〖마지〗 그것도 맞아.
〖제리〗 근데 되게 설득력이 있네. 2000년대 한국만 해도 <해운대>③ 같은 영화 생각해 보면 주인공은 다 서민이잖아.
〖칼〗 그러네요. 방공호 바깥에서 뭔가 진실을 파헤치려고 하거나, 방공호에 안착하지 않고 재난 속으로 뛰어들거나. 막 하수구에 빨려 들어갈 뻔하기도 하고, 물에 둥둥 떠다니고요.
〖마지〗 응. 기본적으로는 탐사보도의 형식을 띠고 있는 셈이지. 주인공은 기자거나, 말단 과학자거나, 그냥 일반인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서를 하나하나 주워 가면서 거대한 실체에 접근하는 거야. 관객도 그들과 똑같이 무지한 상태에서 공포를 학습해 나가는 거고.
〖제리〗 그게 핵심이겠다.
〖마지〗 그렇지. 밖에서 안으로, 무지에서 지식으로 파고드는 에너지가 있었지. 그 과정에서 시스템의 부조리가 까발려지고.
〖제리〗 그럼 코로나 이후의 방공호 시네마는 그렇지 않다?
〖마지〗 응. 시작부터 이미 주인공이 통제실에 앉아 있어. 벙커의 일원이고, 백신 개발 책임자고, 재난을 막는 프로젝트의 수석 연구원인 거야. 정보의 비대칭이 완전히 역전된 거지.
〖칼〗 주인공은 이미 정보를 알고 있고, 관객인 우리는 걔네의 브리핑을 듣는 거네요. 영화를 보면서.
〖제리〗 설득력이 있다. 코로나 이후에 저커버그 같은 테크 거물들이 하와이에 엄청 큰 땅 사서 자기들만의 요새를 짓는다는 뉴스 같은 걸 보면 판타지처럼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한 현실이라는 느낌이 들잖아. 그런 감각이 영화에도 반영되는 느낌이야.
〖마지〗 그게 바로 우리가 방공호 시네마를 시네마적이지 않다고 느끼는 지점이지 않을까? 영화는 원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투쟁이잖아?
〖칼〗 그런가?
〖마지〗 근데 방공호 시네마는 모든 정보를 통제하는 권력자의 시선을 우리한테 대리 체험하라고 해. 세상은 이미 망했고, 이건 전문가인 우리가 처리할 문제니까 너네는 그냥 보기나 하라는 거잖아.
〖칼〗 그래도 전문가가 처리만 해준다면야 감지덕지 아닌가. 처리 안 해주면 그냥 다 같이 죽는 건데.
〖마지〗 또는 지들끼리만 살 방법을 찾아서 그걸 실행에 옮기겠다는 뜻이지. 기업들이 특수 코인 같은 걸 발행해서 그거 산 사람들만 지하 세계에 입장시켜 주겠다는 거야.
〖칼〗 그렇다면 매우 비겁하다.
〖마지〗 관리자여도 비겁해. 현실의 재난을 마주하거나 직시할 벙커 외부의 주인공을 만드는 대신, 그냥 안전한 관리자의 위치로 옮겨버리는 게 안 비겁해?
〖칼〗 어제 오빠가 말했던 스테이블 코인 같네요.
〖마지〗 스테이블 코인이 왜 신용을 얻는 것 같아? 미국 단기 국채가 뒷받침을 해주기 때문이잖아.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세상은 언제든 셧다운될 수 있다는 불안이 기본적으로 쫙 깔려 있는데, 엘리트들은 그걸 자기네 계급을 더 공고히 하는 데 써먹지. 대중들한테 우리가 이미 재난 속에 살고 있다는 걸 계속 인지시키는 거야. 그게 새로운 선민의식이라니까, 진짜로. "너희는 몰랐지? 난 원래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 벙커에 들어오려면 대가를 치르도록 해."
