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6
신포도그래. 네 말처럼, 내가 찾아다닌 것도 결국은 시티였을까? 세르주 다네는 "집에서 문화라는 개념을 창조해야만 했"대. 나는 평생을 집 바깥으로 뛰쳐나가려고 애썼거든. 집 안을 걸어야 했을 때도, 집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쳐야 했을 때도, 집보다 작은 서산시를 벗어나야 한다는 결심에서도 말이야. 나는 왜 다네처럼 집의 교육자 역할에서 제3의 의미를 찾지 못한 걸까?
절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구조를 반복하는 도시. 이름과 옷을 고쳐 입으며 새로운 모습인 양 꼿꼿이 선 통과의례들. 왜 나는 그들의 품으로 도피해야만 진짜 취향과 문화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걸까? 서산시를 떠나 지은이들의 도시에 오면서, 나는 나만의 방과 집을 갖게 됐지만 한편으로는 집 안에서의 산책과 방랑이라는 경험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외주를 맡겼지. 이외수에게, 그 수많은 '파임'의 이름들에게,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한 채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보였던 과거의 동료들에게, 믿고 따르고 싶었던 선생들과, 나의 관심사와 경험을 모두와 공유할 수 있을 것이란 환상들에게.
내가 지나친 몇 가지 분기점 뒤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유년기의 편린 속 기이한 놀이를 즐기던 순간들, 카툰네트워크와 '섹스 앤 더 시티'를 목도한 브라운관의 순간, 입시라는 정상적 통과의례를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 견뎠던 지난한 순간, 그 문을 통과한 다음 열린 별세계. 진짜 지은이들의 공간.
그래 맞아, 석림동 아파트와 서산 터미널의 문을 열고 나가니 그때는 순간이 아닌 공간만 있더라고. 별세계는 '따로 떨어진 세상'이라는 뜻이래. 한자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 별세계는 아직도 별들의 세계 같아. 도시이자 구조인 서울에는 순간보단 공간이 가득해. 눈 깜짝할 사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빈 공간들. 나는 그동안 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토록 달렸거든? 그 순간들이 너무 지겹고, 괴롭고, 힘들어도. 문을 통과했을 때의 기쁨을 느끼고 싶었어. 나는 내가 통과할 문이 그래도 몇 개는 더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서산 터미널의 문이 마지막이었더라고. 그 뒤에는 문인 줄 알고 두드리니 풀썩 무너지고. 문인 줄 알고 열고 들어갔더니 빈 초원밖에 없더라고. 뒤를 돌아보면 내가 연 문이 활짝 열려있고.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어. 지식iN의 누군가가 '영화철학과를 만든다'는 문에는 이미 못질을 해버렸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에코만 왕왕… 에코가 에코를 만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을 어떻게든 해석해 보려 애쓰고.
애썼다? 글쎄. 내 대학 생활은 그리 애쓴 것과 가깝지는 않아. 그저 술을 마셨지. 술을 마시고. 또 마셨어. 알잖아, 우리 술 마시다가 친해진 거. 수업이 끝나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뒤엔 수업에 나갔지. 그때 수업 듣기와 술 마시기에 뇌를 다 써버린 탓에, 수업에서 뭘 보고 뭘 읽었는지도 잘 안 떠올라. 남은 건 몇 가지의 파편들?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이상한 단어들. 봤으나 기억나지 않는 영화의 제목과 감독의 이름. 읽었나, 읽지 않았나 아직도 헷갈리는 책의 제목들.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상한 선배들의 대학 생활. 너도 알겠지만, 그때 썼던 글들은 내가 쓴 글인지도 모를 정도잖아. 어떻게 이런 글을 썼지? 싶잖아.
어쩌면 그 낯섦의 감각은 네가 말한 '저능한 취향에 대한 두려움'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나는 사실 대니 보일, 자비에 돌란, 짐 캐리가 좋았는데. 대니 보일의 〈트랜스〉(Trance)와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토드 헤인즈의 〈벨벳 골드마인〉(Velvet Goldmine)을 좋아하던 UK 2등 시민이었는데. 갑자기 마니 파버, 다니엘 위예를 보고 읽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영화와 글들에 진정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좀… 구리다고 생각했어. 그 없어도 무방한 열등감이 사실은 문도 아닌 걸 문으로 만들어버린 거야. 나는 아직 부족하구나. 내가 아직 찾지 못한 문이 어딘가엔 있겠구나…하면서.
