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 2026. 01.

교환일기

취향의 형성에 관한 교신 4

신포도


유민에게

연두색 팔부바지가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직도 나는 ‘서울에서 산 옷’에 관한 이상한 동경이 있는지도 몰라. 방금은 연희동 카키스에서 생일 쿠폰을 쓰고, 파타고니아의 플리스 재킷을 샀어. 힙스터들이 가득한 그 공간의 기운에 짓눌려서, 바깥으로 나와 주섬주섬 새 옷으로 갈아입었지.

        “입고 갈게요” 한마디를 못해서 바깥에서 옷을 갈아입는 내가 좀 웃겼달까. 옛날 같았으면 ‘나는 왜 이렇게 소심하고, 한심하지…’ 생각했을 텐데. 오늘은 카페로 향하면서 ‘신포도, 참 귀엽다’ 하고 생각했어. 성인이 된 지 십년쯤 흐르니까 나를 대하는 넉살 같은 것도 조금 생기나 봐.

       네 교환 일기를 읽으면서 내 취향과 관련한 몇 가지 사건에 관해 떠올렸어. 지난 일기에서 이야기한 놀이와 집 안에서의 방랑은 주어진 조건이나 전제, 상황이었던 것 같아. 그런 전제들을 뒤흔드는 뾰족한 사건도 분명 존재했던 것 같아서. 네 과거가 내 일기의 길잡이가 되어 주네… 멋진 작업.

        네게 세계의 인준과도 같았던 세진 언니의 한마디를 들으니, 취향의 형성에 있어 ‘타인’의 존재를 배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마주할 세계의 테두리를 제시하는 가족이나, 지리적 조건과 같은 필연이 아닌… 갑자기 솟아오르는 종류의 일들 있잖아.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였지?’ 그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던 사건들. 취향의 유령, 세르주 다네를 닮은 유령이 나타나서 이상한 나를 마주하라며 그 사건으로 내몬 순간들.

       내게는 소설가 이외수와의 트위터 키보드 배틀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 열다섯 살이 된 당시에 막 트위터에 재미를 붙였었거든. 모든 트윗이 별세계인 데다가, 트위터리안 특유의 ‘안경 척’ 스탠스가 멋져 보였달까? 당시 이외수는 작가이자 논객으로서 보수 정권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심심치 않게 올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걸 못 견디겠는 거야.

        사실 이외수가 올리던 트윗들이 보수 정권을 까는 말인지, 진보 정권을 까는 말인지도 구분하지 못했어. 나한테 주어진 테두리, 조건은 정치에 관심을 두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불현듯 판단의 로직이 선 거지.
1. 이외수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소설을 쓴, 책을 제대로 읽지도 않는 내가 아는 꽤나 유명한 작가다.
2.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작가는 공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3. 공인이 모두가 볼 수 있는 (심지어 변두리, 정치 관심 없는 중학생이 볼 수 있는) 트위터에 정치적 의견을 밝힌다?
4. 그래, 이건 옳지 않은 일이야(자고로 공인이라면 본인의 정치적 의견을 밝히는 데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꼰대 중학생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음).
이외수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렸던 정치 관련 트윗에 답멘션을 보냈지.

        “안녕하세요. 15살 중학생입니다. 공인이신데, 이렇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올리시면 안 될 것 같아요. 누군가는 작가님의 트윗을 보고 흔들릴 수도 있잖아요.”

        그때 내가 말한 ‘누군가’는 정확히 ‘나’였어.

        ‘이외수 작가님, 당신이 계속 이렇게 제게 정치적 메시지를 노출시킨다면, 저도 거기에 휘둘릴 것 같아요. 제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다가… 당신이 저, 신포도를 정치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제게 당신의 메시지를 이염시키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당신은 유명 작가라서 그러한 부담감, 내지는 책임감을 감당하실 수 있으세요?’

        어떻게 보자면, 나는 이외수를 진심으로 걱정했던 거지. 15살의 나는 그런 책임감과 부담감을 등에 진 채 말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연희동 카키스 변두리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는 내가 15년 전에는 얼마나 더 겁쟁이였겠어.