〖마지〗 완벽한 기만이지. 밖에서는 진짜 당사자들이 흙탕물 마시고 건물 잔해에 깔려 죽어가고 있는데, 벙커 안에서는 턴테이블로 바이닐 틀어놓고 비싼 와인 마시면서 세상 망하는 걸 구경하잖아.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④ 봐봐. 그 저택 기억나?
〖칼〗 아, 전 솔직히 그거 보면서 '와, 저 집 진짜 좋다. 세상 망할 때 저런 스마트 별장에 갇혀 있으면 진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요. 지하에 수십 년 치 통조림이랑 <프렌즈>⑤ DVD 꽉 차 있고.
〖마지〗 (테이블을 치며) 방금 네가 한 그 생각! 그 얄팍하고 불쾌한 욕망! 그게 바로 방공호 시네마가 노리는 타깃이야.
〖칼〗 제가 속물이라는 겁니까 지금?
〖제리〗 네가 속물인 것도 맞는데, 영화가 관객을 공범으로 만든다는 거잖아.
〖마지〗 맞아. 감독들은 마치 그 오만한 엘리트들의 위선이나 무능을 비판하는 척해. 블랙 코미디인 척 하지. 근데 카메라는 단 한 발자국도 그 벙커 밖으로 안 나가. 통창 너머로 저 멀리 뉴욕 시내가 불타는 걸 배경 화면처럼 띄워놔. 관객을 그 벙커 안에 앉혀버리는 거야.
〖제리〗 관객은 스크린 밖에서는 내일 출근 걱정하는 꼬리칸 평민인데, 영화관에 앉아 있는 두 시간 동안은 벙커 안의 엘리트 시점에 동기화되는 거네.
〖마지〗 그렇지. 영화는 우리한테 묘한 선민의식을 주입해. 너희는 저 밖에서 휩쓸려가는 무지한 대중과 달라. 진실을 알고 있는 깨어있는 시민이야. 이 거룩하고 압도적인 멸망을 교양 넘치게 감상할 자격이 있어. 이건 잘못됐어. 논리상 절대 아름다우면 안 되는 파국을, 미장센과 음악을 동원해서 낭만화해 버리는 거지.
〖칼〗 낭만화라... 근데 그 파국을 예쁘게 찍는 게 왜 죄예요? 영화는 시각 예술이잖아요.<바빌론>⑥ 파티 장면처럼, 세상이 끝장나기 직전의 그 미친 난장을 아름답게 꽉 채워서 보여주는 것도 시네마의 쾌감 아닌가?
〖마지〗 <바빌론>! 아주 좋은 예시다. 나도 <바빌론> 진짜 명작이라고 생각하거든. 근데 그 영화의 시대 배경은 옛날이잖아. 지나간 시대의 낭만이니까 그걸 과잉되게 찍는 게 용서가 돼. 근데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인류세'의 멸망을 그렇게 과잉되게 찍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제리〗 인류세에서는 자원 낭비 자체가 죄악이니까?
〖마지〗 응. 이 시대에 그런 과잉된 시퀀스를 찍는 것 자체가 모럴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도 있어. 엑스트라 수백 명을 동원하고, 코끼리가 똥 싸고, 온갖 비의한 것들이 만국박람회처럼 쏟아지는 광경... 다시 말하지만 그 장면에 나도 압도됐어. 다만 사후적으로 곱씹어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거야.
영화 <바빌론>(2022) 스틸컷.
〖칼〗 근데 생각해 보면 영화 잘 찍는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다 그런 건데. 물건 하나 어디에 둘지, 배우 눈썹 각도 하나 어떻게 바꿀지, 이런 거 결정하는 게 감독 카리스마 아니에요? 막 그런 유튜브 영상도 많잖아요. 웨스 앤더슨의 색감 집착! 스탠리 큐브릭의 좌우대칭 강박! 박찬욱의 아름다움을 향한 끝나지 않는 여정!
