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5호 > 교환일기 > 
인스타그램을 변기에 넣고서 내려 #1
👤신포도

얼마 전에 무라카미 류의 소설인 『타나토스』를 읽었어.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 <오디션>은 아주 좋아하지만, 무라카미 류 소설을 제대로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 그런데 아주 재미있더라고? 소설의 주인공은 정신 착란을 겪는 한 여배우야. 쿠바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감독인 일본 남자에게 자신의 삶을 망치거나, 혹은 구원했던 남성인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아주 오랫동안 늘어놓는 이야기지. 그 선생은 마약 유통자이자 사디스트이고, 잘 알아주는 뮤지컬 감독인데… 아차차. 소설 이야기를 하려던 건 아니고. 주인공인 여배우와 선생이 나눈 과거의 대화에서 언급되는 영화가 하나 있거든.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라는 영화.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만든 1989년 영화라고 해. 약에 중독된 젊은이들이 태평양 북서부를 돌며 약국과 병원을 털고 다닌대. 아니, 설명만 들어도 얼마나 재미있어? 진짜 못 참겠잖아. 류의 소설을 읽다가 ‘이 또라이 같은 선생이 이야기한 건 어떤 영화일까?’ 하는 생각에 영화 제목을 검색해 보았고, 위키피디아의 영화 설명을 읽으며 막 흥분했었어. 그래, 이 영화! 얼른 봐야겠다.

이쯤 되면 예상이 되겠지만, 나는 아직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보지 못했어. 그 어디서도 이 영화를 합법적으로 구할 수 없었거든. 돈을 내겠다는 마음가짐, 카드 번호, CVC 넘버, 간편 페이 인증을 위한 비밀번호 6자리까지 준비해 뒀는데, 한국에 사는 이상, 이 영화를 ‘쉽게 볼 수’는 없을 거래.

물론 어려운 방법으로 이 영화를 볼 수는 있을 거야. 저작권 따위는 제쳐두고 인터넷 아카이브를 돌아다니거나, 떳다방처럼 주소 끝에 달린 숫자를 바꿔가며 단속을 피하는 중국, 혹은 러시아발 누누티비 같은 곳을 떠돈다면 말이야. 그런데 아뿔싸. 인터넷 아카이브에는 트레일러만 있었고, 중국 혹은 러시아발 누누티비의 주소를 끝끝내 알아낼 수는 없었어. 토렌트는 최신형 맥에서 돌아가지 않은 지 오래고, 넷플릭스와 유튜브 프리미엄, 왓챠, 무비 등에 내는 구독료로도 등이 휘는 와중에 믿음직하지도 않은 P2P 사이트에 추가로 돈을 내고 싶지는 않았어.

아냐, 아냐. 내가 못 찾은 거지, 어딘가의 합법적 스트리밍 사이트에서는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한 줄기 빛은 유튜브 영화 단건 구매였어. 사실 네이버에서 제공하던 영화 단건 구매 채널이 폐쇄된 뒤에는 유튜브 영화 대여/구매를 잘 활용해 왔거든. 검색해 보니까 나오는 거야. 그래, 너구나. 유튜브, 자식. 너는 믿었다고, 하며 신나게 리모컨을 놀리는 순간… “이 동영상을 귀하의 국가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라는 팝업이 뜨더라고. 아주 깊은 한숨을 쉬었어. 나는 완전히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카우보이’ 신세가 되었지. 밥, 다이앤, 릭, 네이딘은 내가 보지 못한 영화 내내 약을 찾으러 돌아다닐 테지? 그 세계와 절대 만날 수 없는 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찾기 위해 그 네 명의 주인공처럼 떠돌아다니고 있고… 이것이야말로 무용하고 처절한 유랑 아닐까?

나도 알아. 지금껏 이야기한 것들이 모두 핑계라는 걸. 나는 방금까지 내가 설명했던 모든 짓을 해볼 수 있었어. 적어도 VPN을 써서 국가를 우회한 뒤 유튜브에서 정정당당하게 달러를 내고 영화를 볼 수 있었다고. 세상의 온갖 아카이브를 이 잡듯 뒤져 영화를 찾을 수 있었을 거라고. 그런데 그만큼의 노력을 들이자니, 급격히 피곤해지더라고. 예전에는 어떻게든 영화를 다운로드받고, 보고 싶어서 ‘피어 접속 중’이 켜진 토렌트를 완성하기 위해 나흘 동안 컴퓨터를 켜뒀단 말이야. 영화를 위해 컴퓨터를 켜둔다? 지금은 아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내가 게을러진 것은 영화를 향해 내가 갖는 애정이나 관심이 예전에 비해 떨어져서일까? 부정하고 싶진 않아. (비기가 한 말이 맞더군) 그런데 그 이유를 ‘나 자신의 내재적 변화’에만 돌리기엔 조금 찝찝해. 왜냐하면 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정말 보고 싶었으니까.