       근데 이외수가 답장을 한 거야(!). 정확한 답신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 정치적/문학적 백그라운드가 부족한 중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었을 수도 있겠어. 그러나 내가 그의 답멘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후에 엄청난 양의 악플이랄까… 멘션을 받았었거든. 이외수를 사랑하는 팬들과, 이외수의 정치적 의견에 동조하는 수많은 어른들의 쓴소리들. ‘작가님, 중학생이 아니라 보수 우파 지지자인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 ‘이외수 작가님이 왜 공인이냐?’ … ‘한심하다’…(로 시작해 대한민국 정치판의 썩은 현실을 탄식하는 내용의 멘션들)

        정확히 기억하는 하나의 사실은 그날이 내 15살 생일이었다는 것이야. 생일 선물로 모르는 어른들의 쓴소리를 들은 셈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어. 그보다는 도파민에 잠긴 채 두근거렸지. 모르는 이들과 활자로 연결되었고, ‘공인’ ‘셀럽’으로 대표되던 이외수와 한 마디라도 나눠봤으니까. 실제로 내가 이외수를 ‘공인’이라고 칭한 것은 찬사의 뜻이 담겨 있었어. 나는 이외수와 대화하기 전까지 이외수만큼 유명한 사람과 대화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즈음이었던 것 같아. ‘아 그래, 나 서울에 가야겠어. 유명한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싶어. 주목받고 싶어. 나는 주인공이 될 거야. 작가든, 미술가든, 음악가든, 영화감독이든…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랑 (네가 언급한) ‘지은이’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게 내 사춘기의 시작점이었어. 트랙 위에서 총성이 울린 것처럼, 그 시점부터 마구 달려 나갔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 있다는 걸 느꼈거든. 브라운관에서 흘러나오는 세계의 조각만 우적우적 씹어먹는 게 아니라,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나도 그들의 세계, 어쩌면 ‘섹스 앤 더 시티’ 안에서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허황된 감각을. 사춘기를 고양시키기에 이보다 효과적인 신호탄이 있을까?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어머니는 내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놨어. 지금이라면 고려해 볼 법도 한데, 당시에는 매일같이 어린이를 마주해야 한다는 게 싫었거든. “나는 초딩들 싫은데?” 어머니와 아버지도 맞섰어. “네가 하고 싶은 게 달리 없다면, 엄마 아빠 뜻에 따라 선생님을 하는 게 좋겠다”라고 말이야. 너무 합리적이잖아? 반박할 근거를 찾으려고 서부평생학습관에 가서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한 학문 설명 시리즈를 훑어봤었어 그러다가, 어쩌다가, 『MT 영화학』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된 거야.

        영화 제목으로 25칸 빙고도 채우지 못하던 내가 어쩌다 ‘영화학’을 전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지는 모르겠어. 『MT 영화학』에 그만한 힘이 있었나? 책에 소개된 한 챕터는 영화 비평의 세계를 다뤘고, 영화라는 작은 매체를 통해서 세계를 보는 관점을 ‘재정립’할 수 있다는 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어. 나는 이미 이외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집 안에서의 방랑 바깥을 엿봤으니까. 영화를 만드는 건 히키코모리 습성을 타고난 내게 너무도 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혼자서 방에 갇혀서, 조각을 씹어먹으면서, 조각의 일부가 될 수 있는 비평에 관심을 갖게 됐지.

       네이버 지식인에 글을 올렸어. “영화과 교수가 되어서 비평을 쭉 공부한 다음에, 영화철학과라는 걸 만들고 싶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답을 달았어. “영화철학과를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너무 맞는 말이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영상이론과’라는 것이 있으니, 그걸 알아보시죠. 내공 잘 받아 갑니다.” 

       그게 뭔데. 그 학과를 찾아보고… 그 학과에 대한 글을 읽어보고… 그 학과를 나온 사람들이 쓴 글을 읽어보고… 그 학과의 설명과 커리큘럼을 찾아보고… 무엇보다 ‘예술학교’라는 이름에 끌려 무턱대고 그 학교를 준비하겠다고 마음먹었어.