〖마지〗 그런 것도 일종의 과잉이자, 고고한 시네아스트적 시선이 된 건 아닐까? <부고니아>⑦ 마지막 시퀀스 같은 거, 그런 거 보면 진짜 세밀하게 공정되어 있어서 너무 아름다운데. 그게 사실 인류세에서 취할 만한 태도는 아니잖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아직 할 수 있는 게 남아있다고 자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제리〗 그렇다고 해서 AI 돌려서 만든 저예산 고효율 블록버스터에 정이 가지는 않지?
〖마지〗 안 가지. 그것도 결국 데이터센터 과열을 초래하는 건데.
〖칼〗 아~ 진짜 모르겠다.
〖마지〗 고다르 <이미지 북>⑧ 봤어?
〖칼〗 오빠가 볼 필요 없다면서요.
〖마지〗 응 안 봐도 돼. 근데 너 지난달에 <누벨바그>⑨ 봤댔지?
〖칼〗 네.
〖마지〗 그 영화에 고다르가 영화를 찍는 방식이 자세히 나오잖아. 아침에 갈겨쓴 메모를 대본으로 쓰는 거. 로셀리니의 지침이라면서. 영화는 절대 현실을 완벽하게 찍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들어가는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 너무 고집스럽긴 하지만. 그게 진짜 시네마 정신이지, 돈 처발라서 예쁜 파국을 만들어내는 게 영화가 아니라고.
〖제리〗 과거 재난 영화랑 비교하면 진짜 괴리감이 크다. 봉준호의 <괴물>⑩만 해도 이렇지 않았잖아.
〖칼〗 아아 2005년, 금발 송강호가 맥반석 오징어 굽다가 쇠 파이프 들고 뛰쳐나가던 시절이었죠.
〖제리〗 넌 그때 미취학 아동이었니?
〖칼〗 네.
〖마지〗 봉준호 감독은 재난을 여러 형태로 변주해서 찍는 감독이지. 근데 네 말대로 초기작과 지금의 양상은 확실히 달라졌어. <괴물>의 재난은 한강이라는 아주 특정적인 장소, 서울이라는 도시 하나 크기의 재난이야. 그리고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고 미국이 어쩌고, 거대한 체제가 싸놓은 똥을 한강에서 매점 운영하는 평범한 서민 가족이 해결하지.
〖칼〗 배두나가 화염병 던지고요.
그 시절의 재난은 실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괴물이나 곤충 떼 같은 모습으로 말이죠. 그러면 서민들은 그 오브제를 향해 쇠 파이프를 들고 처절한 진흙탕 싸움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사실 방공호 시네마 이전의 모든 시대가 그랬습니다. 환경 문제 이전에는 냉전이, 그 이전에는 전쟁이 악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혼쭐이 났습니다.
그러나 인류세 가시화 이후의 재난영화들은 문제를 형상화해서 크리처나 공포의 대상으로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의 종말, 인류의 멸종, 재난의 도래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전제’로 묵직하게 깔려 있을 뿐 굳이 설명조차 되지 않거든요.
빌런을 무찌르면 세상에 평화가 와야 합니다. 그게 영화 역사 200년 동안 우리가 공유해온 플롯의 전형이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빌런을 무찔러도 세상에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종말은 무조건 도래합니다. 이 흐름을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다는 걸 스크린 안팎의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빌런을 무찌르는 영웅 서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서 수많은 영화들이 그저 기득권을 비웃거나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블랙코미디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을 응징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없으니까요.
어쩌면 지금의 재난 영화가 어떤 묵직한 감흥이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그저 스펙터클 체험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넷플릭스나 감독들 때문만은 아닐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이 지구를 진짜 막 쓰긴 했으니 우리 모두의 탓인 것 같습니다…
〖마지〗 근데 <설국열차>⑪를 거쳐서 문제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더니, <옥자>⑫부터는 문제가 추상화된 거야. 계급, 시대, 동물권, 시스템까지. 봉준호가 넷플릭스라는 할리우드보다 더 거대한 글로벌 자본 시스템을 제일 선제적으로 받아들인 감독이잖아?
