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3호 > 끝말잇기 >
이민의 공상과 현실
👤신포도
[2026. 03. 22.]
현생에 지칠 때마다 짜보는 몇 가지 이민 시나리오. 현실성은 없다. 이민을 준비한다는 것, 이민을 간다는 것, 이민을 가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 전부 현실성이 없다.
어쩔 수 없다. 여행의 가장 큰 맹점은 어딜 가든 나와 함께라는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삶의 초입을 상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므로… 상상에 머문 나의 이민 계획을 몇 개 적어본다.
※주의: 이 글에 쓰인 계획에는 힘들고 거추장스러운 단계들이 의도적으로 생략돼 있다. 즉, 언어를 배우거나 이민 비자를 준비하고, 이민을 위한 돈을 모으거나, 이민 이후의 살길을 모색한다는 현실적 책임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있다는 의미다.
왜냐? 이 계획은 현생에서 실제로, 그런 거추장스러운 일들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 힘들 때 만드는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즉, (그럴 사람은 없겠지만) 이 공상을 보고 실제 이민 준비에 착수한다면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게 될 것이다.
※읽는 법: 주의 사항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양심에 찔리는 지나친 공상의 경우에는 별 표시✷를 달 것이다. 아무리 훌쩍 떠난다 해도 무시할 수 없는 나의 성질, 그로 인한 제약 사항을 달아두려 한다.
1. 포르투갈 리스본 카페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며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싫을 때 자주 그려보는 시나리오다.
리스본의 웨이트리스가 된 나는 매일 아침, 어떤 따듯하고 작은 방에서 눈을 뜬다. 한국에서는 한 적도 없었던 이불 정리를 마치고, 키우는 고양이에게 포르투갈 마트에서 파는 사료를 준다. 아담한 욕조에 들어가 아침 샤워를 마친다. 젖은 머리에 트리트먼트를 뿌리고, 대충 털어 말린다.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는 그 요일에 맞는 옷✷을 입는다. 리스본의 봄과 여름은 우리나라보다 시원하고, 가을과 겨울은 우리나라보다 따뜻하다고 하니, 매일의 기온에 예민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크림과 립밤을 바르고, 도보 8분 거리의 카페로 출근한다.
카페는 오전 9시에 오픈한다. 8시 30분쯤, 까치발을 서서 잠긴 카페의 문을 연다. 유럽의 풍경에 항상 끼어 있는 원목 칠판 입간판을 자연스러운 모양의 돌로 포장된 길목에 세워둔다. 여유롭게 빨간색, 노란색 테이블을 닦는다. 커피 머신 위 먼지를 젖은 손수건으로 닦아낸다. 터래기가 이곳저곳으로 뻗어난, 마치 수십 년은 쓴 것 같은 대걸레로 유럽풍 패턴의 바닥 타일을 닦는다.
오픈 5분 전에는 내가 마실 아침 커피를 내린다. 음~ 적당한 산미. 얼음 한 알을 넣어 내게 맞게 조정된 적당히 미지근한 커피. 손님이 없을 때 읽을 책을 한 권 꺼낸다. 물론 한국어 책이다. 손님은 너무 많지 않다. 가게에 들른 손님들은 성미가 급하지 않다. 전혀 커피가 필요해 보이지도, 카페인이 급해 보이지도 않는다.
적당한 온도의 스몰토크✷✷를 나누고 아주 간단한 커피를 만들어 빨갛고 노란 테이블 위에 올려둔다. “오브리가도~” 고맙다는 말을 서로에게 빚진 것처럼 나누어 준다. 오후 3시쯤 가게 문을 닫고 퇴근한다.