       어머니, 아버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겠지? 그나마 전교권을 유지하던 자식이 갑자기 돈도 되지 않을 예술학교에, 그마저 익숙하지도 않은 괴랄한 학문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으니 말이야. 엄마 아빠는 물론 반대했어. 전교 1등을 하면 허락해 달라고 조건을 단 뒤에, 결국 전교 1등을 해냈었지. (자랑스러워서 항상 이야기하고 싶지만, 자랑스러워한다는 게 쪽팔려서 이야기는 못 하는 신화임.) 사실 영화 공부를 하게 되면서, 국어 성적이 엄청나게 올랐어. 국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부터 나는 ‘입시 준비’, 즉 학력 자본을 획득한다는 명목으로 영화를 마음껏 봤다. 수능 준비에 돌입하기 전인 고등학교 1~2학년 때는 매일 밤 두 시간을 투자해 영화 한 편씩은 꾸준히 봤지. 필요하다면 영화를 보러 서울에 갔어. 낙원상가에 위치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처음 봤던 영화는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수도원〉이었는데, 아 쉽지 않더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꾸벅꾸벅 졸았지만. 그 장소에 있던 내가 너무 대견했달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 아트시네마 한켠에 마련된 도서관에서 영화를 다룬 책과 지난 영화제의 리플렛들을 살펴보면서 힙스터가 됐다는 착각도 해보고… 텅 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감각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 때로는  〈한여름의 판타지아〉나  〈잉투기〉 같은 한국 독립 영화를 보러 서울에 오기도 했어. 나는 기껏해야 고등학생이었으니까. 결국 모든 것이 ‘입시 준비’를 위해 치러진 의식이었어.

       학교 안에서도 나의 개인적 욕망을 완성하고, (다른 서산 친구들과는 달랐던, 하지만 우월하다고 믿었던) 나만의 취향을 자랑하기 위한 활동들을 ‘학생부 종합 전형’에 끼워 넣었던 기억이 나. 프랑스의 수능인 바칼로레아와 비평의 필요성에 관한 소논문을 쓰고, 동아리 운영비 30만 원을 받아 영화 잡지를 펴냈지. 동료가 있었지만 사실 90%의 글은 내가 썼어. 진짜 영화평론가의 인터뷰를 싣겠답시고 무작정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 서울로 첫 출장을 가기도 했었다. 『FAIM』이라는 이름의 그 잡지… 사실 엉망이었어. 교정 교열도 할 줄 몰라, 틀린 맞춤법과 비문이 뒤섞인 결과물이었지. 기획의 각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자기중심적 배출이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을 다뤘거든. 대니 보일이나 자비에 돌란 같은 사람들. 그럼에도 모든 반의 사물함 위에 ‘내가 만든 영화 잡지’를 놔두던 순간의 뿌듯함만은 생생해.

잡지 『FAIM』. Film, Art, Imagination, Magazine의 약자였다. 그렇다면 ‘파임’이라 읽는 게 맞는데, 왜인지 나와 친구는 계속 ‘페임’이라 읽었다. 둘다 간지나서 괜찮은 것 같다.
열여덟 살의 10월에는 엄마와 함께 부산 영화제에도 갔었어. 서산에서 부산은 너무 먼 길이었기 때문에, 엄마가 새벽같이 차를 운전해 줬지. 그걸 천안아산역에 주차해 두고,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서 내린 뒤, 부산역까지는 다른 열차를 타고 갔던 것 같아. 그렇게 먼 길을 함께 와준 어머니께 〈언어와의 작별〉을 보여주는 불효를 범하고…. 〈라폴로니드〉의 후속작으로 초청된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로랑〉을 봤어. 〈라폴로니드〉를 너무 좋아했어서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의 토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셀카도 찍고, 사인도 받았었다. 그때 사인 받았던 노트에 이런저런 글을 마구 적었던 기억이 있어. 소중한 사인이 번지지 않게 문구점에서 산 코팅지도 붙여 뒀는데, 노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

베르트랑 보넬로에게 사인을 받던 날.