〖제리〗 그러면서 본인도 모르게 그 글로벌 방공호의 시선에 동기화됐다는 얘기야?
〖마지〗 동기화되었다기보다는, 봉준호 감독조차 인류세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는 외부를 상상하기 어려워진 게 아닐까? 더 이상 화염병을 던질 대상이 보이지 않으니까. 생각해 보면, 코로나 이전에는 이런 거대 재난을 초래한 세력이 바로 권력을 가진 집단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지금은 화살 돌릴 곳이 없는 거야. 바이러스든 환경 파괴든, 이유는 있겠지만 이제는 뾰족하지 않고, 책임 소재 역시 모두에게 있는 거잖아.
〖칼〗 그럼 빌런의 양상이 바뀐 거네요. 예전에는 재난을 초래해서 빌런이었는데, 이제는 재난에서 지들끼리 살아남으려고 쿵짝쿵짝 해서 빌런인 거네.
〖제리〗 그 말도 완전 맞네.
〖마지〗 <미키 17>⑬ 봐봐. 애초에 재난영화 세팅이 아니야. 시스템 자체가 인간 실험체를 만들고 우주 생존을 연구한다는 세계관이지. 그러니까, 이 시대의 재난영화에서 가장 특이한 포인트는 재난 그 자체가 재난이 아니라, 재난이 이미 벌어진 세계에서 벌어지는 시스템의 공포가 재난이라는 사실이야.
〖칼〗 그럼 오빠 말에 의하면 세 단계가 있네요.
〖마지〗 그래?
〖제리〗 이거 그냥 그래픽 작업해서 좌담 중간에다 넣어버려.
〖칼〗 그럼 너무 참고서 같지 않을까?
〖제리〗 괜찮아. 우리에게는 이 밤티나는 경향성을 천명할 의무가 있어.
〖칼〗 알겠어요.
그러나 편집부는 논의 끝에 도식화는 너무 쓸데없이 진지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칼〗 과도기의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 안 한 것 같네요.
〖제리〗 과도기 재난영화 중에 명작이 많은 것 같아. <매드맥스>⑭, <언더 더 실버 레이크>⑮, <인터스텔라>⑯...
〖마지〗 1등을 꼽자면?
〖제리〗 나는 <테이크 셸터>⑰가 좋아.
〖칼〗 오우 마이클 섀넌~ 섹시~
〖마지〗 너는 진짜 한결같다. 소나무다, 소나무.
〖제리〗 맞네. 김래원, NCT 쟈니, 존박, 엄태구.
〖칼〗 앤드 마이클 섀넌. 근데 그것도 결국 벙커 짓는 영화 아니에요? 뒷마당에 땅 파면서 시작하는데?
〖제리〗 하지만 방향이 완전히 반대지. 방공호 시네마의 엘리트들은 이미 정보를 독점하고 안전한 위치에서 시작하잖아. 근데 <테이크 셸터>의 주인공은 평범한 블루칼라고, 자기가 매일 밤 꾸는 그 거대한 폭풍의 환영이 진짜 다가오는 재난인지, 아니면 조현병으로 자기가 미쳐가는 건지 끝까지 몰라.
〖마지〗 그렇지. 그 대답을 바랐어.
〖칼〗 모른다는 게 핵심이군요. 자기가 미친 걸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만일을 대비해서 벙커를 짓잖아요. 가족 지키려고. 대출까지 끌어다가.
〖제리〗 그치. 방공호 안에서 남들 죽는 거 모니터로 보면서 와인 마시는 엘리트들과는 영혼부터가 달라. 벙커를 짓는 행위 자체가 기득권의 여유로운 비상 대책이랑은 다르지.
〖칼〗 … 영혼이요?
〖제리〗 다르지. 한 소시민이 이,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불안을, 어쩌면 자기 내면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는 붕괴를 어떻게든 감당해 보고자 몸부림을 쳐. 칼 말대로 가족을 지키려고. 재난을 안전하게 관조하는 게 아니라, 인류세의 불안 그 자체가 일상의 공기로 스며들어서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과정을 낭만화 하나 없이 보여주는 영화라서 방공호 시네마와는 격이 다르다고 생각해.
