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5

유유민


답장이 단단히 늦어버렸구만. 회사 일이 너무 바빴어. 용서해 줘. 

        이 교환일기, 오랜 시간 동안 놓지 못했던 자격지심을 강에 떠내려 보내는 기분으로 쓰고 있어. 이 강가에 오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난생처음 말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고, 그 알량하고 비밀스러운 과거들을 터놓으면서 아… 만 서른넷의 유민은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 아니, 될 수밖에 없었는가? 같은 것들을 이해하는 중인 것 같아.

       지난달까지만 해도, '지은이들'이 버스로 20분 남짓 이동하면 쉽게 볼 수 있었던 아트하우스 영화들을 보기 위해 순례길을 걷듯이 서울에 가곤 했던 2012년의 날들을 복기하게 될 줄은 몰랐지. 어쩌면 그 경로 사이사이에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 공연, 숙박, 정치적 집회 같은 수많은 맥락이 덧붙여지면서 나는 점점 성인의 꼴을 갖춰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를테면 심영섭의 〈아무르〉 (Amour) 시네마톡 하나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왔지만, 힘들게 온 김에, 대통령 후보 유세를 한다고 하니 도산대로며 광화문이며 잘 알지 못하는 동네들에도 쏘다녀 보고, 혼자 경험 삼아 집회에 나갔다가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앞줄에서 스크럼을 짜다 최루액도 맞아보고, 눈물을 닦으며 도망쳐 들어간 '미정국수0410'에서 입천장이 데도록 튀김 주먹밥도 씹어 보고, 밤을 새워버린 김에 다음날 스폰지하우스와 씨네큐브에서 영화를 한 편씩 더 보고, '오월의 종'이나 '교보문고'나 'mmmg' 같은 지은이들의 장소에도 가보고… 서울이 어떻게 생겨먹었고 어느 동네와 어느 동네가 붙어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에 가능했던, 청량리에서 목동에서 혜화에서, 강변 찍고 다시 이태원으로 향하던 극도의 비효율적 동선.

       그러고 보면 영화보다, 영화를 보기 위한 무작위적인 이동 자체가 나를 구성한 것일지도 모르겠어. 이동의 과정 속에서 본 것들, 사람들, 시장, 거리, 냄새, 조명, 경찰, 빵, 프라푸치노, 책, 백화점, 양성리에서는 가능할 리 없었던 종류의 파편들이, 어쩌면 내가 그 시절 사랑했다고 착각한 대상들(이건 또 너무 냉정한 분석 같기도 하지만)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거야. 물론 이 역시 사후적인 해석이겠지. 

       또는, 〈페어리〉(La fée)를 보러 가던 날의 기억. 정작 영화의 내용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면서, 영화 속 모텔 주인이 밤새도록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다이나 와싱턴Dinah Washington의 목소리라든지, 영화가 상영되던 동성아트홀의 춥고 건조한 기운이나 영사기의 덜덜거림, 빛 속에 뒤섞여 떠다니던 먼지 같은 것들만을 기억하듯이. 

        네가 처음 세르주 다네의 글을 보여주던 날에 내가 흥분했던 이유도, 영화를 보러 가던 나의 위치, 좌표계 속에서 나에게 부여되었던 방향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었어. 그 관점에서 보면 나는 확실히 영화를 사랑한 게 아니었나 봐. 적어도 일반적인 의미의 사랑은 아니었고, 어쩌면 사랑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에 매혹되었던 거야. 영화를 보러 다닐 수 있는 행정구역, 그 구역으로 향하는 나의 이동성, 이동을 가능하게 만든 아주 구체적인 조건들, 구역을 어지러이 이동하며 감각한 것들…