입시를 준비한답시고 매주 중앙대학교에서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강의를 들었었어. 시네마테크, 앙리 랑글루아,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진들…. 모르는 이름들이 가득하고, 제대로 알아들은 것도 없지만, 그냥 매주 상경해 강의를 듣고, 이상한 이름들을 듣고, 신기한 영화 제목들을 듣고, 영화를 공부하는 멋진 사람들의 곁에서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게 좋았던 것 같아. 이모 집은 오류동. 중앙대학교까지 매주 1시간 10분이 되는 거리를 오가면서도 지치지 않았어. 이외수 콤플렉스가 이렇게까지 힘이 셀 줄이야.

        그럼에도 내가 벌인 돌발적인 사건들은 사실 ‘돌발’과 ‘이상한 짓’으로만 남으면 안 됐거든? 어떻게든 입시 준비라는 이름 아래에 포섭돼야 했지. 나는 입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다양한 조각들을 씹어먹고, 그 조각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었거든. 입시가 아니었다면 보지 못할 영화, 듣지 못할 이름과 음악, 만나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뿌듯함을 만났어. 그렇게 내 취향이 점점 커지고, 또 단단해진 것 같은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입시’라는 분류로 포섭된 채 형성된 취향이 ‘온전히 깨끗하지는 않다’는 열등감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너처럼 어딘가에서 도피하기 위해 취향을 만난 게 아니라…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취향을 쌓았거든.

        사실 진짜 취향은 그런 게 아닌데. 죄악이고, 죄책감이고, 인준에서 벗어나려는 충동을 가져야 하는 것이고. 학생부 종합 전형이나, 논술이나, 자기소개서 같은 촌스러운 이름들이랑은 가장 먼 곳에 위치해야만 하는 것인데….

        그게 내가 지난 십년 간 극복해야 했던 열등감인가 봐. 그런데 오늘은 ‘신포도, 참 귀엽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 이 교환 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그 마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 물론 극복도 내가 순수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은 아니겠지. 이제야 나는 목적 없는 취향을 즐기고 있으니까. 목적 없는 취향에 다다른 다음에야, 목적을 향해 질주하는 취향에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는 거니까. 지금의 솔직함마저도 일종의 엘리트 의식? 같은 게 아닐까. 

        이외수,  『MT 영화학』을 쓴 정재형 교수, 유운성 평론가와 김성욱 프로그래머, 장 뤽 고다르와 베르트랑 보넬로, 대니 보일과 짐 캐리, 자비에 돌란… 당신들이 내게 한 짓을 알고 있어요?

〈대홍수〉를 보며 오열하고, 퉁퉁 부은 눈으로,
포도가. 


① 배우 정우성이 여성에게 보낸 플러팅 DM에서 차용한 문장. 그는 “작업을 잘하시고 즐기는 것 같”은 분께 “멋진 직업”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신포도는 이토록 대충 플러팅을 던질 수 있는 그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그래서 써봤다. ② 아마 이외수의 답신이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었을 것 같다. “본인은 그저 작가일 뿐, 정치적 의견을 밝히면 안 되는 공인이 아니다. 그리고 공인이라고 해도 정치적 의견을 밝힐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기억 속의 활자는 오랜 시간을 견딜 힘이 없다. 정확한 모양을 유지할 수 없다. ③ 이외수와 트위터에서 대화를 나눈 뒤로, 신포도는 아주 자신만만해졌다. 온갖 사람들에게 트위터로 편지를 보내고, 보잘것없는 그림을 보냈다. 실제로 그는 트위터 시기, 칸이 사랑한 영화감독 자비에 돌란, 코미디 연기의 대부 짐 캐리 등에게 멘션을 받았다. 이 짧은 멘션이 신포도에게는 취향의 승인, 세계의 인준 같은 것이었다. ④ 충청남도교육청서부평생교육원은 충청남도 서산시 석림동에 있는 도서관 및 평생학습관이다. ⑤ 고등학교 2학년 진로 상담 당시, 담임이었던 이정주 선생님께 학과 진학에 대한 뜻을 밝히니 선생님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거긴 예술 하는 애들이 가는 데야!”라고 말씀하셨다. 신포도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이름이 예술학교인데) 제가 모르겠어요?”라고 답했다. 어릴 때부터 싹바가지가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