〖마지〗 (안경을 고쳐 쓰며) 난 그게 시네마의 본질에 다가가는 태도라고 생각해.
〖칼〗 난 시네마가 뭔지 모르겠어요.
〖제리〗 쟤도 모를 거야.
〖칼〗 여튼 우울하네요. 결국 기득권들은 하와이에 방공호 지어서 멸망을 지켜볼 거고, 우리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빚내서 앞마당에 땅이나 파야 된다는 거잖아요. 아... 스테이블 코인 살걸.
<테이크 셸터>(2011) 속 커티스의 처절한 방공호.
〖제리〗 그리고 요즘 텐트폴들 보면서 느끼는 건데, 뭐랄까, 딱 한두 시퀀스에만 마지막 남아 있는 시네아스트적 정신과 기술을 총동원해서 공들이는 느낌 들지 않아? 숏폼으로 바이럴 돌리려고 그러나 싶어.
〖칼〗 그게 의도한 거라면 진짜 비겁하네요. 저 같은 사람은 영화가 아무리 구리고 지루해도 딱 한 장면, 아니 딱 한 씬만 마음을 치고 가도 그 영화를 사랑하게 되어버린단 말이에요.
〖마지〗 나도 그래. 알고서 그랬다? 그럼 난 정말 슬플 거야.
〖칼〗 알고 그랬다 해도 그 시퀀스가 진짜 지린다면 결국 그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는 점도 유쾌하지 않아요.
〖마지〗 지린다가 뭐냐, 지린다가. 문화교양잡지에 실릴 좌담인데.
〖칼〗 아아! 코인 살 걸!
〖마지〗 코인은 무슨. 코스피가 6000을 찍었는데. 노가리나 하나 더 시켜라.
〖제리〗 <슬픔의 삼각형>⑱ 얘기도 했어야 하는데.
〖마지〗 안 돼 안 돼. 이제 파장이야. 다음 호에 하든가.
어디 가, 해리스 청년...
〖칼〗 <슬픔의 삼각형> 마지막 장면에서 해리스 디킨슨이 막 뛰잖아요. 다들 어디로 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리〗 여친 구하러 가는 거 아니야?
〖마지〗 엥? 애비게일 구하러 가는 거 아니야?
〖칼〗 제발 배우 이름으로 통일하든가 배역 이름으로 통일하든가 해줘요. 진짜 괴로워.
〖마지〗 너 애비게일 배우 이름 모르잖아.
〖칼〗 (대꾸하지 않으며) 저는 해리스 디킨슨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리〗 오?
〖칼〗 두 여자가 동시에 부재한 순간만을 기다려오다가요. ‘야야’의 문명에서도 ‘애비게일’의 원시에서도 자기는 결국 얼굴 뺀질한 트로피에 불과하니까. 야야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타도 섬에 남아도 해리스 디킨슨한테는 자유가 없으니까요.
〖제리〗 근데 해리스 디킨슨이 잘생기긴 했어.
〖마지〗 너는 왜 배역 명이랑 배우 명이랑 섞어 쓰냐?
〖제리〗 걔는 배역 명으로 기억하긴 너무 잘생겼어.
〖마지〗 그만, 그만, 진짜 파해. 집에 가자. 계산하자.
〖칼〗 아니 방금 노가리 하나 더 시키라면서요!
당장 내일 대홍수가 덮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국열차의 꼬리 칸에 몸을 싣게 될지도 모릅니다. 꼬리 칸에는 애초에 시트백 포켓 따위 달려 있지도 않겠지만, 뭐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떻게든 찢어진 시트 틈바구니에라도 『월간차지』 신간을 쑤셔 넣어둘 작정입니다. 피난 가는 와중에도 여러분이 이 시시껄렁한 잡지를 꺼내 읽으며 아주 잠시나마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이요. 어때요… 든든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