       그러나 처음 다녔던 대학에서, 영화는 내가 동경하던 조건들과 갑작스럽게 분리되기 시작했어. 서울과 물리적으로 많이 가까워진 덕에 (알다시피 나는 2013년부터 2015년까지 천안에서 대학을 다녔어) 영화는 이전보다 더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갑자기 생긴 코골이 탓에 기숙사 룸메이트가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방에 들어가지 않고 수업이 끝나면 서울로 직행해 심야 영화를 보는 것으로 숙박을 대신했던 날들.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홀리 모터스〉(Holy Motors)를 보며 까무룩 잠들던 기억, 혹은 강남역의 24시 카페들에서, 강변에서 마지막 타임의 영화를 본 뒤 동서울터미널 근처의 찜질방 수면실에서 칠천 원을 내고 잠을 청하던 일… 취객들, 불결한 느낌, 그 즈음하여 읽은 광진구 어귀의 살인사건에 관한 기사 같은 것들. 뭐랄까? 더 이상 향기롭지 않은 것들과 영화가 붙기 시작한 거야. 어쩌면 이 시기에 내가 지금 깨달은 것들―당시의 내가 영화보다는 영화에 결부된 조건이나 영화를 보기 위한 이동 자체에 끌렸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나는 어쩌면 영화 보기를 그만두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나는 내가 영화 자체를 사랑한다는 믿음을 유지했고, 그런 불결함 가운데서도 끝끝내 영화 보기를 지속했어.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변화들 때문에 나는 영화를 좀 더 제대로 알고 싶어졌던 것 같아. 이해하고 싶었고, 끌어안고 싶었고, 영화 주변의 조건들이 아닌 영화에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 그래서 전공 수업을 내팽개치고, 영화과 이론 수업을 일반선택과목으로 수강하기 시작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그 대학에 영화과가 있었던 것과, 이론 전공 교수가 있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조건이었고, 일종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해.


유민 인생 최초로 영화이론을 공부했던 두 권의 책. 

뭘 공부하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들어간 '영화이론입문' 수업에서 나는 처음으로 배움의 기쁨을 느꼈어. 영화를 보는 걸 넘어 영화를 읽는 방법을 접하면서. 쇼트와 몽타주, 미장센과 사운드, 장르와 작가주의, 페미니즘, 스튜디오 시스템, 그런 것들에 대해 배우면서. 영화 주변을 배회하며 느끼던 갈증이 뭔지 희미하게나마 알게 됐어. 나는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영화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어떤 것을 담지하고 있는지, 나아가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설명할 수 없었던 거야. 그냥 애호하는 상태로 주변에 머물 뿐. 그날 강의실에서 나는 비로소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쓰기 위한 일종의 스타터 키트를 얻은 셈이었어. 이후로 그 교수님의 수업을 줄곧 따라다녔지. 그리고 곧 생각하게 됐어. 나는 영화를 질리도록 보면서, 그리고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살고 싶은 것이구나. 분명히 해두자면, 하고 싶은 말과 쓰고 싶은 글이 있었다기보다 말하는 사람,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에 가까웠을 거라고 봐. 영화에 대해 말하고 쓸 수 있게 되면 영화에, '시티'의 근거리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도구상자와 이론들이 필요했고, 그 마음은 절박해지다 못해 급기야 영화이론을 전공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비약하게 되었지. 내가 다녔던 대학의 영화과에는 이론 수업이 있기는 했지만 기본 소양의 함양 정도를 목적으로 하는 수업이었을 뿐 제대로 된 심화 과정은 없었고(개설된 이론 수업 중 대부분을 이미 다 수강했던 것으로 기억함), 연출과 매체 연기에 특화된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약간의 구글링을 통해서 영상원에 이론을 전공하는 학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덜컥 지원서를 접수하긴 했는데, 뭘 해야 할지 잘 몰라서 그냥 수업에서 썼던 교재를 몇 번 복습하고,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 딱 한 권을 읽었어. 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시험 칠 때까지 결국 이해 못 했음. 지금은 과연…?) 이후에 벌어질 일을 그때 알아야 했는데…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을 준비하던 중에, 서울독립영화제 자원봉사단에 지원하게 됐는데… 당시의 나에게는 그건 정말 인생 전부를 다 걸 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준 적도 없고, 보여줄 수도 없다고 생각했거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기소개서와 영화 리뷰(지원한 팀과 상관없이 필수 제출 서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아마도 〈소셜포비아〉 리뷰를 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변요한을 아주 좋아했으니까…)를 보냈는데, 뜻밖에도 사무국에서 내가 지원한 팀이 아닌 관객심사단으로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어. 누군가 내 글을 쓸만하다고 생각해 주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세진 언니의 "저거 재밌지!?!!"와 같은 메커니즘으로, 영화에 더 가까이 와도 된다는, 이 세계에 발 들여도 된다는 새로운 승인처럼 느껴졌어. 