내가 찾은 답이 있어. 그래 이건 플랫폼 탓이다. 플랫폼이 모든 걸 너무 쉽게 만들어 둔 탓이다. 플랫폼의 접근 가능성은 너무 좋아. 지나치게 편해. 하지만 그 플랫폼에 모든 것이 있는 건 아니지. 플랫폼이 가지지 않은 것들에 나는 접근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 잠실 롯데월드몰 근처에서 구멍가게나 슈퍼마켓을 찾아본 적 있어? 쉽지 않을 거야. 그 거대한 마천루가 잠실 근방에 있을 수 있는 상권들을 일부만 취한 채로 모두 없애버렸거든.

왜 모든 것이 쉬워진 걸까? OTT에 접속하는 게 쉽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접속하고 보는 것이 주는 만족감이 기이하게 낮아진 탓에, 플랫폼이 제공하는 영화에 접근하는 행위 자체의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진 느낌이 들거든. OTT 플랫폼에서 본 영화는 아주 쉽게 휘발되는 것 같아. 영화를 무의미하게 빌린 느낌이랄까? 내가 그 영화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다는 생각, 적어도 그 영화를 보는 시간이 일부를 점유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달까?

왜 비행기에서 보는 영화는 OTT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게 느껴질까를 고민해 봤는데, 마찬가지의 답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 무시간을 떠도는 하늘 한복판에서 영화를 보는 건, 그 영화가 흐르는 시간이 내게 유의미하게 다가오도록 만들어 줘. 어쩌면 플랫폼 때문에 나는 영화를 예전만큼 소중히 생각하지 않는 것일 수 있겠어. 나는 영화에 접속하고, 영화에 접속하기 위해 영화를 구하고, 영화를 구하기 위해 그 영화의 존재를 깨닫는 것이 너무 쉬워졌다는 것에 상실감을 느껴. 그래, 너무 많은 일이 쉬워졌어.

아틀레트 파르주가 쓴 책 『아카이브 취향』에는 이런 표현이 나와.

“자료를 읽는 일과 자료를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놀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서관에서 자료 작업에 들어가는 시간은 곧 자료의 글자를 한 자 한 자 그대로 베끼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다. 이런 시시하고 엉뚱한 일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가고 저녁이 오면, 역사가라는 이 피곤하고 강박적인 직업에 대해 자문해 보게 된다. 이렇게 흘러간 시간은 그저 잃어버린 시간일까? 아니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겠다는 이상에 바쳐진 시간일까?”①

내가 영화를 찾아다니는 걸 역사가의 성스럽고 더딘 노동에 비교하려는 건 아니지만, 플랫폼이 없던 시기의 나는 영화를 저런 태도로 대했던 것 같아. 영화를 찾는 것은 시시하고 엉뚱한 일 같고. 이렇게까지 해서 이 영화를 봐야 할까 싶지만, 그 영화를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 마음 한편에 드는 의문을 못 보고, 못 느끼는 체하는 것. 그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다 완수하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전율을 느끼는 것. 나는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고민하고, 어떤 영화에 매력을 느끼고, 그 영화를 구하기 위해 해외 사이트를 뒤지고 다니고, 중고 디브이디를 사고, 맞지 않는 싱크의 자막을 억지로 맞추기 위해 손가락을 두 꺾쇠 버튼에 올려두고 100초, 110초씩 자막을 옮기며 영화를 봤던 시기가 훨씬 즐거웠던 것 같아.

넷플릭스에는 그런 불편함이 없어. 고객 지향적으로 구성된 깔끔한 대문에는 새로 나온 영화를 대문짝만하게 광고해서 무엇이 신작인지를 찾아볼 필요가 없지. 넷플릭스는 과도하게 친절해서 나의 취향을 데이터로 정리해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추천해 줘. 영화가 하나 끝나면 이어서 볼 영화를 추천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1화부터 3화까지는 찾을 수 있는데, 4화와 5화는 죽어도 찾을 수 없어서 6화부터 이어봐야 하는 공백이 가득한 시트콤,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 아마추어 자막 번역가의 기이한 문체적 습관을 엿볼 새도 없어. 넷플릭스 자막의 퀄리티는 훌륭하다 못해 지나치게 매끈해. 이해하기도 쉽고, 아주 편안하지. 그 넓디넓은 운동장에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수많은 영화를 볼 수 있어.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제외ㅋㅋ) 그런데, 왜 그럴 마음이 들지 않는 걸까? 왜 OTT 사이트의 메인 화면만 보면 설렘보다는 피곤함이, 발견의 즐거움보다는 모든 것을 놓치고 있다는 중압감이 드는 걸까?

이런 식의 감정이 낯설지는 않아. 나는 근래의 인스타그램, 트위터에서도 유사한 피곤과 중압감을 느끼고 있어.

