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차지 7호 > 에세이 > 
심각하지 않거나 사사롭지 않을지 모를 미래에 대해 심각하고 사사로워지다가도 심각하지 않거나 사사롭지 않을지 모를 그 미래 속에서
👤이광호

SIDE A
2018년 진행된 학부 영화 분석 전공 수업에서 J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수업에 태만한 아이들에게…

“니네 왜 이렇게 영화를 안 보고 오니? 우리 때는 말이야. 우리는 이 영화(<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비디오 구하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 줄 알아? 그리고 그렇게 겨우 구한 비디오가 지금처럼 화질이 좋은 줄 아니? 그리고 자막도 말이야, 우리 때는 …… (이하 줄임)”

수강생 절반 이상이 영화를 보고 오지 않아 그날의 수업은 풀타임 쓴소리와 설교, 사사로운 과거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수업 진행을 위해 필요한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은 분명 태만한 학생들에 대한 지적이니 옳다구나지만 이건 사족이 너무 길지 않은가… 그때 내가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은 이런 것이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인터넷(서정주 「자화상」 변용). 저희는 그런 비디오로 보지 않아도 되는 걸요 교수님. 왜 이렇게 심각하세요?’ 당시보다 넷플릭스의 스크롤 길이와 유튜브 알고리즘, AI 파워가 훨씬 강화된 이 시대에 가끔 저 날의 수업을 떠올리게 되고는 한다.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요즘에는 많은 학생이 실시간 녹음 기능과 실시간 내용 요약 프로그램을 몰래 켜두고 수업을 (안) 듣는다고 한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교수님 입장에서는 더욱 심각해졌을 것이다. 우리 때는 나무위키라도 긁어와서 아는 척을 했는데. (ㅠㅠ) 어쩌면 전자기기 없이 달랑 펜과 노트만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교수님에게는 그것이 감동적인 장면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10년 가까이 지난 이제야 교수님의 심각함에 조금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걸까? 그럼에도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인터넷. 이해는 갈지라도 진정으로 심각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심각해지는 것은 내가 꼰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자각을 할 때일 것이다. 그런데 왜 꼰대가 되는가 하면 인생의 어느 순간을 맞닥뜨릴 때 농담처럼 넘기지 못하고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J 교수님처럼 말이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선생은 고려대학교 퇴임 강연에서 목욕을 하기 위하거나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는 일을 우리네 편의에 따르는 것으로 여기지만, 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이 끓는 일은 대단히 심각한 순간일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나의 입장에서 J 교수님의 심각함은 끓는 물 비슷한 것이었을 테고, 당시 나의 입장에서 저 끓는 물에 대해서 헤아려야 할 조금의 이유나 호기심이 전혀 없었던 것이었을 테다. 끓는 물을 무엇하러 생각하겠는가? 생각해 본다 쳐도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할 것인가? 이것은 불가능한 헛소리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2005년 케년 컬리지 졸업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자기 중심주의를 우리는 대놓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불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초기화되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회로가 설계되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본인이 온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면 경험이라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세상 모든 건 자신의 앞에, 자신의 뒤에, 자신의 왼쪽 오른쪽에, 자신의 TV, 자신의 모니터에, 그런 식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도 여러 방법으로 전달받지만 자기 자신이 느끼는 것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긴급하고, 그야말로 진짜죠.”

그의 말을 이어서 떠올리자면, 존재론적 질문의 대상을 효율적인 편의에 맞게 해체하고 조정해내는 AI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나를 중심으로 작용하는 태생적 초기값을 가꾸어 타자를 떠올리고 아름다운 신비를 발명해 내는 일일 것이다. 끓는 물에 대해 생각해보거나, 물오리가 막 헤엄치려고 하는 순간이나, 성냥이 불꽃으로 변하거나 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는 것. 결코 될 수 없는 타자가 되어보려 하는 그런 시도를 나는 상상력이라고 부른다. 김우창 선생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심각성을 인정”하는 일로, 마음에 깊이 새긴다는 뜻의 心刻은 곧 여러 차례 그것을 떠올리고 생각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다르의 말을 비틀자면, ‘심각’의 상위 개념인 ‘인지’가 횡행하는 시대에 우리는 화려한 비주얼로 연명하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이미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신포도가 아닌 단포도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을 때,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을 때, “나는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이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강보원, 「알라딘 21세기 최고의 책 :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추천사」

