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책 파우치
책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필사 노트, 일기원래는 읽는 책을 그냥 쓰레기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쓰지 않는 젓가락이나 교정 고무줄이 그 책 안에 들어가있기 일쑤였고, 그 장애물들이 책갈피라 착각하고 잘못된 페이지를 펼친 적도 여러 번이었죠. 그러다 생일 선물로 친구에게 책 파우치를 받았고, 그 이후로는 ‘책’ 스러운 것들과 그에 수반하는 소품들을 이 안에 넣고 다녀요. 요즘은 제임스 테이트의 시집을 읽고 있습니다. 필사하고 싶은 것은 수박을 닮은 필사 노트에, 매일의 일정과 지난날의 후회는 빨간 몰스킨 노트에 적어 놓아요.
5.
바세린
핸드크림으로도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개구리의 그것처럼 벌어져 나온 곳은 해결이 안 돼요. 뭘 해도 저억저억 갈라지더라고요. 특히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더더욱. 매일 취미처럼 뜯는 손톱 거스러미는 말할 것도 없죠. 겨울에는 바세린을 챙겨 다니며 손등과 손톱이 자라 나오는 곳, 손가락이 갈라지는 곳에 수시로 발라줍니다. 사무실은 건조하거든요. 게다가 왜인지 사무실에서는 평소보다 더 화장실을 자주 가므로, 바세린은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죠.
6.
교정 고무줄
교정을 하고 있어요. 수술을 위한 교정인데, 수술 이후, 아래턱과 위턱의 교합을 맞추기 위해서는 고무줄을 껴야 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교정과 선생님은 나의 미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에 틀림없는 것이죠!) 고무줄은 각 앞니로부터 세 번째 되는 치아와 하악 끝 쪽 어금니를 이어줘요. 열심히 꼈는데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는지... 교정과에 가면 의사 선생님이 “고무줄 잘 끼신 것 맞죠?”라고 매번 물어보네요. 내가 밥을 너무 오래 먹어서 그런가…하고 저 자신을 의심하게 만드는 애증의 물건이에요.
7.
다 본 영화 티켓 - 어친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26/1/17 14:30)
살면서 영화 티켓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아본 적이 없어요. 사진을 보면 다들 아실 테지만, 티켓을 소중히 여긴 적이 없거든요.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영화를 무료로 보여주면서도 영수증 따위가 아닌 진짜 티켓을 줘서 그래도 가방에 챙겨넣기는 해요. 최근에는 해리스 디킨슨의 장편 감독 데뷔작인 <어친>을 봤고, 그 흔적이 가방에 남아 있네요. 영화는 그저 그랬습니다.
8.
투쿨포스쿨 아트클래스 바이 로댕 기름종이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갑자기 얼굴에서 기름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 몸이 국가였다면 환호를 보냈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니까요. 제가 기름을 내뿜는다는 사실을 부정한 지 어언 육 년, 저는 저의 생산을 인정하고, 그것을 관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 기름종이는 꽤나 특이한 구조예요. 퍼프 같은 것에 끈끈이가 달려 기름종이 한 장을 자동으로 붙여 주거든요. 저는 케이스에 달린 거울을 보며 우아하게 기름을 훔쳐내면 그만이죠. 타인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말이에요.
9.
이어폰 줄, 그런데 엄마가 떠준 때 탄 실을 감싼
에어팟은 참 편한데, 아주 중요한 순간, 갑작스럽게, ‘아… 힘이 다해버렸어. 오늘은 혼자 살아야 할 것 같아’라는 식으로 꺼져버려요. 그렇죠? 그럴 때를 대비해 줄 이어폰을 갖고 다닙니다. 언젠가 사 년 넘게 써온 에어팟 프로를 하수구에 떨궜을 때, 이 친구와 하루를 함께 했어요. (노이즈 캔슬링 없는 세계가 너무 폭력적이어서 그 이상은 버틸 수 없었죠.) 노란색 실은 어머니가 떠준 이어폰 옷이에요. 근데 때가 너무 탔군요. 가방과 동화되었나 봐요.