그 뒤는 별로 상상해 본 적 없다. 마트에 가고, 저녁거리를 사고, 저녁을 만드는 것. OTT 메인화면 위에서 하릴없이 서핑하고, 알람을 맞추고, 선크림을 지우기 위해 클렌징폼을 짜는 것. 그런 건 너무 지질한 생활권역이니까… 상상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매주 같은 옷을 돌려 입는다는 상상. 이 쉽고 단순한 계획은 나의 오랜 꿈인데 한 번도 실현해 본 적 없다. 성미가 급하고, 나를 둘러싸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쉽게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 처음 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스몰토크를 나누는 것. 한국에서 한 번도 실행해 본 적 없다. 그리고 정확히 그 이유로 이민을 꿈꾼다. 이민자가 되고 나면 스몰토크에 능숙해질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이다.
2. 오키나와의 작은 도서관에서 일하는 초보 사서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겨울 날씨에 지쳤을 때 자주 그려보는 시나리오다. 혹은 돈을 평생 벌어야 한다는 것. 돈을 벌다 보면 누군가를 싫어하게 되는 과정을 꼭 거치게 되는데, 그 통과의례가 지칠 때도 이 공상을 꺼내 들곤 한다.
겨울에도 여름 날씨, 여름에도 여름 날씨인 오키나와…. 그곳이라면 습하고 짠 바다의 기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매일 아침의 나는 바람이 마구 드나드는 얇고 큰 유리창이 있는 집에서 눈을 뜬다. 작은 여성 몸에 맞춰진 1인용 침대에서, 체크무늬의 이불을 걷어내며 잠에서 깬다. 음… 왜인지 기숙사를 떠올리게 하는 싱글 침대에서는 아침마다 이불 정리를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 이불은 일어난 모양 그대로 보존해 둔다.
키우는 고양이에게 오키나와 마트에서 파는 사료를 준다. 왱알대는 고양이를 뒤로하고는 좁디좁은 일본식 샤워부스에서 향긋한 샤워를 즐긴다. 과하지 않은 꽃향기가 나는 바디워시로 몸을 씻는다. 오키나와의 햇빛은 강하기에 약간은 무거운 선크림✷을 바른다. 간단한 도시락을 싸서 천으로 감싸 가방에 넣는다.
오트밀 색의 이륜구동 오토바이를 타고✷✷ 오키나와의 해안도로를 달려 출근한다. 도서관 앞에 오토바이를 주차해 두고 해맑게 “곤니치와~”를 외치며 프런트에 자리를 잡는다. 책을 정리하고✷✷✷, 신간에 청구기호 스티커를 붙이고, 가끔 프런트에 찾아오는 노인들의 책을 대출하고 반납해 준다.
사실 이 도서관에는 나와 비밀 연애를 즐기는, 해리스 디킨슨을 닮은 청년도 함께 일한다. 점심에는 각자가 싸 온 도시락을 들고 바람이 세게 불지 않는✷✷✷✷ 바닷가 앞 벤치에 앉아 농담 따먹기를 하며 점심을 먹는다. 짧은 점심 이후 도서관 뒤편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내린다.
오후 5시쯤 퇴근하고,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해안도로를 달려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뒤는 리스본의 경우와 같은 이유로, 상상하지 않는다. 상상의 남자친구와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듯하다…
✷ 한국에서는 선크림 바르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근데 왜 이민 상상만 하면 선크림과 립밤을 바르고 싶어지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 운전 면허 없다.
✷✷✷ 미주 신경성 실신이 있어 앉았다 일어나면 세상이 핑핑 돈다. 실제로 도서관 사서 알바를 할 때 매일 같이 겪었던 일이다. 그러나 이민을 가면 왜인지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그냥 그렇다고 치자.
✷✷✷✷ 일본의 해안가에는 바람이 겁나게 많이 분다. 그리고 그곳에서 도시락을 꺼낸다? 온갖 새들을 위한 뷔페를 깔아주는 셈이다. 나는 실제로 일본 소도시의 바다 근처에서 여유롭게 두부튀김을 먹으려고 시도한 바 있다. 두부를 바깥으로 꺼냈다가 거대한 갈매기에게 튀김을 빼앗겼다. 내 생애 가장 빠르게 사라진 5천 원이었다. 갈매기의 두부 강탈은 간장 종지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던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 해안가에서 도시락을 먹는 커플? 10초 만에 점심밥을 잃어버리고 오열할 가능성이 크다.