스무 살이 되고 나서 했던 첫 발제는 질베르토 페레즈의 『The Material Ghost』①였어. 당시엔 국역도 되지 않았었기에 영어들을 드문드문 읽어 나갔지. 서산의 롯데리아를 닮은 그곳에서 신메뉴로 출시된 모짜렐라 치즈버거를 먹으며 괴로워했던 기억만은 선명해. 내 괴로움의 원인은 영어가 아니었어. 그냥 그 안의 모든 것이 그야말로 별세계였지. 자신만의 전문 용어로 울타리를 치며 학계를 이끄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코드와 컨벤션. 오래된 이론에 관한 문제 제기. 부재하는 세계라는 모순된 단어의 연결. 나는 몽타주를 배우기 전부터도 몽타주 된 것들을 읽었어. 실제로 몽타주를 배울 때는 조금 시시하다고 느꼈지. 그래서 건너뛰었던 것 같아. 술이나 마시면서. 사실은 몽타주에 대해서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멋지다고 착각했지. 더닝 크루거 효과를 내 몸에 덧씌우면서 그렇게 나만의 문화와 취향을 만들어 나간 거야. 다네가 보면 기겁하겠지? "이 게으른 교육자!"
근데 정말 취향에 문이나 통과의례 같은 게 있었을까? 유운성 평론가의 말마따나, 영화학·영화이론이라는 것에 제대로 된 학습 프로세스가 있을 리 없잖아. 수1을 끝내고 수2로, 주어·동사·목적어를 배우고 1형식부터 5형식을 배우는 커리큘럼이 취향에는 주어져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습관처럼 문을 찾아다니니까 계속 유령같이 투명한 가짜 문들을 만든 거지. 스트라우브와 위예의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밉고. 낯설 만큼 구린 화질로 구현된 〈게임의 규칙〉②을 당연한 것처럼 보면서 이해하려 애쓰고. 그렇게 문들을 하나씩 통과하면 나도 언젠가는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를 진심으로 즐기고, 조너선 로젠봄Jonathan Rosenbaum③과 대화하고,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눈시울 붉히며 보고, 이해조차 어려운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를 보며 멋쟁이처럼 떨을 피울 것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스트라우브와 너무 멀고, 먼 곳에 살잖아. 석림동에서 뉴욕까지 날아가려면 너무 긴 시간이 걸리잖아. 오즈 야스지로의 시대로 가려면, 나는 아인슈타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야 하잖아. 그걸 인정하기에 나는 어렸던 것 같아. 그래서 가끔은 내가 너무 이른 나이에 대학에 갔다는 생각도 가끔 해. 문이 없는 별세계도 존재한다는 걸 안 뒤에 갔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내가 진심으로 수업을 듣고, 스트라우브의 영화를 즐기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을까? 그를 즐기는 척하는 추한 허영심들과는 조금 거리를 둘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내가 놓친 진실된 감동은 얼마나 많을까. 셀 수도 없겠지. 셀 수도 없다는 감각은 일종의 열등감일까? 아니면 포도송이 앞에 선 여우의 마음과 비슷한 걸까?
잔뜩 굶주린 여우 한 마리가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간 덩굴에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올라도 손이 닿지를 않았다. 그러자 여우는 포기하고 돌아가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직 덜 익었군."
– 이솝 우화 중 「여우와 포도송이」 지금은 알아. 사실 별세계에 문이라는 건 없다는 걸. 좋은 것을 읽고, 보고, 때로는 불평하는 게 전부라는 걸. 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그 많은 취향들을 귀동냥했나봐.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아. 그저 하루하루, 한 편 한 편,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삼키면서 제리가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을 만들고 허무는 게 전부지.
어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수집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영화사 책에 나오는 리스트를 섭렵한다면, 나는 영화를 정말 취향이자 문화로서 대하고 있는 걸까? 이미 대다수가 고등 교육의 수혜자인 지금, 우리는 문화와 취향에도 단계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다네는 집에서 문화를 창조해야 했대. 자신이 교육자 역할을 해야 했대. 그래서 스트라우브의 영화를 높게 평가하더라고. 그 영화들은 모두 "교육학적"이라고. 사실 나는 영화가 교육의 탈을 쓴 나쁜 짓이어서 좋아했는데. 그래서 영화 보기를 사랑했던 건데.
어쩌면 나는 영화에서 그 어떤 것도 배우고 싶지 않았나? 사실은 나 역시 도피하고 있었나? 순간이라는 중력에서. 통과한 문을 닫은 이후 찾아오는 허망함에서. 사실은 내게도 영화가 방랑이었나 봐. 그래서 내가 그토록 수업을 대충 듣고. 술이나 퍼마시러 다녔나 봐.
외주 맡긴 방랑을 다시 찾아와야겠더라고. 더 이상 영화에 문을 만들면서, 영화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어. 만들지도 못할 영화철학과에 시간을 태우고 싶지 않았어. 나는 영화로서 나 자신을 교육하기를 끝냈어. 기어코 끝냈지. 끝낼 수밖에 없었고, 끝내고 싶었고, 지금에서야 생각하지만 끝내길 잘했어.