트위터가 만들어지고 퍼지기 시작한 초기, 첫 교환 일기에서 언급했던 트위터에서의 만남을 기억해? 트위터는 내가 처음으로 짐 캐리, 자비에 돌란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도와줬거든. 대화 이후의 쾌감 같은 것도 그대로 전해줬고. 짐 캐리에게는 서산여고 2학년 교실 칠판에 그린 짐 캐리 얼굴과 함께, 나는 당신이 펼치는 코미디 연기의 “Big Fan”이라는 이야기를 했어. 자비에 돌란에게는 140자에 담기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종이에 적은 정성 어린 편지 3-4장을 함께 보냈지. 둘의 답신은 아주 짧았지만, 고맙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것도 대화의 일종이라면, 나는 플랫폼 초기에는 아주 즐거운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고딩 시절 포도가 짐 캐리와 자비에 돌란에게 받은 답신. 추억의 블루라이트 필터와 파랑새가 반갑다.

그 짧고 간단한 답신이 내게 아주 커다랗게 다가왔던 이유는 그 대화에 맥락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내가 마음을 담아 좋아하던 이와 대화할 수 있는 창구가 처음으로 열렸고, 그 기회가 너무 소중하다고 생각했지. 나는 결코 그저 그런 텍스트 데이터를 보내고 싶지 않았어. 칠판에 정성 어린 그림을 그리거나, 영어로 꾹꾹 눌러쓴 편지 사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도리어 자연스러웠지. 나는 월간차지 1호가 퍼블리시된 뒤, 자비에 돌란의 인스타그램에 DM을 한 통 보냈어. 당신과 대화했던 2014년을 떠올리며, 그 경험을 친구와 운영하는 웹진에 실었다고. 그런데 근래의 인스타그램은 친구 사이가 아닌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요청함에 따로 분류하잖아. 그래서 아마 돌란은 그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한 듯해. 그리고 사실 나역시, 고등학생 때 썼던 편지만큼의 정성을 담지는 못했지. 문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잖아. 널린 게 AI 번역기인데. 정성 어린 ‘체’하는 건, 이제 1초도 걸리지 않잖아.

불편함과 번거로움은 불가피한 방식으로 정성을 담게 해. 그 정성에 대한 응답이 보잘것없을지라도, 정성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는 마음 때문에, 그 보답에 맥락을 담게 되거든. 내가 아주 작고 사소한 보답을 안고 쪽쪽 빨고 있다면, 사실 내가 빨고 있는 건 그 안에 있는 맥락이야. 그게 없으면, 아무리 귀한 정보도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아. 내가 <드럭스토어 카우보이>를 비교적 열심히 찾아다녔던 것은, 사실 그 영화를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무라카미 류의 소설에서 접했기 때문이니까. 아마 힙스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스타 매거진에서 올린 포스팅, 그러니까

‘힙스터 되려면 봐야 하는 영화 5선’, ‘구스 반 산트의 숨겨진 명작’

같은 큐레이팅 페이지에서 마주했다면, 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카우보이’가 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까지 목매지 않았을 거야. 그렇게 내가 놓친 영화, 소설, 음악은 또 얼마나 많고, 얼마나 좋았을까?

플랫폼은 정보의 희소성, 발견의 쾌감, 정보의 수명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어. 예전의 플랫폼은 정확히 그 반대에서 태어나고 자랐을 텐데. 지금의 플랫폼에 넘쳐나는 정보들은 너무도 무가치해. 그것이 가진 정보값들은 아주 실낱같은 맥락을 겨우 붙잡은 채로, 곤죽이 되어 떠다니고 있어. 아직도 내 인스타그램 메인 페이지에는 친구들의 소중한 일상보다는 해외 셀럽들이 론칭한 무의미한 젤리 슈즈나, 셀럽 친구의 결혼 소식으로 가득해. A 매거진에서 방금 본 정보는 세 번만 스크롤해도 B 매거진에서 에코하고 있어. 기이하게 통일된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모습을 하고, 아주 약간의 표현만 바꾼 채로 말이야.

음, 그래 피곤해. 피곤해서 방금 평양냉면을 먹으며 <드럭스토어 카우보이>의 중고 디브이디를 샀어. 도착하면 공간차지에서 함께 보자②. 윙~ 하고 돌아가는 CDP 소리,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며 고전적인 디브이디의 UI 위를 떠다니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

공간차지에서, 포도가

공간차지에서 진행된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상영회

① 아틀레트 파르주, 『아카이브 취향』, 25쪽.
② 실제로 공간차지에선 스승의 날이었던 5월 8일 신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상영회가 열렸다. 3일 전부터 함께 영화를 볼 사람을 인스타그램에서 모집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응하지 않았고, 신포도와 유유민은 아메리칸 차이니즈 차우멘을 시켜 소주 및 콜라와 함께 영화를 즐겼다. 하나도 외롭지 않았고, 정말 즐거웠다. 아무도 모집되지 않은 이유라… 그건 인스타그램 탓으로 돌리려 한다.


Tags: 신포도 5호 탈플랫폼 교환일기


Updated 26.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