       막상 자원봉사를 시작하니, 거기는 또 다른 '시티'더라구. 영화를 둘러싼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가진 사람들, 영화제가 익숙한 사람들… 나는 한 달 남짓한 활동기간 내내 엄청난 열등감에 시달렸어. 강변역 찜질방 수면실의 불결함과는 다른 종류의 불편이 엄습했어. 내가 발붙일 곳이 아니라는 감각, 내가 얼마나 변두리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자각하는 순간의 연속.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마감에 맞추어 글을 쓰고, 인터넷에 공식적으로 내 이름을 단 글이 발행되고, 사람들이 내 글에 관해 이야기해주고, 상영 후에는 배우들과 술을 마시고 만취해 보는… 그런 경험들이 나를 엄청나게 고무시켰음은 분명한 것 같아.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캐리 브래드쇼가 맨해튼에서 무표정하게 칼럼을 쓰듯이, 나도 서울에서 영화에 관해 쓰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영화라는 세계의 내부에 위치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이 아니라,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 어드메에 위치할 수 있을까? 마침내 '지은이'가 될 수 있을까? 비록, 영상원조차 새로운 '시티'로 가는 경유지임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전적 대학의 영화이론 수업에서는 기호학과 할리우드 스타시스템, 방대한 영화사의 개괄을 배웠어. 파롤, 랑그, 〈전함 포툠킨〉(Battleship Potemkin)(서인숙 교수님이 [포템킨]이라고 절대 발음하지 않고 언제나 [포툠킨]이라고 하는 것조차 나에게는 짜릿한 기쁨이었다), 진 켈리, 고다르, 트뤼포, 누벨바그,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그런 것들이 영화 공부의 최상단이라고 생각했지. 여전히 나에게 영화란 무비꼴라쥬였고, 부산 국도극장이었고, 어쩌면 불가해한 영역으로서의 크리스티앙 메츠였어. 

        하지만 새로 만난 이들이 취급하는 영화의 최전선은 다른 것이더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트랜스-아시아. 내가 사랑했던 감독들과 비평가들이 아닌, 이름 모를 수많은 이론가와 마니 파버와 흰 개미… 들뢰즈, 푸코, 후설, 아피찻퐁, 이강생, 빅토르 에리세, 에드워드 양, 타르코프스키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어. 나의 범위에는 시네마테크가, 문화학교가, 그밖에 영화에 대한 아트시네마적 취향을 키울 수 있는 촉매가 없었고, 그래서 몰랐어. 더 당혹스러웠던 건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말하는 게 왜인지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는 거야.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그때 나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어. 그것이 저급하거나, 심지어는 저능한 취향으로 인지될 것이라는 두려움. 

<전함 포툠킨>과 오뎃사의 계단 (포템킨, 오데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금은 그것이 허상임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겁먹은 상태였고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숨기기 시작했어. 항상 쿨키드가 되기를 원했으니까. 새롭게 보고 배운 것들이 싫었다는 건 아냐. 좋은 것들, 재미있고 유의미한 것들을 많이 배웠지. 다만 그것들이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양 굴었던 시절에(이제는 시절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겠지) 나는 너무나 피로했어. 그런 식의 불필요한 자기검열이나 가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슬픈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이프(if)의 세계라는 것은 없으니까, 나는 결국 언제라도 동일한 시행착오를 겪고야 말았겠지.

         교환일기를 쓰면서 이제야 알게 되는 것들. 나는 평생 같은 패턴을 반복해 왔다는 것. 시티를 발견하고, 시티를 향해 가려고 발버둥 치고, 시티에 도달하면 영주권을 받기 위해 애쓰고, 그러다 다른 시티를 발견하고, 또 이동하면서… 섹스 앤 더 시티로, 영화제로, 영상원으로, 비평 씬으로… 사실 모든 시티는 신기루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멀어지고,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자격이나 인준의 목소리를 필요로 하니까. 