영화를 향한 기이한 매달림에서 벗어나고 나서 참 많은 걸 얻었지. 데이빗 보위와 기리보이④ 바깥의 새로운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프레스를 구독하며 온갖 세상사들을 읽었어. 언어의 망각에 관한 책이나, 원시인과 인류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기 드보르가 쓴 스펙터클에 대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강박적인 음주 습관에 관한 회고⑤를 읽었어. 수전 손택이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일기를 많이 썼다는 걸 알게 됐어. 베스트고어의 대문 기억을 되살리며 피 터지고 살 자르는 영화들을 다시 생각했어⑥. 시 수업을 들었어. 몇 년 만에 다시 독서대를 샀어. 기타를 배웠어. 개러지밴드로 듣기 싫은 음악들을 만들었어. 과거를 용서했어.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는 법을 배웠어. 혼자 일본에 가고, 유럽에 갔지. 『아슈타바크라 기타』⑦를 들었어.
기리보이는 아직도 좋아. 데이빗 보위는 내 팔 한편에 숨 쉬지. 그즈음 되니, 질베르토 페레즈의 『영화, 물질적 유령』을 한국어로, 쾌적하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더라고. 사실 『영화, 물질적 유령』은 문도 아니었던 거지. 그냥… 무수한 책과 이야기와 활자 중 하나였던 거야. 근데 그때는,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그렇게도 밉고 싫었을까?
이 교환일기를 닫으며, 어제의 부고가 떠올라. 브리짓 바르도가 죽었대.
왜 갑자기 브리짓 바르도냐고? 내가 내 돈으로 처음 산 영화 DVD가 장 뤽 고다르 초기작 모음집이었거든. CD는 4개, 영화는 3편이었어. 〈네 멋대로 해라〉(À bout de souffle), 〈미치광이 피에로〉(Pierrot Le Fou)와 〈경멸〉(Le mépris). 그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미치광이 피에로〉야. 그다음은 〈네 멋대로 해라〉. 그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 중 가장 좋아하는 배우는 진 세버그야. 그다음은 안나 카리나. 그러니까 〈경멸〉과 브리짓 바르도는 내 첫 통과의 경험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았어. 꼴찌였다고. 브리짓 바르도가 인종차별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그냥 그 배우는 나의 취향 밖이었던 거지.
진 세버그는 나의 출생 한참 전에, 안나 카리나는 내가 영화 속 문을 통과하고 있던 때 죽었던 것 같아. 브리짓 바르도는 내가 온갖 이상한 것들을 읽고 듣는 지금 죽었네. 진 세버그의 죽음은 경험한 적도 없고. 안나 카리나의 죽음은 왜인지 와닿지 않았는데, 브리짓 바르도의 죽음은 이상하더라고. 어제는 부고 기사를 막 읽었어. 시몬 드 보부아르는 브리짓 바르도에 관해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대. "그녀가 성숙해지기를 바라지만, 변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바르도가 90세를 맞아 진행한 전화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더라고. "제게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요.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걸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NYT는 이렇게 평가하네. "보부아르가 바랐던 대로,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나 왜… 브리짓 바르도가 죽은 게 이렇게 슬프지? 브리짓 바르도가 죽은 게 너무 슬프다. 몰랐는데, 되게 슬프네. 서산에서 가져온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인 고다르 DVD 셋을 꺼내야겠어. 지금 〈경멸〉을 보면 어떨까? 그럼 나는 진 세버그보다 브리짓 바르도를 더 좋아하게 되려나? 어찌 됐든, 이 슬픔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내 안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이렇게 많은데. 이상한 리스트에만 목매고 있을 수는 없어. 그렇지?
콜비 애커프의 If I Were the Devil을 들으며, 포도가.
① 영화학자 질베르토 페레즈의 책. 국내에는 2024년 『영화, 물질적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② 장 르누아르 감독의 1939년 영화. 왓챠플레이에서 감상 가능하다. ③ 미국의 영화 평론가. 인스타그램 @jrosenbaum2002 ④ 기리보이는 가사를 정말 잘 쓴다. ⑤ 기 드보르는 회고록 『파네지릭』에 이렇게 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벼운 취기가 좋았지만, 머지않아 지독한 취기 이상의 상태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 너머에서는 끔찍하게도 황홀한 평화와 흐르는 시간의 진정한 맛을 맛볼 수 있었다. (...) 이렇게 술을 마셔대느라 정작 글을 쓸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그게 딱 적당했다. 글쓰기란 흔치 않은 행위로 남아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글을 발견해내기까지는 오랫동안 술을 마셔야 하기 때문이다.” ⑥ 신포도는 올해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지속고어 프로젝트'라는 글을 뉴스레터로 연재했다. 현재는 블로그에서 열람할 수 있다. ⑦ 『아슈타바크라 기타』는 힌두교 전통의 철학 경전으로, 현자 아슈타바크라와 미틸라의 왕 자나카가 나눈 대화를 기록한 텍스트다. 인간의 참된 자아와 해탈에 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세계와 자아를 둘로 나누는 생각이 환상임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