3. 그동안 모은 재산을 그저 쓰는 그리스 바다 앞 펜션 붙박이 손님
해삼 멍게 말미잘이 가득한 그리스의 푸른 바다. 관광객에게 알려지지 않은 작은 바다. 그로부터 도보 3분 거리에는 소박한 마당을 갖고 있는 객실 네 개 규모의 작은 펜션이 있다.
나는 201호에 머문다. 한국에서 데려온 고양이는 다행히 시차 적응을 마쳤다. 골골대며 그리스 마트에서 사 온 습식 사료를 먹는다.
어젯밤 옆 방의 여행자와 데킬라를 한 병 비우며 수다를 떨었다. 숙취가 엄청나다… 마트에서 사 온 신라면을 끓여 허겁지겁 먹는다. 해장 맥주 한 병을 챙겨 바다 앞에 자리를 잡는다. 잔잔한 파도가 치는 것을 보며 맥주를 비우고, 선크림 대신 태닝 오일을 대충 발라 바닷가에서 낮잠을 잔다. 모래 알갱이 입자의 크기가 적당한 덕분에 태닝 오일과 모래가 반죽되어 버터떡을 만드는 식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대충 숙취가 가라앉으면 바다에 몸을 적시고 축축한 몸으로 펜션에 돌아간다. 시트러스 향 샴푸로 버적한 머리를 씻어내고 좋아하는 식당에 들른다. 음… 식당에서는 온갖 타코를 판다.✷ 흰살 생선이 들어간 피시 타코를 시키고 빈백이 늘어선 야외에 자리를 잡는다. 나무 아래 그늘에서는 딥슬립에 빠진 들개가 누워있다.
비싼 이북 리더기를 꺼내 책을 읽는다. 주인은 내가 이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타코의 향신료 냄새가 은은히 배어든 손가락으로 리더기를 터치한다. 기름기가 묻은 리더기를 슥슥 나시티에 닦아낸다. 책이 질릴 때쯤 방으로 돌아간다.
고양이와 늘어지는 낮잠을 잔다. 테라스를 통과한 햇빛이 퀼트 무늬의 얇은 이불 위로 비친다. 잠에서 깨니 기분좋은 땀이 나 있다. 밖에 나가서 땀을 말린다. 옆 방 여행자와 다시 수다를 떤다…
지루하군…
✷ 뜬금없이 그리스 식당에서 타코를 파는 이유는 그리스 음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튼 이런 공상들을 하다 보면 내가 현생에서 도피해 즐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1. 강제적인 루틴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민 공상 속에서도 계속 일하려고 한다.
2. 타지에서 마주친 무리와 자연스럽게 섞이는 ‘상상 속의 나’를 좋아한다.
3. 외국의 마트에 자연스럽게 들려 필요한 것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 가면 꼭 마트에 간다)
4. 샤워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5. 햇빛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6. 걷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이 요소들만 놓고 생각해 보자면… 나는 지금도 이민자가 된 것처럼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내가 이민 공상에서 위로를 받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원한다면 지금도 외국의 마트에 들를 수 있고, 샤워할 수 있고, 햇빛을 받으며 걸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상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다. 공상에서만큼은, 모든 현실성을 배제할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필요도, 더듬더듬 모국어와 외국어를 매칭할 필요도, 선크림을 씻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통장 잔고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나 이는 공상을 현실로 옮기는 순간 즉각 사라진다.
허무한 공상에서 한 발짝만 나와도 상상할 수 있다. 사실 리스본에도 진상 손님이 존재한다는 것. 일본어로 된 도서의 청구기호를 정리할 때, 내 작은 뇌가 겪을 괴로움. 무엇보다 일본에서 해리스 디킨슨을 닮은 이를 만나고, 꼬시는 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그리스 바다 앞에서 해장술을 즐기는 것, 상상만 해도 지루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공상을 이어 나가다 보면, 일단은 한국에서 잘 살아 보도록 하자,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