SIDE B
공간차지에서 진행한 AI+영화 소용돌이 세미나의 기억으로 올해의 초여름을 갈음할 수 있을 것 같다. 말이 세미나지 사실상 AI와 관련해서 이것저것 떠오르는 잡상을 잡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까웠다. 비난이 아니라 즐거웠다는 얘기다. 근데 무슨 얘기를 했더라? 우리는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만든 AI 영화의 구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AI 작동의 오류로 생성된 우연적 미학에 관해 토론했으며, 야근을 마치고 온 유민의 코믹한 밤티 만화에 폭소를 터뜨렸고, 그럴듯한 정도가 아니라 분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리얼하게 재현된 이미지의 놀라운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가, 역시 인간의 미덕은 불완전함에 있다며 휴머니즘적으로 감동하다가 “만약 AI가 그 인간의 불완전함마저 학습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다들 침묵하게 되었고…… (그러나 포도는 이에 반발하며 “AI는 항상 과거의 무수한 데이터로 형성된 평균값을 기준으로 결과물을 산출하기에 인간의 불완전함이나 우연적인 실수까지 표준화하여 수행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원체 AI에 대해 반감이 컸던 나는 그 천성적인 기질 탓인지 세미나에 참여하며 많은 지식을 얻어 가지는 못했다. 다만 제미나이나 GPT나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는 이제 간간이 업무에도 챗GPT를 이용하고 심심할 때면 AI 이미지 툴을 이용해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사사로운 에피소드를 한 가지 말해보자면 생성형 AI에 관한 것이다.



한글이는 우리 가족과 함께했던 반려견 중 내가 스마트폰을 가진 채로 만난 첫 아이로 사진과 영상이 많이 남아 있다. 그녀는 2014년 10월 9일 한글날 공주 유구의 어느 국도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다 우리 가족이 되었고 2025년 9월 29일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모르긴 몰라도 어느 집에서 키워지다 버려졌을 그녀는 좀처럼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했는데, 생전 누구와도 단 한 번도 입맞춤을 해본 일이 없으며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고수하는 INFP 얼음공주 몰티즈였다. 위의 사진은 몇 안 되는 그의 웃음(?) 사진인데, 원본이 사라져 이모티콘용으로 만들어 놓은 저화질 512*512 픽셀의 저화질 사진 외에는 다른 판본이 없었다. 하지만 ……



눈두덩이의 갈색 그러데이션, 색이 바래 빛을 받으면 허연빛이 도는 밤색의 코, 그 주위에 습기로 인해 뾰족한 가시처럼 모여든 털들, 분홍빛으로 선연한 혓바닥과 말똥하게 빛을 반사하는 아름다운 안광에 이르기까지. 챗GPT 무료 버전으로 리마스터한 한글이의 얼굴은 내 기억 속의 그 모양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생성형 AI 이미지라고는 한 때 모두의 콘텐츠였던 지브리 이미지 만들기 열풍 때 한두 번 실행해 본 게 다인 나로서는 이 놀라운 기술력에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구글의 Veo를 이용해 사진을 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 ‘심각’의 상위 개념인 ‘인지’가 횡행하는 시대에 화려한 비주얼로 연명하면 좀 어떤가? 단포도의 시대가 되면 좀 어떤가? 느낌표의 시대가 되면 좀 어떤가? 우리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이 결국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우선 내가 살고 볼 일이다. (???) 물론 언젠가 <터미네이터>처럼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이 바둑판이 아니라, 전 지구와 대륙을 넘어 내가 사는 동네에서 벌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차원의 거대한 문제에 관해서 내가 말할 것은 거의 없다. 그 비극적인 미래가 먼 미래의 장면인지, 얼마 남지 않은 미래의 장면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다만 놀라운 재현 능력을 통해 우리가 잠시나마 그때 그곳의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다면 이것은 일단 기분 좋고 달콤한 무력감이다. 어차피 미키마우스를 좋아한다고 생쥐까지 좋아할리는 없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그렇지 않았던가? 최초의 영화 중 하나로 알려진 뤼미에르 형제의 <시오타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상영되었을 때, 관객들이 놀라서 객석을 박차고 도망쳤다는 썰은 구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던가? 나는 일단 그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AI 시대를 맞이하겠다.


Tags: 이광호 7호 동물친구들 AI 에세이


Updated 26.09.30.