       배운 것들을 가지고 야망 넘치는 프로젝트를 발족하기도 했었지. 분명 그때는 구체적인 욕망과 열정과 목적이 있었던 것 같아. 그 일을 지속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영화나 비평과는 관계없는 이유로 완전히 소진되지 않았더라면, 체증을 벗어던지기 위해 의식적으로 영화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러고 보니 나는 심지어 영화에서 멀어진 이유조차 영화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구나. 신기루의 가장 잔인한 지점은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라, 그 신기루에 발을 들였다고 믿었을 때, 별안간 발밑이 무너지는 감각이 아닐까? 그러니 내가 마지막 시티에서 목격한 것들에 대해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겠지.

         결국 모든 시티가 나에게 영주권 따위 허락하지 않는 신기루였다고 해도, 그 신기루를 만지기 위해, 신기루에 속하기 위해 거쳐온 동선이 지금의 나를 조형했음은 아무래도 부정할 수 없겠어. 영화는 나에게 가보지 못한 세계를 약속했고, 나는 그 약속을 믿고 내 좌표를 부지런히 옮겨 다녔지. 최종 목적지가 실체 없는 오아시스임을 알게 되었을지언정, 이동하는 과정에서 내가 감각한 것들, 배우고 만나고 절교한 것들이 나를 이루는 지층이 되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지난한 발버둥은 헛수고가 아니라, 나를 양성리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가장 정직한 지질학적 이동이었던 게 아닐까.

       영화에서 멀어진 이후 벌써 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어느덧 육 년 차 직장인이 되었고, 영화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일을 하며 살고 있고. 물론 그 시간 동안 새로운 종류의 고통이 있었음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 최근에 나는 회사 밖에서는 인간이 아닌 어떤 무형질의 개체로 존재하는 느낌에 대해 자주 생각했어. 너와 거의 매일 그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에게 직장인으로서 특별한 긍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일의 부당함을 구조 탓으로 돌리며 한탄하는 일도 허망하다는 것을 알아. 다만 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을 갖게 됐어. 회사 밖에서까지 업무 스트레스에 영향받는 대신, 나라는 개체로서 독립적이고 행복하고 생산성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조건이 만든 욕망이라는 점에서는 이전과 다를 바 없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의 인준을 받기 위한 욕망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욕망이라는 점인 것 같아. 드디어 나는 누구의 승인도 기다리지 않게 되었어.

       여전히 나는 조건의 남은 자리를 따라 움직여. 출근 전과 퇴근 후에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농담이야. 어쨌든 이제는 거룩한 이들에게 주눅드는 대신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지. (물론 그 웃어넘김은 너그러움과는 관계없는 조롱, 심지어는 로스팅에 가까운 형태이긴 해. 근데 뭐 잘못됐나?) 늦은 퇴근 후 노트북을 펼치고 이 편지를 쓰는 지금, 나는 이제 새로운 시티를 모색하는 대신 보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보고, 읽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읽고, 듣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듣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겠다고 작심해. 그럴듯해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나 승인받기 위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텍스트를 인용하고 지껄이는 일을 그만두어서 기뻐. 와. 너무 속 시원하다. 

        너는 어때? 서산에서 서울로, '파임'에서 '노마드'로, 옷방에서 극장으로, 관객에서 뭔가 다른 것들로… 니가 찾아다닌 것도 시티였을까? 그리고 너도 시티가 필요 없음을 알게 되었을까? 

        그런데 솔직히 바칼로레아 소논문을 쓰고 매주 낙원상가에 가는 서산의 여고생 신포도는 너무 귀엽고 멋지다. 짐 캐리나 자비에 돌란한테 답멘션 받은 건 내 생각에는 이력서에 써도 될만한 스펙이야. 묘비명에도 써도 돼. 그게 너무 헤비하면 사후 너의 평전에 기록해. 내 평전에는 뭘 남기지…

스타벅스 합정메세나폴리스점에서, 유민


① 최근 유민은 대본리딩 뒤풀이 자리에서 당시 두 번이나 함께 술을 마셨던 배우를 다시 만났으나, 그는 유민을 기억하지 못했다. ② 그러나 언젠가는 써내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