10.
향수 공병에 든 향수
큰 용량의 향수를 사면 공병도 함께 삽니다. 50밀리리터, 100밀리리터의 향수를 들고 다니면 향기로워질지는 몰라도, 승모가 심히 부풀고 미간이 찌푸려지기 때문이죠. 저 파란 병에는 현재 트루동의 ‘미드나잇 오멘’이 담겨 있어요. 근데 회사만 가는 요즘은 귀찮은 나머지 향수도 잘 안 뿌리게 돼요.
11.
이름 모를 약 (아마 외이도염 약으로 추정)
이러한 약봉지가 가방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아마 저와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 있으시겠죠? 항생제가 포함되어 절대 빼먹어서는 안 될 약임을 당부받고, 회사나 약속에 나가기 전 미래를 대비하며 약봉지를 넉넉히 넣어둔 후, 증상이 나아지자 그 약을 먹지 않은 거예요! (소름 돋죠?) 아마 제 기억으로 저것은 외이도염을 진정시키는 약이에요. 효과가 좋았는지, 사흘 치를 먹기도 전에 다 나았던 것 같아요.
12.
대한항공 어매니티 핸드크림
처음으로 대한항공을 타던 날, 정말 성공했다고 느꼈어요. 누군가는 비웃을지 몰라도 말이에요. 비행기 자리 위에 놓인 어매니티 백은 그야말로 감동이었죠. 그것을 쓰지는 않았고, 그 가방이 안 그래도 비좁은 저의 이코노미 좌석을 침범하고 있다는 것에 조금씩 분노가 솟기도 했지만요. 이 핸드크림은 가방에 넣어두고 가끔씩 꺼내 씁니다만, 바세린만큼의 파급력은 없습니다.
13.
케이크에 꽂힌 크리스마스 장식
때는 2025년 12월, 그날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술친구들로부터 받게 된 생일 케이크. 크리스마스 장식이 2개 달려있었죠. 벅찬 마음과 예뻐서 버릴 수 없다는 결심, 거나한 취기가 버무려져 가방 속에 있게된 것입니다. 다행히 사진 촬영 이후 버렸습니다. (지금은 내 생일도, 크리스마스도, 취한 것도 아니니까)
14.
가방
동묘에서 산 키플링 가방. 단돈 2만 원에 구매했어요. 안쪽에 때가 타있는데, 살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그보다 훨씬 더 더럽힐 수 있다는 걸. 덕분에 지금은 안쪽에 새어나온 틴트 물도 곁들여져 있죠. ‘숭이’ 붐이 불기 훨씬 전부터 모든 원숭이 캐릭터의 열성 지지자였던 저는 키플링의 시대가 다시 올 줄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온 건지 모르겠지만, 다들 두고 보세요. AI와 원숭이의 시대, 인간이 그들로부터 소외되어 낀 세대가 되는 때가 반드시 올 겁니다.
15.
나무젓가락
라면이나 도시락을 편의점에서 사고는, 젓가락을 맡겨놓은 양 강박적으로 챙겨 나오곤 해요. 그런데 집에 오면 젓가락을 챙긴 것을 잊어먹고 집에 있는 쇠젓가락을 쓰죠. 그렇게 저 젓가락은 제 가방의 지박령이 되어갈 거고요. 그러나 저 쓰레기 같은 것은, 한 번 정도, 젓가락이 없어 손가락으로 면을 집어 먹어야 할 때 내 구원자가 됩니다. 인터뷰 끝나면 이거 다시 가방에 넣을 거예요. 지박령이 구원자가 될 때를 기다리며.
편집부는 가방을 탈탈 털어주시고 재미난 이야기 아낌없이 나눠주신 열혈 독자 박귤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